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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은은한 꽃향기를 타고 : 대만 퀴어 로맨스 ‘처음 꽃향기를 만난 순간’
이자연 2023-01-03

여성간의 사랑을 말하는 GL(Girl’s Love)은 ‘백합물’이라 불리기도 한다. 명칭에 대한 다양한 유래와 정의가 전해 내려오고 있지만 그중 가장 눈여겨볼 점은 많은 물성 중 왜 ‘백합’이라는 꽃을 선택했느냐다. 불투명한 시점부터 상대방에게 시나브로 빠져버려서는, 나 자신부터 상대방까지 부정하고 의심하다가 결국 인정에 다다르는 GL의 기본 스토리 구조를 생각하면 은은하게 몸에 배는 꽃향기를 장르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메타포로 이해할 수 있다. 학창 시절 배구부 선후배 사이였던 이밍(임진희)과 팅팅(정여희)은 우연한 재회를 빌미로 15년 전 감춰두었던 비밀을 다시 꺼내든다. 그 비밀에는 어떤 꽃향기가 배어 있을까. <처음 꽃향기를 만난 순간>이 만든 조각들을 그러모았다.

지인의 결혼식을 방문한 이밍(임진희)은 같은 식장에서 레즈비언 결혼식을 우연히 보게 된다. 2019년 아시아 최초로 대만이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이후, 여전히 흔하진 않지만 종종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번째 우연. 15년 동안 연락이 끊겼던 팅팅(정여희)을 그곳에서 마주친다. 오랫동안 묻어둔 기억은 어색한 안부 인사와 망설이는 질문으로 생명력을 얻고, 둘이 처음 만난 고등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 꽃향기를 만난 순간>은 러닝타임 내내 이밍의 관점으로 진행된다. 지루한 나머지 고역처럼 느껴지는 삶 속에서 갑작스레 팅팅을 만나고, 먼지 쌓인 사진첩을 들여다보듯 옛 기억을 되짚는 것부터 흔들리는 감정을 감내하기까지, 관객은 이밍이 제공하고 제한하는 시야 안에서 영화를 수용해야 한다.

잔잔한 연못에 던져진 돌멩이 하나

같은 고등학교의 2년 차이 선후배로 만난 이밍과 팅팅은 배구팀의 일원으로 함께한다. 배구 경기에서 관중의 관심을 받으며 활약을 펼친 이밍을 보고 반해버린 팅팅이 그대로 동아리 가입 신청을 내지른 덕이다. 훈련이 끝난 뒤 하굣길을 함께하던 둘은 어느새 하루 전체를 서로에게 내어주며 더 많은 것을 공유하기 시작한다. 좋아하는 것을 묻고 나누고, 어려운 숙제를 함께 풀다가 엄마의 옷장 속 어른 옷을 입어보고, 상대의 몸을 궁금해하고, 먼 미래를 상상하면서 지극히 평범한 사랑의 단면을 완성해간다.

학창 시절에나 성인이 되어서나 이밍은 팅팅의 등장에 흔들린다. 혼란스러운 감정을 부정하고 외면하려 애써도 결국 팅팅으로 향하고 마는 자신의 화살표를 감추지 못한다. 고기능 자폐를 가진 아들을 키우며 주말에만 집에 오는 남편을 내조하는 이밍은 사실 아주 오래전 그와 함께 유학을 떠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가 유학 시험에 떨어지면서 재수를 하게 되었고, 1년의 공백 기간 동안 둘은 결혼식을 먼저 올렸다가 계획에 없던 임신을 하게 된다. 현재 이밍은 일을 하며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으로서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순간마다 선택권은 남편 손에 있었다. 유학 여부를 결정한 것도, 홀로 아이를 키워야 하는 것도 오롯이 남편의 사정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이다. 남편이 직접적으로 이밍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거나 강요하진 않았지만, 이밍은 남편에 의해 막대한 영향을 받았고 그가 처한 현실은 과거 자신이 계획했던 것과 너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심지어 이밍은 수험생 시절 의대를 지망하던 영리한 학생이었지만 그 꿈은 흐지부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런 이밍에게 팅팅은 자꾸만 돌을 던진다. 잔잔한 연못에 둥근 파동을 만드는 작은 돌멩이 하나. 그게 팅팅이다. “다른 사람의 몸을 만져본 적 있어?” “어른이 되면 어떤 집에 살고 싶어?” “왜 꼭 결혼해야 집이 생긴다고 생각해?” “난 네가 좋아. 근데 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팅팅은 이밍이 여태 생각해본 적 없는 질문을 건네면서 자신이 마음 한편에 가둬두고 잠가버린 주체성과 나다움을 직면하게끔 만든다. 그래서일까. 이밍은 팅팅을 사랑하는 마음과 별개로 그로부터 자꾸 벗어나려 한다. 어쩌면 그 질문들이 자꾸만 자기가 용기 없는 사람이란 것을 인정하라는 재촉으로 들렸을지 모르겠다. 학창 시절에나 성인이 되어서나 이밍이 팅팅에게 흔들렸던 이유는 그가 자기 확신을 제 손에 쥐고 있는 굳건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팅팅은 이밍이 갖지 못한 퍼즐 조각이다.

그런 팅팅이 또 이밍에게 말한다. “널 이 집에 너무 가두지 마.” 무슨 뜻일까. “집 밖에 있는 너, 엄마나 아내가 아닌 네가 좋아하는 것을 생각해봐.” 영화에서 어린 시절 이밍을 유일하게 기억하고 간직한 팅팅만이 전할 수 있는 조언이자 부탁이고, 호소이자 사랑이었다. 팅팅은 이밍의 세계를 자꾸만 깨트리며, 또 이밍은 팅팅의 침입을 조금씩 받아들이며 서로의 세계를 융합시킨다.

온전하게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것

“집에 높은 의자는 어디 있어?”

이밍의 집을 처음 방문한 팅팅이 건넨 말이다. 15년 전, 영화관 창가에 있는 하이 스툴을 미래의 집에 들여놓을 거라던 이밍의 말을 기억해낸 것이다. 영화는 이밍의 관점을 중심에 두고 팅팅과의 과거-현재를 교차하는 방식으로 로맨스를 그려낼 뿐만 아니라, 이밍의 남편과 팅팅의 태도 차이를 드러내며 기존 헤테로 부부에 만연한 남성 중심적 가족 문화를 짚어낸다.

남편은 이밍이 요가원에 다닌다는 사실은 반복해 잊으면서도 냉장고에 아이가 먹을 음식이 없다는 타박은 잊지 않는다. 레시피를 알려주고 가겠다는 이밍의 말에 샐쭉한 얼굴로 “내가?”라고 반문하고, 결국 이밍은 아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점 책자를 넘기며 배달시켜 먹으라고 한다. 15년 전 지나가는 말로 하이 스툴을 언급한 이밍의 말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팅팅과 비교되는 지점이다. 게다가 가족을 방치하고 나온 듯한 죄책감에 이밍의 표정이 좋지 않자, 팅팅은 그 심리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기분 안 내키면 가지 말까?” 하고 묻는다. 자신의 감정이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 스스로 인지할 수 있도록, 진짜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팅팅은 그 선택권을 이밍에게 쥐어준다.

<처음 꽃향기를 만난 순간>은 두 여성의 사랑을 남성 중심적인 관점으로 재현하지도, 완벽한 이미지로 지나치게 신격화하지도 않는다. 평범한 사람이면 누구나 겪어봤을 법한 갈등과 머뭇거림, 죄책감과 애석함, 후회와 용서를 그리며 두 여성이 수평적이고 안전하게 사랑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과정이나 서로의 사랑을 확신하는 과정에서 타인을 희생양 삼지 않는다는 점도 눈에 띈다. 온전히 둘로 존재하게 하는 것. <처음 꽃향기를 만난 순간>에서 가능한 일이다.

*이어지는 기사에 GL 콘텐츠의 현 위치와 <처음 꽃향기를 만난 순간> 정여희 배우의 인터뷰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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