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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다음 소희’ 배두나, “대신 들여다보는 눈”
김소미 사진 백종헌 2023-02-02

밤하늘에 천칭자리를 남긴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이아는 한손에 칼, 다른 한손에 천칭을 든 채 눈가리개를 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추위와 배고픔에 반목하기 시작한 인간 세계를 버리고 신들이 지상을 떠날 때에 그는 마지막까지 최후의 중재자이기를 자처했다. 정주리 감독의 <도희야>(2014)를 필두로 언젠가부터 스크린이 배우 배두나에게 투영하는 신화도 이와 비슷하다. <플란다스의 개>(2000)의 관리사무소 경리 현남과 <고양이를 부탁해>(2001)의 보헤미안 태희는 배두나의 세련된 감수성과 키치한 매력을 극대화한 대신 그들의 막막한 미래에 약간의 염려도 불렀었다. 20년 후 배두나는 그 여자들이 무사히 살아 돌아와 자신보다 어린 아이들에게 말 거는 풍경을 보여준다. 형사나 경찰의 자리를 빌린 <브로커>와 <다음 소희>에서 그는 부지런히 한국영화의 목격자가 되어가고 있다.

콜센터 실습 중 자살한 특성화고 재학생의 실제 사건을 모티프 삼은 <다음 소희>는 소희(김시은)가 죽기까지의 일들을 그린 1부와 그 이후의 일들을 고발하는 2부로 나눌 수 있다. 배두나는 여기서 댄스 학원을 매개로 언젠가 스치듯 만났던 10대 소희의 죽음을 파헤치면서 뒤늦게 대신 분노하고, 기억하며, 함께 울어주는 형사 유진을 연기했다. 유진은 소희의 주변인 혹은 우리가 소희에게 진작 건네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던 것들의 총화이다. 나는 소희의 죽음 직후 배두나가 등장하는 첫 장면에서 소희처럼 지친 기색이 역력한 표정과 걸음걸이, 비슷한 옷차림으로 걸어오는 이 배우가 되살아난 소희처럼 보였다. ‘다음 소희’는 통상 소희 같은 피해자가 될 수도 있는 또 다른 아이들을 가리키는 제목이면서, 소희가 죽지 않았더라면 언젠가 될 수도 있었던 쓸쓸한 가능성 속에 유진이란 인물을 놓아두려는 시도이기도 할 것이다.

지난해 <브로커>와 <다음 소희>가 칸과 부산을 부지런히 오가는 사이 할리우드에서 신작 촬영에 매진 중인 배두나를 만날 수 없어 아쉬웠다. 새해 설 합본호 지면을 위해 한달음에 달려온 그와의 만남을 기쁘게 전한다. 그동안 번번이 <다음 소희>를 극장에서 볼 기회를 놓쳐 곧 있을 언론배급 시사회만 기다린다는 배두나는 유진과 소희가 닮아 있더란 전언에 갸웃거리다 금세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 오랫동안 쉬다가 일선에 복귀한 형사 유진을 연기했다. 윗선에선 자살로 종결될 것으로 보이는 쉬운 사건으로 몸을 풀라고 준 것인데, 유진은 보이지 않는 인력에라도 끌리는 것처럼 소희의 죽음을 파고든다.

=정주리 감독님은 별다른 설명 없이 한 가지만 지시했다. 그동안 내가 연기했던 모든 인물 중 가장 어두웠으면 한다고. 아픈 어머니의 병간호를 10년 정도 오래 한 여자라는 것, 그리고 복귀한 지 얼마 안된 형사라는 사실만 가지고서 인물에 관한 나만의 소설을 써보는 시간이 있었다. 비교하자면 A4 용지에 그 사람의 인생에 대해 빽빽이 써주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과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작업 속에 놓였던 거다. 콜센터에서 소희의 빈자리를 본 순간부터 유진이 점점 더 그 아이의 삶에 몰두하게 되는 점에 주목했다. 그 자신도 분명 어릴 때 ‘소희’인 적이 있지 않았을까, 지난 세월 속에서 이미 무언가 한번 겪지 않았나 하는 막연한 추측과 함께.

- <다음 소희>에서 유진은 오직 소희의 죽음에 대해서만 말하는 존재다. 뒤늦게 도착한 목격자이자 대리자의 역할에 내내 충실하다.

=그 심플함이 좋았다. <다음 소희>는 내 얘기를 하는 영화가 아니라 주어진 임무가 중요한 작품이었다. 소희를 향한 우리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다. 유진의 집이 이를 잘 말해준다. 어두운 방에 책상과 스탠드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집. <도희야>의 영남도 그랬다. 유진과는 많이 다른 인물이긴 하지만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같다는 점에서 둘은 비슷하다.

- 자기 캐릭터의 독보적 매력이나 분량에 좌우되기보다는 작품의 큰 그림을 보고 출연작을 택한다는 인상이 배두나 필모그래피의 결정적 미덕이다. <다음 소희>는 어떤 점에서 함께하기로 결심했나.

=주제 면에서 개인적인 관심사와 잘 맞았다. 정주리 감독님과는 성향이 정말로 비슷한 데가 있다고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이전에 작품을 같이했다고 해서 그 인연만으로 의리를 지키는 성격은 못 된다. 이번에도 감독님의 글을 읽고 동요했다. 특히 근 5년 사이 10대 청소년들, 혹은 그보다 더 어린 세대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됐다. 생각해보면 학창 시절에 내 마음이 순탄치 못했거든. 요즘 학교 분위기가 정확히 어떤지 잘 안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내가 경험한 그 시절은 성적 지상주의와 체벌이 당연시되는 분위기였다. 어디에도 기댈 수 없고 막막하게 계속 몰아붙여지는 느낌이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러다보니 10대들이 겪는 괴로움에 민감하다. 뉴스를 보고 자주 분노하면서도 티를 안 내고 있다가, 영화로 소리낼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반드시 하려고 한다. 인간 배두나가, 배우 배두나가 연기할 캐릭터의 목소리를 가려선 안된다고 생각하는 주의라 영화로 말할 뿐, 나는 액티비스트는 될 수 없는 사람이다.

- 작중 유진도 타고난 운동가는 아니다. 다만 그는 소희에 대해서 맹렬히 기억하려고 한다.

=<다음 소희>가 전하는 비극에는 사회적 인식과 구조적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 크지만 배우인 내가 어쩔 수 없이 가장 마음을 쓰는 건 인간의 상태더라. 오래 생각했다. 한 인간이 죽을 만큼 괴로운데 그것에 대해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다른 인간이 옆에 없다는 사실에 관해서. 사실은 그게 제일 마음 아팠다. 우리가 앞으로 내달리느라 바쁜 나머지 옆에서 숨을 헐떡이며 쓰러져가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고 있는 건 아닌지 고쳐 묻고 싶었다. <다음 소희>를 꼭 하고 싶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기사에 <다음 소희> 배두나 배우와의 인터뷰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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