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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송환', 그럼에도 그들은 꿈으로 살아간다
소은성 2022-10-12

하나의 가정을 해보고 싶다. 영화 <2차 송환>이 아닌, 감독 김동원의 손이 아직 닿지 않은 촬영본, 김영식 선생을 비롯한 미송환 장기수 선생들의 모습이 맥락을 알 수 없는 단편적인 이미지들로 주어진다면, 우리는 거기에서 무엇을 보게 될까.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오랜 시간 타국을 전전해야 했던 칠레 극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은 자신의 망명기를 기술한 책을, 다음과 같은 아이스킬로스의 문장을 제사로 인용하며 시작한다. “망명한 자들은 꿈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꿈은 자신의 존재가 당위를 갖는 시간과 공간을 잃어버린 자의 것이므로, 상실한 자의 꿈은 지금과는 다른 언젠가, 그리고 이곳과는 다른 어딘가를 향하기 마련이다. 강압에 의한 것이든 본인의 의지가 개입되었든, 고향을, 가족을, 이념과 자신이 갖고자 소망했던 삶의 형태까지도 상실해버린 미송환 장기수 선생들의 삶 역시 망명자의 꿈꾸기와 다를 바 없을 듯하다. 지금-여기의 세계는 그들이 꿈꿨던 (그리고 여전히, 가능한 만큼 계속해서 꿈꿀) 세계가 결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선 가정에 속하는 이미지들, 정확히 말해 <2차 송환>의 제작이 완료되지 않았더라면 장기수 선생들과 마찬가지로 제자리를 찾지 못했을 그들의 말과 얼굴들 앞에서, 어쩌면 우리는 길을 잃고 말지도 모른다. 어느 한순간의 표면만을 허락하는 사진적 이미지로서의 대상으로부터 그것에 잠재해 있는 꿈의 형태를 발견하고자 시도하려는 희망의 태도는 누구나 손쉽게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감독이 위치한 자리

현실의 적극적인 개입이라는 한 가지 요소만 부각시키며, (이 요소에 대해서는 픽션으로서의 극영화마저 자유로울 수 없음에도) 다큐멘터리를 하나의 스타일로 이해하게 될 때 놓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감독이 위치한 자리다. 이를테면 김동원 감독의 대표작 두편, <상계동 올림픽>(1988)과 <송환>(2003)을 모두 ‘다큐멘터리적’이라고 수식할 수는 있겠지만, 감독의 위치에 의해 두 영화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작품들이 되었다. <상계동 올림픽>은 현재 진행형인 이슈와 그것의 현장성을 중심으로 영화의 요소들이 배열된다. 감독은 철저히 현장에 들어간 카메라 뒤에 위치하고, 특히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그리고 감독의 목소리를 대신한)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카메라가 포착한 폭력과 저항의 이미지들을 조직한다. 즉 공적인 발화를 중심에 놓기 위해 감독은 그 바깥에 자리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김동원 감독이 3년여의 시간을 상계동 철거민들과 함께 생활했다는 등의 외적인 사실을 참고하는 이외에, 영화 안에서 그에 대해 알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송환>의 경우, 분명히 비전향 장기수 선생들의 이야기를 좇고 있음에도, 영화에서 거의 자기 반영적인 의지가 느껴진다고 말하고 싶어질 만큼, 때때로 이 작품이 만들어진 과정 자체를 드러내는 감독 본인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영화의 중요한 한축이 된다. 여기에서 내레이션은 감독이 영화의 사건들이 이루어지는 현장, 그리고 카메라의 뒤편에 자리했음을 말해준다(하지만 그가 언제나 촬영 현장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이때 쓰인 감독의 목소리 또한 10년여에 걸쳐 수집된 촬영본, 사진적 이미지의 공간에서 제시되는 장기수 선생들의 삶과 상호작용하는 또 다른 공간을 영화 안에 설정한다. 그렇게 해서 선생들의 삶을 해설하거나 주석을 달고 논평하는 것이 아닌, 그들과 함께 지나온 시간을 회고에 가까운 어조로 증언하는 감독의 목소리는, 다시 말해 영화 전면에 드러나는 김동원이라는 한 인물의 개성은 비전향 장기수 선생들을 함께 지켜보는 관객의 시선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2차 송환>은 그 후속편으로서 유사한 전략을 취한다. <송환>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북한으로의 송환의 전망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어두워진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고문과 강압에 의한 전향은 무효라고 선언하며 미송환 장기수들의 2차 송환 운동이 시작되었던 2001년부터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김영식 선생의 1인 시위 장면을 촬영했던 지난해까지, 지난 20여년간 이어진 기다림과 실패의 시간을 감독 김동원은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을 통해 전달한다. 정말이지 모든 것이 실패했다. 2차 송환에 대한 논의는 보수 정권과 진보적이라 평가받는 정권 시기를 가리지 않고 모두 제자리걸음이었고, 그러는 사이 영화의 첫 기획에 참여했던 감독이 중도에 그만두었으며 촬영 자체가 중단되기도 했다. 뒤늦게 발견한 감독 본인의 가족사, 특히 전쟁 때 월남한 어머니가 고향 강계에 두고 온 딸이 있다는 사실까지도 감독에게 북한을 방문해야만 한다는 동기를 부여하지만, 그래서 북한 촬영을 위해 여러 시도를 해보았지만 전부 실패하고 말았다. 시간은 노령인 장기수 선생들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들 중 많은 이가 세상을 떠났다. <2차 송환>에서 보게 되는 이 모든 일들을 실패라고 부르지 않을 방법은 없어 보인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지만 멈출 순 없는

하지만 그럼에도 이 글의 서두에서 밝힌 희망의 태도, 20여년이 흐르는 동안에도 김영식 선생을 비롯한 미송환 장기수 선생들로부터 “꺾이지 않는 꿈”을 보려고 시도했던 김동원 감독 개인의 태도가 이 영화를 다른 차원으로 비약시킨다고 믿는다. 그 비약은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 일어난다. 휑하고 쓸쓸했던 송환 20주년 기념식에 대해 이야기하던 감독이 갑작스럽게 희망과 그것의 당위를 말하기 시작할 때다(“그 희망은 실현될 것이다. 아니, 실현될 수밖에 없다.”). 마치 이러한 비약만이 희망의 논리라는 듯한 감독의 목소리 앞에서, 2차 송환의 실패를 포함하여 영화를 가로막았던 온갖 불가능성은 오히려 희망의 조건으로 보인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이 그것을 보여준다. 피켓을 들고 1인 시위에 나서는 김영식 선생을 보여주면서 감독은 변하지 않을 현실과 자신의 영화를 희망적으로 끝낼 수 없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마지막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는 김영식 선생의 모습과 함께 감독 김동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지만 멈출 순 없다.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간 이루어질 그 희망을 노래한다.”

지난 세기에 벌어진 전쟁과 이념의 폭력을 여전히 견뎌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20세기는 분명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2차 송환>에서 보여준 ‘희망’ 또한 그것이 20세기의 유산임을 알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스페인 내전을 다룬 앙드레 말로의 <희망>을 읽으면서, 사실 소설 전체의 맥락과 상관없는 하나의 문장으로부터 희망에 대한 어떤 이미지를 떠올렸다. 물론 그것은 이 영화의 영향이다. 그 문장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짓고 싶다.

“그 얘긴 그만둡시다. 그래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관심을 두어야겠죠. 요행수가 없으면, 난 야간 폭격을 하거나 구름을 이용합니다. 다행히 곧 가을이….” 그는 눈을 쳐들었다. 밤은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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