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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상언 영화사 연구자, 도서수집가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이에서”
김소미 사진 오계옥 2023-04-07

- 어떻게 영화사 연구자의 길을 걷게 되었나.

= 대학을 연극영화과로 택해 공부하는 과정에서 영화사에 깊이 빠져들었다.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영화만 볼 수 있는 시대에서 명성 높은 과거의 영화들을 여러 경로로 접할 수 있는 저장된 영상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1960~70년대 영화에 빠져든 게 아닌가 싶다.

- 본격적으로 수집을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 북한영화를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북한 자료들을 수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영화산업, 당대의 영화 담론이 가장 생생하게 담겨 있는 것이 영화 잡지이기에 잡지도 사료로서 수집했다. 가장 아끼는 자료는 일제강점기의 영화소설(시나리오)들이다. 희귀할뿐더러 그 의미와 가치가 특별하다.

- 책방 노마만리를 열어 수집품을 전시하기 시작한 것은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하고자 함이었나.

= 수집하는 사람들의 궁극의 꿈은 자신의 컬렉션을 자랑하고 싶은 적절한 공간과 함께하는 일이 아닐까. 2018년까지 한양대학교 현대영화연구소에서 근무하다가 대학의 테두리에서 벗어나고 싶어 개인 연구자가 되면서 꿈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지금은 노마만리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 지식이 공유되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 처음엔 전주의 한옥을 알아보다가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여기에 들렀는데 곧바로 마정저수지 풍경에 빠져버렸다.

- 해방기 영화, 북한 영화인들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증발해버려 마치 신화나 환상처럼 남은 존재들을 들여다보고 싶다. 배우이자 노동운동가였던 주인규 같은 인물이 좋은 예가 될 것 같다. 그는 1920년대 함흥의 조선질소비료회사에 위장취업해 노조를 조직하고 파업을 선동하다가 해직당한 노동자지만 이미 그 이전에 <아리랑>에 출연한 유명 배우였다. 그런데 6·25전쟁 이후 그에 대한 기록이 싹 사라져버린다. 분단 이후 북한으로 가버려서 우리가 알 수 없는 사람들, 일제강점기에는 아주 유명했지만 어느 순간 사라진 사람들이 많다.

- 김종원 영화평론가의 이름을 딴 도서관을 만들고 애장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 김종원 영화평론가와의 인연은 2019년부터 그분을 지속적으로 인터뷰하면서 깊어졌다. 영화평론가이면서 영화사가이고 또 시인이었던, 1950~60년대 우리 문화계를 증명하는 인물이다. 그가 늘 영화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는 사실, 그 현장성이 큰 귀감이 됐다. 현재 김종원 영화평론가의 VHS가 비치되어 있는 전시실은 4월 초까지 정리해 지난해 별세한 영화 연구자 이길성 선생님의 서거 1주기를 기념하는 새로운 추모 공간으로 단장할 예정이다. 선생님이 직접 기증한 ‘이길성 문고’ 자료들만 1천점이 넘는다.

- 스트리밍 영화의 시대에 영화와 영화 자료들을 물리적 실체로 소유한다는 것, 당신에겐 어떤 의미인가.

= 나는 만져지지 않는 것들이 상품화되는 디지털 시대의 세례를 받은 동시에 과거의 아날로그적인 것들을 직접 만져본 전환기 세대다. 영화사를 연구하고 도서를 수집하는 사람이 된 지금, 보존의 필요성과 염려를 강하게 느낀다. 특히 요즘 생각하는 것은 온라인 웹 아카이빙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인터넷 사이트에 좋은 글들이 많은데, 만약 그 사이트가 다 없어진다면? 만져지지 않는 것들이 허무하게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그것을 기억해낼 수 있을까? 그런 고민들을 한다.

- 노마만리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 훗날엔 책방 전체가 큰 도서관이 되길 희망한다. 빼곡히 들어찬 희귀한 자료들을 찾고 연구하기 위해 해외에서도 찾아오는. 일단 내가 60대가 될 때까지, 앞으로 10년 정도 열심히 운영해볼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