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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규 평론가의 '탑건: 매버릭' 이미지의 죽음

“나는 폭탄에 반대하지 않지만 군대는 반대한다.”

- 장뤽 고다르

매버릭은 어떻게 살아난 걸까? <탑건: 매버릭>의 도입부. 신형 전투기 개발 프로그램이 중단될 위기에 처하자, 매버릭은 아직 성능이 검증되지 않은 전투기를 몰고 목표속도인 마하 10을 돌파하는 초음속 비행을 성공시킨다. 그러나 동료가 염려한 대로 목표지점에 도달한 뒤에도 그는 가속을 멈추지 않는다. 과열된 기체는 끝내 사고를 일으킨다. 순식간에 통신이 끊어져 비행을 지켜보던 관제소의 스크린이 꺼지고, 초음속으로 질주하다 추락하는 전투기의 포물선이 카메라에 붙잡힌다. 매버릭을 연기한 배우가 톰 크루즈가 아니었다면 즉각적으로 조종사의 죽음을 예감할 만한 장면이다. 가늠할 수 없는 속도로 비행하면서도 극도의 긴박감을 제공하는 대신 창밖을 바라보는 매버릭의 표정과 덧입혀진 서정적 음악이 화면을 불안하게 감싼다. 물론 매버릭은 살아남는다. 하지만 영화는 그가 조종석에서 탈출하는 구체적인 과정을 숨긴다. 전투기에 부착된 비상 낙하산으로 탈출했다고 말하면 쉽지만, 확신할 수 없다. 벌어진 사고를 둘러싸고 있는 탈출 가능성과 현실적 고증을 따지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인물과 기계가 구사하는 동작과 그것이 전달하는 아날로그적 감각을 중요하게 다루는 이 영화에서 매버릭의 탈출 경과를 생략한 데는 특기할 만한 부분이 있다.

기억으로의 회귀

머리카락이 조금 헝클어지고 옷매무새가 엉망이 되었을 뿐, 몸에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남은 매버릭은 인근 식당에 들어와 “여기가 어디인가요”라고 묻는다. 여기가 어디인지 추락한 매버릭은 알지 못한다. 긴박한 사고를 허무하게 마무리 짓는 이 장면을 실없는 유머로 받아들여도 무방하지만, 조금 다른 인상을 선사하기도 한다. 매버릭은 공중에서 추락했으며, 위치를 알 수 없는 외딴곳에 불시착했다. 마치 낯선 외계의 침입자를 마주한 것처럼 어린아이는 그에게 이곳이 지구라고 답해준다. 지구에 불시착한 그는 폭발과 추락이라는 사태를 매개로 다른 세계에 진입한 것처럼 보인다.

추락은 필연적인 결과다. 매버릭은 프로그램이 설정한 목표에 도달하는 것 이상을 바라본다. 한계를 초과한 속도에 사로잡힌 그를 멈출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기계가 오류를 일으키고 작동을 멈추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추락사고를 통과하자마자 매버릭의 주변으로 모든 것들이 되돌아온다. 그는 전투기 조종사 학교로 돌아갈 기회를 얻고, 그곳에서 오랜 친구인 아이스맨과 옛 연인 페니 벤자민을 만나게 되며, 구스의 아들 루스터와 마주한다.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라 할 만한 페니의 술집에서의 시퀀스는 정합적인 현실이라기보다는 매버릭이 떠올리는 여러 기억이 응축된 수정 이미지(Crystal-image)라고 일컬을 만하다. 아이스맨과 문자를 나누고, 페니와 재회하고, 루스터를 맞닥뜨리는 상황이 같은 공간에서 연쇄적으로 이뤄지면서 과거가 일거에 쏟아진다. 이는 무엇보다 전편인 <탑건>으로의 귀환을 가능하게 한다. 매버릭의 사적인 기억 저편으로 되돌아가면서 또한 관객이 공유하는 공통의 기억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서사를 추동하는 도입부의 사고에 대한 한 가지 가설은 이것이다. 매버릭은 그 거대한 폭발에 휘말려 죽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적어도 추락하는 전투기에서 아직 탈출하지 못한 건지도 모른다. 영화는 전투기에서 탈출하는 매버릭을 보여주지 않았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는 초음속의 속도로 비행하던 전투기 폭발에 휘말린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말끔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비현실적으로 말끔한 모습이 문자 그대로 비현실이라면 어떨까? 매버릭이 전투기가 폭발하는 순간에 죽음에 이르렀다면 그가 추구하던 신념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고, 파일럿으로서의 열망은 무산될 것이며, 막무가내로 비행을 감행한 대가로 명예로운 장례 절차도 주어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탑건: 매버릭>이 전개하는 서사는 폭발사고 이후로 매버릭에게 가해질 수도 있는 바로 이 징벌을 복구하는 절차이다. 매버릭은 전투기의 폭발과 더불어 손상된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가상의 장소를 마련한다. 기억 속의 친구가 그를 소환하고 과거의 연인이 머물러 있는, 그리하여 그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보상하는 장소가 스크린에 펼쳐진다. 그 가상의 장소에서 오래된 ‘미국영화’의 신호들이 되살아난다. 집단적 춤과 노래, 군인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제의, 연인과의 재결합, 아버지와 아들의 화해, 불가능해 보이는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위대한 전쟁영웅을 환대하는 한 편의 ‘미국영화’가 제공되는 것이다.

군대와 영화

미국영화를 둘러싼 몇 가지 전형적인 진술이 있다. 한편으로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오락영화일 뿐이라는 (그 영화에 찬사를 보낼 때조차 작동하는) 냉소적 판단이 주를 이루고, 그 반대지점에 영화에 숨겨진 정치적 관점을 발견하고 평가하려는 판단이 있다. 너무 많은 미국영화가 단순한 오락영화로 치부되며 축소되거나, 범용한 의미에서의 정치적 영화로 뭉뚱그려진다. 트럼프 시대의 미국영화는 손쉽게 받아들여지지만, 시진핑 시대의 중국영화, 푸틴 시대의 러시아 영화는 좀처럼 담론화되지 않는다. 다른 한편, 미국영화는 역사와 시대의 반영적 기록으로 거론되며, 때로는 지극히 모호한 용법으로서의 ‘영화적인 것’의 정수를 수호하는 보루가 되기도 한다. 아시아 영화나 유럽 영화를 말할 때는 특별히 거론되지 않는 수사적 표현들이 미국영화를 가리킬 땐 거리낌 없이 나타나곤 한다. 미국영화가 역사와 문화와 공동체의 역량을 끌어안고 그 모든 것에 속하면서 그중 어떤 하나로만 환원되지 않는 교묘한 복합체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간단할 테지만, 이는 무엇도 구체적으로 해명하지 않는다.

<탑건: 매버릭>에 관한 관객과 평자들의 깊은 환대에도 그런 전형적 진술들이 뒤섞여 있다. 톰 크루즈라는 대체 불가능한 슈퍼스타, CGI를 최소화하고 아날로그적 장면을 고집하는 영화의 매혹,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과거의 향수와 접속하는 시리즈의 성취, 탁월한 기술적 완성도로 구현된 전투 시퀀스에 대한 감탄과 찬사가 늘어서 있다. 이런 반응들은 그 자체로도 미심쩍은 구석이 존재하지만, 또한 한 가지 명백한 이미지를 회피한다. 상술한 요소들과 더불어 이 영화의 표면에 되돌아온 군대와 무기의 이미지들을 말이다. <탑건: 매버릭>은 매력적인 블록버스터 오락영화이면서 동시에 한동안 박스오피스에서 자취를 감췄던 전쟁영화이자 군대영화다. 미사일을 피하는 전투기의 화려한 움직임과 불꽃놀이 같은 폭발의 형상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영화의 한 장면에서 문득 블록버스터가 원래 세계 2차 대전에 영국 공군이 사용한 초대형 폭탄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변모하는 전쟁의 테크놀로지는 영화가 생산하는 이미지와 불가피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미지의 역사는 전쟁과 군사적 지각의 시간과 겹쳐서 있다. 카메라와 무기는 대상을 포착하고 정해진 시야에 붙잡는 사물들이다. 우연의 산물이라 하더라도 팬데믹 이후에 유효한 산업적 성공을 거둔 첫 번째 전쟁영화가 <탑건> 시리즈의 속편, 즉 전투기 조종사들의 시점을 담고 있다는 것은 주의 깊게 고려할 만하다. 매버릭에게 주어진 임무는 산악 지대에 설치된 지하 우라늄 농축 시설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시설을 구축한 세력의 지리적 정치적 조건은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는 상의를 벗고 럭비를 즐기는 한여름의 해변에서 눈으로 뒤덮인 설원의 무대로 순식간에 이동하는 초연결적 전환의 스펙터클을 제공할 뿐이다. 전편이 그랬듯이 군대라는 체제와 인간, 그리고 그들이 운용하는 전투기가 맺는 단단한 결속을 공동체의 가치로 미화하는 동안 그들이 상대해야 할 적들의 이미지는 구체적으로 표상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군대는 외부의 어떠한 이해관계와도 차단되어 있다. 매버릭을 포함한 군인들은 얼굴 없는 적들, 실현되지 않은 위협에 대항한다. 그들이 벌이는 맹목적인 전투는 외부 세계를 전제해두지 않는다. 모든 것은 파일럿들의 시선 내부로 수렴한다.

<탑건: 매버릭>은 조종사의 시선과 시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 자리에서 관측되는 것은 공중에서 실시간으로 바깥과 아래를 바라보는 ‘플라이 비전’이다. 영화는 전투기가 점유하는 위치와 속도를 긴장감 있는 액션 시퀀스로 강조한다. 이 속도와 높이는 필연적으로 외부의 소멸을 동반한다. 파일럿들의 시선에 지면의 대상들은 결부되지 않는다. 그들의 시선과 접속하는 사물이 있다면, 지대공 미사일과 적군의 또 다른 전투기가 전부이다. 사물은 추상적인 표적으로 전환되고 무전과 전투로 연결되는 파일럿 외에 창밖에 있는 대상은 개별적인 존재로 인식되지 않는다.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전투기 내부에서 바깥은 평면으로 다듬어진 이미지의 한 단면으로 수용된다.

추락하는 자의 망상

의미심장하게도 <탑건: 매버릭>에 추락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은 없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히 영화의 첫 시퀀스에서 초음속의 속도로 질주하던 전투기가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음에도, 매버릭은 전투기 조종에 대한 확신을 품고 변하지 않는 교훈을 전달한다. 가속을 멈추지 않다가 추락사고를 일으킨 도입부의 매버릭과 끊임없이 한계를 넘어설 것을 주문하는 매버릭 사이에는 모종의 단절이 있다. 도입부를 제외한 영화의 나머지 전체를 점유하는 매버릭은 너무나 빠르게 도입부의 경험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전편과 속편을 관통하며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생각하지 말라”는 경구가 말해주듯이 매버릭은 실패의 기록을 말끔히 생각에서 지워버린 듯이 보인다.

그 결과로 <탑건: 매버릭>에는 모든 임무를 극복해내는 명랑함이 화면에 지배적으로 감돈다. 한계를 초과하고 역경을 넘어서는 주인공의 궤적은 톰 크루즈라는 스타 페르소나의 필모그래피 전반에 새겨진 원형적인 기록이기도 하다. 과거의 실수와 오해, 죽음의 위기마저도 순식간에 극복된다. 그것은 타인의 얼굴, 구체적 대상, 시각적 딜레마를 배제한 전투기의 시선과 속도로부터 기인한다. 전편의 구조를 고스란히 빌려온 이 속편은 그래서 구체적 현실을 그려낸 결과라기보다는 매버릭의 기억과 뇌 속에서 재구성되는 시뮬레이션에 가깝다. 그곳에서 36년 전의 승리담이 한층 더 매끄럽고 은밀한 형태로 재생되고 있다. 수많은 무기와 전투가 전면에 묘사되고 있지만, <탑건: 매버릭>에는 상처도 혈흔도 고통도 심지어는 격추되는 자의 신체도 관측되지 않는다. 전투기 바깥에 있는 자들은 피부를 가진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표적에 미사일과 플레어를 겨누는 이들은 모든 심리적 혼란으로부터 안전하다. 그리고 그것은 전투기에 몸을 실은 조종사의 시선을 구축하는 데서 완결된다. 전투기에 탑승한 자는 압도적인 속도와 높이를 획득한다. 그들의 시선은 시야에 포착되는 것들을 조망한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속도와 고도의 높이 속에서 외부는 실존하는 물리적 세계가 아니라 전투기가 통과하고 넘어서야 할 지형적 조건으로 탈바꿈한다. 매버릭은 한 치의 의심과 망설임 없이 그 지형을 2분 15초 안에 저공비행으로 통과하고, 그가 운행하는 전투기의 기록은 실시간 시뮬레이션 이미지로 다른 이들에게 전달된다.

<탑건: 매버릭>은 추락하는 자의 망상이다. 매버릭은 여전히 폭발한 전투기에서 추락하고 있다. 그는 초음속의 속도를 넘겨 한계를 초과하는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믿음을 간직한 채로 소멸에 다다르고 있다. 전투기 파일럿들은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제독의 말에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오늘은 아닙니다”라고 받아치는 매버릭의 대답은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는 매버릭의 믿음과 신념이 파산하는 순간을 끝없이 유예하는 지연의 언어이기도 하다. 그의 대체적 망상 속에서 한 편의 유려한 액션영화가 상영된다. 그것은 매버릭의 죽음을 지연시키기 위해 소요되는 기나긴 주마등의 시간이다. 그 시간 속에서 도입부의 추락하는 전투기에 대항해 마침내 임무를 완수하고 고공으로 떠오르는 매버릭의 카운터 이미지가 펼쳐진다.

두 명의 매버릭이 있다. 독단적인 판단과 이해할 수 없는 선택으로 전투기 폭발사고를 일으킨 도입부의 매버릭, 그리고 독단적인 판단과 이해할 수 없는 선택으로 작전을 성공시키고 모든 동료를 구해내는 나머지 부분의 매버릭. 같은 의미에서 <탑건: 매버릭>에는 상이한 속성을 지니는 두 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폭발과 추락, 죽음의 위협에 노출되어 언제든지 스크린이 꺼질 수 있는 불안정한 영화, 그리고 죽음의 위협이 제거되어 그 어떤 폭발과 추락에도 스크린에 되돌아오는 자들의 영화. 미국영화는 공동체의 파괴된 정체성을 회복하고 집단적 승리를 제공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탑건: 매버릭>은 추락과 폭발이라는 매개를 통해 시리즈가 형성된 기원의 장소로 되돌아가 손상된 모습으로 남겨진 과거를 낙관적인 형태로 재건한다. 전편에서 바다 한가운데서 죽은 구스가 끝내 그의 아들 루스터로 대체되어 매버릭의 뒷자리에 되돌아오는 것처럼 말이다.

코로나 팬데믹이 국가 공동체의 불가능성과 거미줄처럼 촘촘히 연결된 세계 사회의 파산 가능성을 환기하는 분기점이라면, <탑건: 매버릭>은 세계가 이룩한 초연결적 사회의 허약함과 모순이 폭로된 시기에 스크린에 도착한 군대영화다. 지상의 모든 구역을 정찰하고 잠재적 위험 시설을 간파하는 광학적 체계를 전제하는 이 영화는 전쟁과 군대를 내부에 끌어들이면서도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군다. 그럼으로써 이 영화는 세계의 이미지가 말소되고 대규모 살상 무기와 군대의 표상만이 남겨진 도착적 전쟁영화로 거듭난다. 전쟁영화는 이미지를 파괴하면서 또 다른 이미지를 생산한다. 외부의 표상을 제거하고 전투기 액션을 맹목적인 전쟁의 한 부분으로 전환하면서 <탑건: 매버릭>에는 매혹적인 전투의 스펙터클과 그 스펙터클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죽음의 위협마저 제거하려는 도착적인 열망이 공존하게 된다. 이것은 이미지의 죽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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