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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의 오늘은 SF] 정치적인 V

1980년대 초에 나온 미국 텔레비전 시리즈 <V>는 외계인의 대규모 지구 방문을 다룬 이야기다. 나는 <V>에서 가장 긴장감 넘치고 아슬아슬한 장면이 초반의 외계인 등장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그 장면을 보여주기 위한 도입부터가 아주 멋졌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전세계 각 지역에 외계인의 우주선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찾아온 이유는 무엇인지 지금부터 무엇을 할 것인지 다들 궁금해하는 가운데, 우주선은 그냥 가만히 멈춘 채로 기다리고 사람들은 저마다 TV 앞에 모여들어 세계 각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지켜본다. 말하자면 뜸을 들인 것이다.

이 뜸들이는 대목의 연출은 대단히 근사했다. 일단 외계인 우주선의 모습부터가 훌륭하다. 우주선이라고 하면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비행접시 형태의 모양이기에 구구한 설명 없이도 쉽게 외계인 우주선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면서도, 그냥 옛날 장난감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하나만 예를 들면 일단 <V>에 등장하는 비행접시는 굉장히 크다. 단순히 외계인 탐사대 몇 사람이 타고 다니는 교통수단이라는 느낌이 아니다. 비행접시 하나가 도시 상공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하다. 그 덕택에 거대한 물체를 공중에 띄울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는 무시무시한 적이라는 느낌을 과시할 수 있다. 동시에 갑자기 대낮의 도시에 햇빛을 가리며 그림자가 드리우는 모습이, 엄청난 천재지변 느낌의 재난인 듯한 심상을 살릴 수도 있었다.

이런 연출의 전통은 1950년대 SF 황금기의 명작으로 꼽는 소설 <유년기의 끝>에 나오는 외계인 우주선의 느낌을 화면으로 생생하게 표현한 것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얀 빛깔의 거대한 덩어리가 별다른 치장 없이 대낮 도심 상공에 떠 있는 모습이 불가해함을 나타내는, 그러한 미술적 충격을 주는 현대미술과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거창하고 진지한 외계인 우주선이 등장하는 장면의 연출을 이야기할 때 <미지와의 조우>는 2등으로 뽑으면 서러운 영화일 것이다. 나는 밤에 나타나 온갖 소리와 요란한 색색깔의 불빛으로 현란한 쇼를 벌이는 <미지와의 조우> 이상으로, 대낮에 거대한 비행접시가 조용히 나타나 그냥 멀거니 가만히 있는 <V>가 멋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비행접시에서 막상 외계인이 내려와 모습을 드러내면, 곧 굉장히 맥빠지고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나와버린다. 엄청나게 분위기를 잡고 진지한 척하면서 외계인이 등장하는데, 그냥 미국 중년 아저씨처럼 생겼으며 나아가 지구인들에게 뜻을 전하기 위해 영어라는 언어를 사용해 말하기 때문이다. 태양계 너머 머나먼 우주 끝에서 수십억년 동안 지구와 아무 상관없이 탄생한 외계 생물이 하필 사람처럼 두발로 걷고 두손을 앞뒤로 움직이며 걷는 것부터가 대단히 놀라운 우연의 일치인데, 그 생물이 입을 움직여 소리내는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은 더욱더 기이한 일이다. 하다못해 지구의 벌도 춤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개미도 냄새로 의사소통을 하는데 외계인이 말로 의사소통을 한다고? 게다가 그 입으로 영어를 그렇게까지 유창하게 말하다니?

어떻게 이렇게 황당한 이야기를 그냥 이어 붙였을까? 물론 가장 중요한 까닭은, 그렇다고 치고 넘어가야 할리우드에서 배우에게 외계인 역할을 쉽게 맡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다리 8개 달린 해파리 모양의 외계인이 춤으로 의사소통을 한다고 하면, 아무리 뛰어난 배우에게도 연기를 시키기 힘드니까. 그렇거나 말거나 <V>의 그다음 내용을 보면 이런 점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강렬한 시작 장면에 이어 붙이는 이야기에서 외계인이라는 소재로 보여줄 수 있는 다채로운 과학적 상상력 이상의 이야기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V>에는 적과 싸우는 이야기 속에서 작가와 제작진이 보여주고 싶은 정치, 사상에 관한 주제가 있었다. <V>의 외계인들은 독재 정부를 상징한다. 시대 배경을 생각하면 당시의 공산주의 국가,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비판으로도 비칠 만하다. 아닌 게 아니라 냉전, 즉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과 경쟁이 극심했던 1950년대 전후의 SF물에서는 외계인 침공 이야기를 다루는 유행이 이미 한번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그 시절의 외계인 침공 이야기들은 핵무기가 대량 배치된 시대에 강력한 기술을 가진 상대와 전쟁을 벌이다가 인류가 모두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반영된 것이라고들 한다. 그러다 데탕트 시대와 베트남전 종전을 지나며 냉전은 잠시 소강기를 맞는다. 이후 1980년대 들어 다시 미소간 대립이 심해지면서, 소위 신냉전 시대가 찾아왔는데 이때가 마침 <V>가 제작된 시기다.

<V>에서 외계인들은 지구인들에게 발달된 기술을 전해주어 지구인 모두가 잘 살게 해줄 거라고 선전한다. 그러면서 하나둘 지구인을 포섭해나간다. 그렇지만 사실 외계인들에게는 다른 꿍꿍이가 있는데, 결국 자신들이 지구인을 지배하는 것이 목표였던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다. 지금 어떤 사상가들은 부자들의 돈을 몰수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모두가 잘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거기에 솔깃한 사람들이 그쪽으로 넘어갈지 모른다. 그러나 결국 세상이 그런 식으로 변하고 나면, 그 후로는 사회의 모든 일들을 처음 그 사상을 퍼뜨린 사상가들과 그 동료 몇몇이 장악하는 세상이 될 뿐이다. 거기에 속지 말고 저항하자는 게 <V>의 이야기다. 마침 공산주의와의 긴장이 높아지던 시대에 어울리도록, 이 TV시리즈에는 악당 외계인들은 항상 붉은색을 좋아하는 것으로 꾸며져 있었다.

SF는 “세상이 지금처럼 굴러가다 보면 잘못하면 이렇게 될 수도 있다”는 미래 이야기를 자주 늘어놓곤 한다. 이런 이야기는 “내 주장에 한표를 주지 않으면 우리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정치인의 주장과 구조가 비슷하다. 그러다 보니 노골적인 정치, 사상을 내세우는 SF도 자주 나오는 편이다. 가끔 신문 사설에 “얼마 후의 한국 모습”이라며 미래의 한국이 망한 모습을 쓰는 기자들이 있는 것만 봐도 이런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나는 그런 SF를 보는 것도 나름의 재미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런 중에서도 가끔 멋진 것들이 나오기도 한다. 이를테면 세상 알 수 없는 것이 <V>에서 가장 인기 있고 화제를 모았던 등장인물은 하필 악역인 외계인 과학 담당 책임자, 다이애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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