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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 평론가의 '더 노비스', 분열적 일인칭 영화가 해체한 시점숏의 의미

경쟁, 집착적으로 몰두하는 캐릭터, 긴박한 호흡까지 스포츠영화에서 기대되는 전형들이 여기 다 있다. 그러나 무언가가 이상하다. 일단 조정 경기의 몸짓을 따라가보자.

0. 달라붙은 영화들

달라붙은 영화들이 있다.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일어난 상황엔 눈독 들이지 않고 인물에게 밀착되어 그가 체험하는 지금에만 오롯이 집중하는 영화들. 몇년 전만 해도 이를 ‘나’ 중심의 영화라 곧장 호명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다. 개인의 드러냄을 강조할 필요가 없게 된 요즈음 ‘나’라는 호명은 원래의 효력을 잃었다. 나의 드러냄은 익숙하고 빈번하다. 개인 SNS를 통해 다른 자아를 만드는 일쯤은 거창한 예술을 통과하지 않고도 가능한 일상이 되었다. 자기계발서를 읽으며 ‘일상 예술화 전략’을 꿈꾸던 순진한 시기는 예술이 일상이 된 시대에 삼켜졌다. 극단적으로 제한된 비전에 몰두하는 영화들은 오늘날 보이는 것이 포화상태에 이르렀음에 대한 하나의 반응처럼 보인다. 오늘날 이미지가 당면한 문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비윤리적인 구분에 의한 의도적 회피가 아니라는 조건에서)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더 노비스>에서 조정용 배나 로잉 머신의 좁은 틈에 몸을 꿰맞추는 알렉스(이저벨 퍼먼)의 모습은 한계가 없기에 한계를 갈구해야 하는 이미지가 처한 상황과 조응한다.

1. 왜 조정인가?

<더 노비스>와 함께 <위플래쉬> <블랙 스완>을 언급하는 일은 적절하긴 해도 그리 흥미롭지 않은 비유 같다. <위플래쉬>는 감독 로런 해더웨이의 참여작이니 언급해야 마땅하겠지만, 적어도 욕망에 따라 자신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인물을 말하기 위해 두 작품만 특별히 따로 언급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이들과 나란히 <더 노비스>를 생각할 때, 간과할 수 없는 디테일한 차이가 더 눈길을 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 중심으로 전개되는 <위플래쉬>와 경쟁자와의 관계가 욕망을 강화하는 <블랙 스완>은 관계에서 비롯된 갈등이 서사의 중심축이다. 이에 비해 <더 노비스>는 혼자의 영화처럼 보일 정도로 관계의 흔적이 옅다. 물론 알렉스의 곁에는 은근히 뒤통수치는 코치가 있고, 자신보다 여러모로 인정받는 경쟁자 제이미(에이미 포사이스)가 있으며, 누구라도 기꺼이 유혹당할 애인이자 조교 대니(딜론)도 있다. 다만 이들과의 관계가 홀로 조정 연습에 몰두하는 알렉스의 충만한 시간을 흔들지는 못한다.

<더 노비스>를 스포츠 경기에 관한 영화로 인식한다면 <위플래쉬>의 현란한 연주나 <블랙 스완>의 섬뜩한 발레 공연에 대적할 만한 긴박한 경기 장면이 없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다. 후반부에 1인용 보트를 타고 진행된 조정 경기 장면이 방점을 찍지만, 그마저도 짓궂고 위협적인 날씨에 의해 중단된다. 따로 언급하고 싶은 인상적인 장면은 조정 경기와는 무관한 이미지다. 물에 뜬 채 멈춘 배 위에서 알렉스가 본래 있던 자리에서 앞으로 이동해 자리를 바꾼다. 카메라는 이를 부감으로 잡아, 알렉스의 몸이 마치 누운 선수들의 몸 위를 훑고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 이미지가 에로틱하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해 따로 부연할 필요조차 없다. 매일 새벽 버거운 일인용 조정 배를 운반하며 연습을 반복하던 알렉스가 어느 순간 물 한가운데 뜬 배 위에 누워 정박한 부감 장면도 빼놓을 수 없다. 아름다운 휴지부는 알렉스의 강박을 약화하거나 이에 포괄되지 않은 채 독립된 이미지로 남는다.

왜 조정인가. 여타의 영화와 비교할수록 근본적인 차원의 질문을 던지게 된다. 조정 경기의 본질은 특정 동작의 반복이다. 같은 자리에 앉아서 노 젓기를 반복하는 행위가 스펙터클이 될 리는 없다. ‘다리, 몸통, 팔’로 출발해 ‘팔, 몸통, 다리’로 빠져나오는 규칙적이고 반복된 움직임이 있을 뿐이다. ‘다리, 몸통, 팔, 팔, 몸통, 다리’라는 주문과도 같은 구호는 몸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을 때까지 반복될 것이다. 반복이 곧 조정의 본질이며, 영화는 이를 강조한다. 반복 강박은 실제 경험에 바탕을 두었다는 감독의 말만으로는 충분히 해명되지 않는다.

2. 반복의 페르소나

보트 위에서 반복해서 노를 젓는 행위는 팀의 승리 혹은 알렉스의 1군 진입 같은 표면적 목표에 한번도 도달하지 않는다. 조정 경기가 출발, 도착과 무관한 것처럼 영화는 출발과 도착의 완결된 루트를 생략한다. 출발하더라도 결승선을 통과하지 못하거나, 출발한 적 없이 결승선에 도착한다. 배 위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선수들의 모습만이 흔적처럼 남겨질 뿐이다. 시작과 끝이 흐릿해진 사이 로잉의 반복된 동작만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이 동작은 완결되지 않고, 다만 서로 다른 방식의 반복 행위로 이식된다.

반복은 알렉스의 삶의 태도와 행위 방식 자체다. 강의실에서 시험문제를 풀던 알렉스는 일찌감치 풀이를 완료한 뒤, 다시 강박적으로 문제 풀이를 확인한다. 그가 고개를 잠시 숙였다가 들었을 때 시간은 빠르게 흘러버리고 알렉스는 어느덧 교실에 혼자 남아 있다. 알렉스는 조정만이 아니라 자신이 가장 부족한 과목을 전공하는 등 생활 전반에 있어 일부러 어려운 길을 택한다. 그가 가진 유일한 키는 반복이다. 알렉스는 케네디가 연설에서 달 탐사에 도전하는 이유에 관해 “쉽기 때문이 아니라 어렵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을 인용해 자신의 행위를 설명한다. 이는 아무것도 희망하지 않음을 의미하기에 장학금을 위해 조정을 시작한 제이미보다 더 잔혹하고 냉정한 현실 인식이다. 확장하자면 이것은 믿을 것이 없지만, 무언가를 믿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다. 행위의 정지는 곧 죽음이므로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무언가를 하면서 인간임을 증명해야 하는 고단한 생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알렉스의 반복은 형벌로서의 반복에 가닿는다. 바위를 산 위로 굴려 올리는 행위를 반복해야만 하는 시시포스의 형벌은 인생의 무의미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미지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에서 무의미를 전복하기 위해 행복한 시시포스를 상상할 것으로 제안한 바 있다. 카뮈의 논의는 신화의 구조를 내려다보는 대신 시시포스 가까이에 다가선다. 그 시선 속에서 방금 굴려 올린 바위가 산등성이를 따라 내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의 얼굴이 보이고, 그의 머리에 스친 생각을 상상하게 된다. 혹은 그가 바위를 굴러 올리기 위해 다시 산등성이를 내려오는 순간 불었을 한줄기 바람에 희망을 걸게 한다.

<더 노비스>가 시시포스 신화에 대한 다른 도전이라면 어떨까. 영화는 카뮈보다 통쾌하고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신화의 구조를 전환적으로 인식하는 데 영감을 준다. 만약 바위를 산등성이로 들어 올리는 것이 일종의 스포츠라면? 그는 바위를 산 위로 들어 올리는 시간을 단축하고 근육을 단련하는 데서 기쁨을 찾을 것이다. ‘산’과 ‘바위’가 만드는 상승과 하강의 구도를 ‘강’과 ‘배’에 의한 수평의 횡적 운동으로 바꿔본다면? 형벌의 의미는 약화될지라도 바위를 들어 올리는 것이 불가능해 출발 기회조차 얻지 못한 이들이 출발선에 설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조정은 반복의 스포츠인 동시에 상상의 스포츠다. 조정 경기만큼 연습과 실전 훈련의 격차가 큰 스포츠도 드물다. 로잉 머신 위에 앉은 순간은 실제 물 위에서 실행되는 조정 경기로 그대로 번역되지 않는다. 연습과 실전의 거리는 나란히 배치된 기구에 횡으로 나란히 앉은 연습실의 구조와 서로의 등을 보는 상태로 일렬로 도열한 조정대의 구조만큼이나 멀다. 상상과 분열의 스포츠로서의 조정은 다시 종교에 가닿는다. 조정팀의 상징인 까마귀 이미지는 환청과 환시를 자아내는 종교적 상징물처럼 보이고, 알렉스의 손바닥에 난 상처는 마치 ‘성흔’처럼 보인다. 종교로서의 조정은 딱히 이루고 싶은 커다란 목적이 없는 알렉스에게 적절한 운동처럼 보인다. 종교가 믿음을 지키기 위한 희생 위에 세워졌고 그에 대한 참회를 요구하듯, 알렉스는 악착같이 자신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다. 소진 직후에 오는 땀과 피와 오줌과 침 따위의 그 모든 비루한 액체들은 알렉스 개인의 끝과 소진을 향해서만 흘러든다. 이것은 악마를 몰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악마 없이 행해지는 엑소시스트의 잔여물이다.

3. 시점과 체험

알렉스에게 달라붙은 카메라는 마치 스캔하듯 그의 정신의 비전을 흡수한 뒤 표출한다. 그것은 관찰보다는 체험에 가깝지만, 정제되고 조직된 체험이 아니라 노골적이고 거칠기에 인물에게 안락하게 달라붙을 수만은 없는 체험이다. 이미지는 종종 고통스럽지만 눈 돌릴 정도는 아니고, 한 사람의 정신에 매몰되는 느낌을 주지만 폐소공포증을 유발하지는 않는다. 이 영화의 애매한 비전을 일컬어 분열적 일인칭 영화라고 칭하고 싶다.

잠시 일인칭 시점을 보여주는 다른 경우를 생각해보자. 엄밀히 말해 일인칭 시점은 대상의 눈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관객은 ‘나’와 달라붙어 있어 그가 보는 것만을 볼 수 있을 뿐이며, 그가 거울을 보지 않는 한 자신이 누구인지 식별할 수 없다. 대상의 시선은 엄밀히 말해 카메라의 시선과 다르지 않다. 이를테면 알렉산드르 소쿠로프의 <러시아 방주>에서 카메라는 원숏 원신으로 일인칭 시점숏을 보여준다. 화자인 주인공은 카메라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목소리로만 등장하고 등장인물들은 카메라에 대고 말하고 연기한다. 이러한 사례가 보여주듯, 일인칭 시점숏으로 진행되는 영화에서 초점은 주인공의 시선에 비친 바깥 세계에 집중될 뿐, 하나의 인격체로서 ‘나’의 자리는 약화된다. 반면 <엔터 더 보이드>는 일인칭 시점숏만으로 진행되는 영화임에도 캐릭터의 개성이 내러티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독특한 영화다. 관객은 불청객이자 수감자처럼 자의식 과잉의 인물 안에 갇힌다.

최근에는 일인칭 시점숏 실험보다는 인물을 카메라에 잡아두는 방식으로 일인칭 시점을 보여주는 영화들이 눈에 띈다. 로라 완델 감독의 <플레이그라운드>에서 카메라는 작고 어린 노라(마야 반데베크)만을 집요하게 따른다. 노라의 얼굴을 담기 위해 카메라는 낮아지며, 인물의 시야를 재현하는 것처럼 다른 인물을 대부분 흐릿하게 포착한다. 흐릿함은 관객이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목격했다는 느낌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아닌 능력이 된다. 시야가 제약된 상태에서 카메라에 비친 것은 나쁘고 강하거나 선하고 약한 것으로 양극화되고, 관객은 한정된 정보만으로 주저 없이 대상을 판단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인다. 이것이 노라와의 일치된 시점을 공유하는 체험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반대로 그 시선은 노라를 착취하고 있지는 않은가. 카메라는 동의받지 않고 인물의 삶을 깊숙이 관찰한다. 이러한 카메라의 시선과 닮은 것은 아이돌 그룹 멤버별 직캠 영상이다. 직캠은 공개된 무대나 방송을 재편집한 것이고 특히 센터가 아닌 멤버에 주목하는 직캠 영상의 경우, 덜 보이는 곳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는 멤버가 있음을 보여주는 순기능을 할 수 있다. 반면 무대 바깥에서 한 인물만을 집요하게 따를 경우 그것은 섬뜩한 스토킹이 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이게 한다는 선의는 한편으로는 눈에 띄고 싶지 않은 존재와 순간이 있다는 사실을 쉽게 잊는다.

<플레이그라운드>가 비판받는다면 그것은 <사울의 아들>이 비판받았던 지점과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사울의 아들>은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인물이 처한 특수한 상황을 통해 가까이 마주하게 한다. 사울(게자 뢰리히)에게 달라붙은 카메라는 얕은 심도로 그가 처한 상황에의 몰입을 유도하며 그외에는 포커스가 맞지 않는 흐릿한 이미지로 처리한다. 흐릿함은 아우슈비츠를 외면하거나 부정하지 않으면서 쉽게 재현하지 않으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으로 흐릿함은 리얼한 체험을 위한 방편이나 금지된 이미지에의 욕망을 깨우는 자극적인 이미지로 얼마든지 옮겨붙을 수 있다.

관객이 가까이에서 체험해야 할 금기된 이미지의 자리에 여성의 신체적 고통을 놓아두는 일련의 영화들이 최근 공개되었다. <그녀의 조각들> <레벤느망> <아이카> 등 캐릭터의 반응과 경험을 따라가는 세편의 영화는 저마다 고통의 이미지를 마주하게 한다. <그녀의 조각들>에는 출산 장면을 실시간에 가까운 체험으로 보여준다. <레벤느망>은 임신 중절이 불법이던 시기에 위험한 자가 시술을 시도하는 인물의 시간을 견딘다. <아이카>는 막 출산한 인물이 독촉에 시달리며 내몰리는 고통의 동선에 동행한다. 인물에 달라붙어 비전을 제약하는 카메라는 객관화의 지표가 되기 거부하며 고통의 전시와 감상의 딜레마를 넘어서려는 것 같다. 영화는 관객에게 고통을 전이시키는 것은 분명하나, 그것이 실제의 고통과 같을 리 없다. 그러나 이들 영화는 시야와 동선을 제한하면서 인물의 고통을 그대로 관객에게 이식할 수 있다고 선하게 믿는다.

4. 일인칭 시점은 어디에

시점과 전이를 동일시하는 것도 곤란하지만, 반대로 체험을 비윤리성으로 규정하는 것에도 저항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더 노비스>의 경우는 어떤가. 인물에게 밀착한 카메라는 종종 흐릿한 비전을 보여준다. 흐릿한 비전은 얕은 심도에 의한 것도, 윤리적인 선택도 아니다. 영화의 흐릿함은 카메라의 효과가 아니라 영화 내부에서 차오른 습기에 의한 현상처럼 보인다. 어떤 것에 과도하게 몰입하는 인물에게서 뿜어져 나온 액체와 열기, 늘 어둡고 축축한 지하 연습실, 비가 오거나 안개가 끼거나 천둥, 번개가 치는 습한 실전연습장 등이 흐릿함의 물리적 근거가 된다. 흐릿함을 통해 카메라는 인물과 대상에 반응한다.

몰입은 인물을 얼마나 가까이서 잡는가 하는 거리의 가까움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더 노비스>에서 카메라는 대부분 인물에게 밀착되어 있으나 반대로 (때때로 극단적인) 부감으로 인물을 멀찍이서 관찰하는 숏도 종종 있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호수 한가운데 뜬 보트 위 인물에 대한 극부감에서 출발했다. 인물에 달라붙은 카메라가 반드시 대상화 위험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처럼, 부감숏이 꼭 대상화를 의미하진 않는다. 카메라와 인물의 거리가 극단을 오가는 가운데 각 숏의 의미는 서로에 의해 변한다. 반복 강박에 의한 중얼거림과 수면 부족, 과로에 시달리는 인물을 향한 밀착숏이 부감으로 멀어질 때, 부감숏은 일종의 해방감을 준다. 그 순간 알렉스는 육체에서 빠져나와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만 같다. 이것은 실신과 소진의 비전, 혹은 꿈의 비전이다.

실제 인물의 시점처럼 극중 인물의 시점 역시 단일한 것일 수 없다. 일인칭 시점의 영화들은 종종 이 사실을 잊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 분열적 시점을 연상시키는 일인칭 영화에서 시점과 체험의 경직된 속박에서 놓여날 가능성을 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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