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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물안에서'를 중심으로 본 촬영장, 리허설, 워크숍의 영화

<물안에서>

“영화를 촬영할 때는 언제나 기술적인 문제에 몰두한다.” - 필리프 가렐

<물안에서>의 성모(신석호)는 단편영화를 만들기 위해 촬영감독인 성국(하성국), 배우로 출연하는 후배 남희(김승윤)와 함께 여러 장소를 돌아다닌다. 만들려는 영화의 배우이자 연출자이기도 한 성모는 어느 골목에 남희를 세우고 몇 발짝 걸어보게 한다. 그는 남희가 골목을 걷는 모습을 보면서 “장소와 인물이 어울리는지” 관찰하고 이곳을 촬영장소로 결정한다. 다른 장면에서 세 사람은 이미 비슷한 골목 몇 개를 지나쳐 왔지만, 성모는 그곳이 아니라 이 골목을 선택한다. 아직 무엇을 찍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성모는 구체적인 지역에서 장소를 찾고 그 자리에 인물을 배치하는 것에서부터 장면을 구상한다. 영화의 윤곽을 떠올리기 위해 지역과 장소와 배우의 결합이 필요하다는 전제는 물론 홍상수의 변함 없는 원칙이다(“난 모델이 필요한 사람이다. 구체적인 지역, 장소, 배우…”).

홍상수의 영화에 영화감독과 배우가 나오는 것은 익숙한 구성이지만, 아마추어 연출자와 배우들의 제작과정을 빌려 촬영할 장소를 선택하고, 특정한 위치에 인물을 두고 움직이게 하는 절차를 일일이 보여주는 데는 특별한 면모가 있다. 굳이 분류해 말한다면, 홍상수의 최근작에는 초심자의 영화를 향한 환대가 있다. <당신얼굴 앞에서>의 이미 여러 편의 영화를 찍은 감독 재원(권해효)이 활동을 중단한 배우 상옥(이혜영)에게 제안하는 촬영 계획은 허무하게 무산되지만, <소설가의 영화>에서 소설가 준희(이혜영)가 처음으로 만드는 단편영화는 일정한 단계를 거쳐 완성되고 상영까지 마친다. <물안에서>의 성모 역시 처음 영화를 연출하면서 적잖은 어려움을 겪지만, 해변에서 쓰레기를 줍는 한 여성으로부터 영감을 얻고 옛 연인에게 선물한 노래를 영화에 사용해도 된다고 허락받으면서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게 된다. 준희와 성모는 장소를 구하고 배우를 고르는 낯선 조건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방식으로 영화를 결합해 만들어내는 ‘무지한 스승’이다.

성모는 선택한 촬영장소는 평범하고, 어디서나 볼 수 있으며, 이렇다 할 특징이 없어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게다가 거의 모든 장면에 초점이 맞지 않는 <물안에서>의 화면은 촬영할 위치로 결정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차이를 드러내지 않는다. 영화 속의 인물들이 보는 것을 관객의 눈은 지각하지 못한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장소를 발견하고 배우를 배치하는 연출자의 원칙이 실행되고 있다는 것뿐이다. <물안에서>는 시각이 희미해진 무대에서 산출되는 특수한 영화의 규범을 바라본다. 이는 지역과 장소와 배우를 결정하고, 그것을 다시 촬영 중인 영화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재구성의 장소

<드라이브 마이 카>

동시대 영화의 주요한 실천이 초심자나 아마추어들이 공모하는 제도 바깥의 영화 촬영장, 워크숍과 리허설이 이루어지는 임의적 공간, 일회적인 강연이나 무대 현장에서 발생하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니다. <해피 아워>의 균형 잡기 워크숍에서 <드라이브 마이 카>의 연극 무대에 이르기까지 일상적 현실과 무대 공간을 일관되게 결합하는 하마구치 류스케, 연극 무대를 올리기 위해 대본 연습에 몰두하는 배우들의 모습을 포착하는 마티아스 피녜이로의 작업들도 그러하다. 혹은 스와 노부히로의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는 노배우 장이 어린아이들과 놀이처럼 만드는 영화 제작 과정을 그린다. 미야케 쇼의 <와일드 투어>는 지역의 생태연구와 식물 수집을 위해 곳곳을 돌아다니는 워크숍 과정을 따라간다. 호세 루이스 게린의 <뮤즈의 아카데미>는 앞으로 펼쳐질 영상이 ‘영화’가 아니라 ‘교육’이라고 명명하는 낯선 오프닝으로 시작해 뮤즈와 시의 의미를 토론하는 대학교 강의실로 향한다. 그들의 작업은 최소한의 장비와 지극히 단순한 구성으로 실천되고 오랜 시간 제작 환경을 공유해 온 소수의 동료들과의 협업을 통해 만들어진다.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들은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통과하면서 소규모 공동체를 형성하는 일에 가까워진다.

언급한 일련의 영화들이 구축하는 초심자, 리허설, 워크숍의 영화에서는 픽션 안에 픽션이 생겨나고, 카메라 안에 카메라가 위치하며, 연기 안에 또 다른 연기가 발생한다. 영화 속에서 발견되는 모든 요소가 변화에 노출되고 변형의 가능성을 갖는다. 피녜이로의 <로잘린>과 <비올라>에서 인물들은 셰익스피어의 대본을 읽으면서 옷을 갈아입고, 악기를 연주하고, 나무에 오르고, 물속에 뛰어든다. 그들은 하나의 행동에 몰두하다가 산만하게 환경을 바꾸는 일을 반복하며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변형을 수용한다. 하마구치의 <우연과 상상>에서 여자 주인공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이어나가다 문득 숨겨둔 거짓말을 꺼낸다. 단편 <천국은 아직 멀어>에서 죽은 언니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여동생은 카메라로 남자를 촬영하던 중에 언니가 남자의 몸에 빙의되는 현상을 목격한다. 거짓말과 빙의는 우리가 인지하던 진실에 의심을 가하고 영화 이미지의 표면에 불투명한 가능성을 드리운다. 의심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대화가 설정한 약속이 굴절되고 상대방과의 관계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향한다. 하마구치의 영화는 눈앞의 상대방을 마주하면서, 카메라의 논리로 확증할 수 없는 거짓말과 빙의라는 또 다른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 겹쳐진 픽션과 카메라와 연기는 화면에 비치는 세계의 존재론적 위상을 재배치한다.

이런 실천을 두고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탐색하는 영화적 전통을 되새기며 존 카사베츠나 자크 리베트, 장 루슈의 영화에서 기원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지난 세기에 영화 매체의 정체성과 반영성을 탐구한 모던시네마의 유산과 온전히 포개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들의 현대적 성취는 ‘영화’라는 사물에 부여된 익숙한 규칙을 조정하고 그 규칙이 얼마나 연약하고 불안정한 토대에서 작동하던 것인지 되돌려준다는 데 있다. 영화 매체의 물질성과 작동원리를 반영하는 시도로 수렴되는 모던시네마의 방법론과 달리 이 영화들은 영화 바깥에 있는 규칙을 화면 내부에 이식하고 상호교환함으로써 영화의 물질성을 내부로 끌어들이기보다 어떤 식으로든 이질적인 바깥과 접촉하도록 유혹한다.

<물안에서>의 남희가 새벽에 분명히 들었다고 말하는 큰 소리(“정신 차려!”)는, 그러나 결코 다른 인물과 관객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소리가 같은 공간에 머무는 이들에게 균질한 음량으로 전달되어야 한다는 상식적인 영화의 원리를 흔드는 고함으로 소리 없이 전해진다. 이 영화에서 관객은 흐릿한 영상의 구체적인 정보를 분간하지 못하는 것처럼, 소리를 듣지 못한다. 마티아스 피녜이로는 <강변호텔>에서 <>에 이르는 홍상수의 최근 작업을 거론하면서 그의 영화를 볼 때마다 “영화를 처음 발견하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고 고백한다. 처음 영상을 보고, 처음 소리를 들을 때처럼 생경한 감각에 휩싸인다는 것이다. 그의 표현을 빌린다면 홍상수의 영화를 보는 것은 “문이 열리고 낯선 집 안으로 초대받는 경험”과 같다. 우리는 비밀스러운 건축적 공간에 진입한다. 벽과 문으로 분리된 여러 개의 방이 있고, 각각의 방에서 눈에 비치는 모양과 귀에 들리는 소리는 매번 다른 형태로 보이고 들린다. 이는 “우연히 누설된 비밀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상상하게 하는 요소”라고 말한 하마구치 류스케의 언급과 공명하고 또 갈라선다. 그 자리에서 영화는 모양이 결정되지 않은 불확실함을 안고 모험적으로 산출되고 있다.

영화의 한계점

<소설가의 영화>

영화가 만들어지는 현장은 불안하기 짝이 없는 장소다. 카메라는 피사체로부터 반드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뒤 정교하게 초점을 유지해야 하고, 붐 마이크는 위태롭게 무게중심을 잡으며 소리가 들리는 지점을 향해 기울어져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주어진 지시를 수행하면서 동시에 개성적인 표현을 발산하는 배우들의 행위가 있고, 카메라 뒤에서 비좁은 화면을 지켜보거나 분주하게 신호를 주고받으며 장면이 진행되는 과정을 주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문적인 영화 작업이 지향하는 영화의 외형은 이 장소에 새겨진 불안을 화면에 노출하지 않는 것이다. 카메라 렌즈와 붐 마이크는 오류 없이 이미지와 사운드를 담아내고, 연출자는 명확하게 지시하며 배우는 틀리지 않고 연기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영화는 자율적인 질서와 완결성을 획득한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영화는 정반대의 실천에 가닿을 수도 있다. 영화평론가 에이드리언 마틴은 필립 가렐의 <비밀의 아이>(1982)가 보편적인 영화에서라면 금기시되는 기법을 보여주는 방식에 주목한다. 터무니없이 적은 예산과 열악한 장비들로 촬영된 이 영화에는 과다 노출, 들리지 않는 대사, 초점이 맞지 않는 화면, 음악과 소음의 무분별한 혼재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마틴은 가렐이 수용한 기술적 오류를 영화 제작 과정의 실패한 결과물로 간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비밀의 아이>가 가장 원초적이고 예민한 매체의 물질성을 매개로 ‘영화의 무의식’을 환기한다고 말한다. 영화를 구성하는 사물의 물질적 제한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필름과 마이크가 가하는 한계를 조건으로 삼아 이미지와 사운드의 다른 가능성을 탐색한다는 것이다.

<물안에서>와 <소설가의 영화>에서 홍상수가 아마추어 영화제작이라는 서사적 상황을 빌려 만든 두 편의 ‘영화 속 영화’가 전하는 것은 최소한의 조건만 갖추고 있다면 누구나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어설픈 실천적 옹호가 아니다. 홍상수가 준희와 성모의 작업을 빌려 산출한 영화는, 카메라와 피사체가 영화와 맺고 있던 고정된 관계를 흐트러트린다. <소설가의 영화>에서 준희의 영화에 담긴 배우는 픽션 속의 길수와 현실의 김민희를 구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물안에서>의 남희는 장면을 연기하면서 대사를 잊어버린다. 성모는 촬영된 영상을 확인하고 다시 찍어야 할 것 같다고 말한다. 인물들이 착용하는 흰 마스크와 흰색 후드 모자를 고집하는 이 영화의 시각적 원칙은 개별적인 배우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추상적인 형체에 맺히고 있다. 현실의 개입, 연기와 연출의 오류, 불안정한 프레임의 표면이 새겨지면서 영화를 대면하는 감각의 위계가 조정된다. 한 편의 영화 속에 자리 잡은 또 다른 영화(만들기)는 영상을 이루는 안정된 체계를 흔들면서 영화를 보고 듣는 경험에 근본적인 불안감을 드리운다.

촬영장, 리허설, 워크숍과 같은 일회적인 허구의 현장에 들어선 영화는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한 가지 의제를 공유한다. 오늘날의 영화는 독립적인 픽션을 견고하게 구축하지 못했고, 영화 형식을 탄력적으로 변형할 만한 현실의 경험을 제공하지 못한다. 이제 연출자의 지시에 맞춰 배우가 연기하고 그 말과 움직임이 카메라에 담기는 기초적인 체계로는 유효한 영화적 형식을 갖출 수 없다. 픽션의 세계는 독립적으로 유지될 수 없고, 현실로 열린 구멍은 사방에 뚫려 있다. 이 조건으로부터 허구적 현장의 영화는 한정된 시공간을 벗어나기 위해 출구를 찾는 과정이 된다. 영화는 촬영장, 리허설, 워크숍 현장에 입회하면서 어설프고 어색한 몸짓을 주시한다. 연기를 하거나 무용을 하거나 텍스트를 적는 그 몸짓은 주어진 규칙이 요구하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잠정적인 상태에 있다. 이 동작이 아니다. 이 표현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체는 다른 자세와 움직임을 시도해야 한다. 아직 화면에 도착하지 않은 목적지로 향하는 과정을 담아내면서 영화는 몸짓이 인도하는 출구를 발견한다. 영화적 사건의 가능성이 소진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감도는 무대에서, 영화는 중단되거나 지연되거나 실패하거나 오류가 발생하는 순간들을 끌어들이며 잔존하고 있다.

<물안에서>의 상영시간은 61분이다. 마티아스 피녜이로의 <비올라>는 65분이고, <로잘린>은 43분이다. 서로 거리를 유지하면서 춤을 추는 소년들이 나오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또 다른 워크숍 영화인 <섬뜩함이 피부에 닿는다>는 54분이고 그 영화의 결말에서 예고한 장편 <FLOODS>는 제작되지 않았다(<섬뜩함이 피부에 닿는다>는 “장편 <FLOODS>로 이어집니다”라는 자막으로 끝난다). 장편영화의 기준을 충족하지 않는 상영시간이다. 리허설과 워크숍의 단계는 그 자체로 영화 속의 픽션을 마련하는 하나의 세계로 존재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에 예기치 않은 포기와 중단을 불러오기도 한다. 그것은 때로 영화를 미완의 상태에 머물게 한다. 그것은 영화에 담기는 완성에 대한 강박을 훼손하고, 장면의 완결적 체계를 거부한다.

영화와 처음 만나는 기분

촬영장, 리허설, 워크숍의 영화는 기존의 원리를 파괴하는 파격적인 실천이 아니다. 이 글에서 언급한 영화들은 대부분 극영화에 필요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서사의 표면적인 질서가 제공하는 궤적을 따른다. 하지만 그 위로 또 다른 카메라, 픽션, 극중극의 질서가 덧대지면서 영화의 표면적 질서와 별개로 기능하는 두 번째 질서가 형성된다. 그 두 번째 질서가 영상의 중심적인 규칙을 재조정한다. 첫 번째 질서가 인물의 자연스러운 움직임과 소리를 가리킨다면, 두 번째 질서는 부자연스러운 영상과 사운드를 가져올 것이다. 첫 번째 질서가 관객의 눈과 귀에 보이고 들리는 영화를 제공한다면, 두 번째 질서는 카메라의 시각으로 보는 영상, 기계장치에 부착된 마이크가 듣는 소리를 불러올 것이다. 초점이 나간 영상, 스크린에 보이지 않는 유령적 형상, 너무 어설프고 범상한 영상의 조각들은 그렇게 영화의 표면에 진입해서 다른 장면들과 동등한 권리로 주어진다. 다시 피녜이로의 말을 빌린다면, 두 질서의 충돌은 무언가를 보여주고 들려주는 영화의 기본적인 단위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마치 영화라는 물질과 처음 만나는 듯한 경험을 마주하게 한다.

그 경험의 물질성이 보존된 가장 작은 단위의 장소가 바로 인물의 몸짓이다. 마티아스 피녜이로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상대를 바꿔가면서 키스를 나눈다. 홍상수와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에서는 이따금 두 사람이 느닷없이 포옹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하나의 질서에 온전히 정박할 수 없는 서로의 신체를 끌어안고 붙잡아두려 한다. 겹쳐진 세계가 사라진다면 그들의 모호한 존재성도 사라질 것이다. 영화 촬영이, 무대를 위한 리허설이, 임의적인 워크숍이 끝났을 때 영화가 멈춰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그 중단으로 인해 하나의 세계가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은 포옹과 입맞춤으로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을 보존한다. ‘처음’과 ‘끝’을 마련하는 그들의 일회적인 몸짓은 이야기의 결말은 한없이 지연하고 우회하는 동시대 영화적 서사의 경향에 거스르는 저항이자 탄생하고 소멸하는 영화의 운명에 관한 증언이 된다. <물안에서>의 마지막 장면에서 성모는 촬영하는 영화의 결말을 위해 바다로 걸어간다. 핸드폰으로 재생된 노래와 파도 소리가 같이 들려온다. 화면에는 카메라도, 배우도, 촬영 현장을 가리키는 어떤 단서도 보이지 않는다. 성모는 바다를 향해 멈추지 않고 걸어간다. 초점이 엇나간 화면에서 그는 하나의 점처럼 보일 때까지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이중적인 의미에서, 이것은 ‘영화’가 끝나는 시간을 향해 가는 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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