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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감독님, 손에 피 좀 묻히고 갈게요.", 정우성 감독 데뷔작 ‘보호자’ 촬영 현장을 가다
김혜리 2023-08-18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극장가는 한산했지만, 영화 공장은 방역수칙 아래에서 쉬지 않고 돌아가며 이미 시동을 건 프로젝트들을 제작했다. <씨네21>은 국내 최초로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온 지 석달 후인 2020년 4월18일과 19일 이틀 동안 정우성 감독의 데뷔작 <보호자>의 김포 세트를 방문했고 그 기록을 개봉 즈음에 여기 공개한다.

2020년 4월18일 토요일 이른 아침. 코로나19 확진자가 어제보다 22명 늘었다는 뉴스를 들으며 <보호자> 촬영이 진행 중인 경기도 김포시 아라스튜디오로 나의 털털이 차를 몰았다. 11년 전 <호우시절> 촬영 직후 인터뷰에서 정우성은 <비트> 시절부터 노트에 시나리오를 썼고, 남양주종합촬영소 춘추관에 들어가 매니저에게 타자를 치게 하며 시나리오를 쓴 적도 있다고 말했다. 영화 기자로 오래 버티다 보니 마침내 정우성 감독의 첫 장편 연출 현장을 목격하는 날이 오는구나, 혼자만의 감회에 젖어 아침 8시45분에 현장에 도착했다. 오늘의 콜타임은 8시. 이미 촬영이 진행 중인 세트에, 잠깐 자리를 비웠던 정우성 감독이 흑갈색 코트에 낙타색 목도리를 두르고 들어온다. 그는 오래 움직이기 위해 전압을 일부러 낮춘 것처럼 찬찬하고 느릿했다.<보호자>는 원래 다른 감독이 연출할 예정이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정우성의 입봉작이 됐다.

그가 직접 연기하는 주인공 수혁이 정우성의 필모그래피 최초로 조직폭력과 관련된 캐릭터라는 점도 예상 밖이다. 물론 영화 전체가 수혁이 그 세계에서 탈주하려는 여정이긴 하다. “수혁의 감정은 곧게 뻗어가고 그 안에서 감정의 온도만 왔다 갔다 하는 캐릭터라 연출을 겸하면서도 연기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나와 거리가 있는 인물이지만 내쪽으로 끌어당겨서 형상화하면 될 거라고 봤어요.”

“메이킹 나가!”

이날 촬영은 전체 59회차 가운데 38회차였다. 오늘의 첫신은 10년을 복역하고 출소한 수혁이 연인 민서(이엘리야)와 재회한 다음, 그동안 조직을 장악하고 사업가로 변신을 꾀한 응국(박성웅)의 호텔에 찾아오는 초반 장면이다. 그를 맞이하는 것은 응국의 오른팔 자리를 노리는 성준(김준한). 수혁에 대한 열등감이 이 인물의 지병이다. 이어서 촬영해야 할 신은 같은 장소를 수혁이 두 번째 방문하는 신으로, 제대로 분노한 수혁과 성준의 수하들이 로비에서 물리적으로 충돌한다. 여기 포함된 자동차 액션 촬영은 내일 39회차로 이어진다. 호텔 프런트쪽에서 내다보이는 유리문 너머는 시가지를 합성하기 위해 초록 천으로 덮여 있다. 세트 천장에 날아들어 끈기 있게 촬영을 구경 중인 비둘기 두 마리는 오우삼 감독 현장이 아니라고 설명해도 나가지 않을 태세다.

회색 대리석과 유리블록 아트월, 헤라와 하데스신 조각상과 실내 분수로 이루어진 280평 규모 로비 세트는 색이 단조로운 대신 반사광이 많다. 이내경 미술감독이 색감을 통제한 호텔 세트는 영화의 또 다른 주요 공간인 살인청부업자 우진(김남길)과 진아(박유나)의 얼룩덜룩한 아지트와 대조를 이룬다고 귀띔해준다. 부산 남천동 삼익스포츠센터 자리에서 촬영했다는 해당 장면을 표나게 궁금해했더니, 감독이 현장 편집기사에게 토스한다. 말보다 영화로 답하겠다는 의미인가보다. 과연 현장편집본을 보니 우진과 진아의 은신처는 폐품과 그래피티로 지어올린 성채 같다.

감독이 주연을 겸하는 현장은 어떻게 돌아갈까? 리허설에서는 수혁 역을 최낙권 배우가 대신하고 정우성은 연출에 집중한다. 레디 액션 신호는 조감독이, 컷은 감독이 외친다. 정우성은 손목에 감독의 애플워치와 수혁의 아날로그 시계 두개를 차고 있다. 변환 시간이 필요해서일까? 모니터가 설치된 감독석에서 장막만 들추면 세트가 직통인데도 호텔 정문을 통해서만 현장을 오간다. 오늘 촬영에 쓰이는 카메라는 두대. 세대를 쓸 때도 있다고 한다. 전작 <남산의 부장들>까지 32mm 표준렌즈를 기본으로 애용했던 고락선 촬영감독은 <보호자>에서는 풀숏을 화각이 좀더 넓은 25mm 렌즈로 찍었다. 액션이 많으니 컷이 많을 것 같지만 <보호자>는 가능하면 카메라를 콘티대로 움직여 화면 내 편집을 도모하는 점이 특징이다.

<씨네21>이 취재를 허락받은 4월18일과 19일 촬영에서 만날 수 있었던 주조연은 성준 역의 김준한과 우진 역의 김남길이었다. 38회차 내내 세트에 머문 김준한은 모범생 유형으로 자기 컷이건 아니건 모니터를 확인하러 제일 먼저 달려온다. 한 테이크만 더 가면 안될까 감독에게 조심스레 묻기도 한다. 장난기 넘치는 감독은 선선히 오케이한 다음 “배우의 간곡한 부탁으로 금쪽같은 시간을 써가며 한 테이크 더 가겠습니다!”라고 전체 무전으로 외친다. <보호자> 현장이 매우 화기애애하다는 걸 알아차리기까지는 두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철저한 밀착 취재로 스토커냐고 놀림받는 열혈 메이킹 감독에게 정우성이 걸핏하며 외치는 “메이킹 나가!”는 <보호자> 현장의 러닝개그(그러다 본인이 유리한(?) 상황이 오면 메이킹을 찾기도 한다).

정우성은 영화의 결과도 중요하지만 현장의 여러 삶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는 스타답게 감독으로서도 스트레스를 팀에 전가하지 않는 관록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프리프로덕션을 함께한 조성한 콘티 작가(<남산의 부장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도 이날 방문했다. 현장에 있을 의무는 없지만 “왜 안 와?” 하는 정우성의 전화 한통에 블루베리즙을 들고 달려왔다고. “그렇게까지 기대 안 했는데 머릿속에 영화의 그림이 다 있었어요. 콘티의 그림체까지. 이건 불가능할 것 같다고 하면 배우가 이렇게 하면 된다고 연기로 설득했어요. 감독님은 ‘늪지대’예요.” 그렇게 매력으로 뜻을 관철하면 반칙 아닌가 하고 갸웃하는데 감독이 다가와 고쳐 그릴 콘티가 많으니 밤까지 있다 가라는 압박을 넌지시 던지고 간다.

“ 마음대로 되면 그게 영화냐?”

4월19일 39회차로 이어진 자동차 액션은 유리문이 깨지고, 드리프트를 하고 배우들이 차에 매달리는 복잡한 연출이 포함돼 무술팀, 촬영팀, 미술팀, 분장팀 모두 초긴장이다. 오랜만에 현장에 간 기자는 CG팀도 거의 매 회차 참여해 스크립터만큼 꼼꼼하게 숏을 기록하는 모습에 격세지감을 느낀다. 자동차 질주 숏을 22프레임으로 찍기로 한 고락선 촬영감독은 차 액션이 만드는 결과를 미리 알 수 없어서 가능하면 순서대로 찍기로 했다. 문제의 차는 극 중 수혁이 10년 전부터 몰던 ‘애마’로 검정색 BMW M5 E39이다. “감독님, 손에 피 좀 묻히고 가실게요!” 하는 소리에 흠칫 하고 보니 수혁의 상처 분장 이야기다. 스턴트 드라이버와 액션 전문 대역배우가 모두 동원되는 촬영이다. 정우성은 허명행 무술감독이 호텔 로비로 차를 돌진시키는 운전을 직접 못하게 한 것이 못내 아쉬운지 투덜거린다. 그러나 감독 겸 주연의 부상은 프로덕션 전체를 정지시키는 사고가 될 테니 전문 대역이 합리적 선택이다.

나를 포함해 한국 감독은 왜 정우성을 존 윅이나 에단 헌트처럼 기용하는 시리즈를 만들지 않을까 의아해했던 사람은 <보호자>에서 새로운 액션 히어로를 기대할 수도 있겠지만 감독은 감정과 드라마를 잃으면 다 잃는다는 입장이다. 폭력을 등지고 싶어 하는 고수가 어린 인질을 구하는 낯익은 서사에 함정은 없을까? “제목이 ‘보호자’지만 꼭 아이가 보호만 받는 것도 어른만 보호자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인비(류지안)를 수동적인 인질이나 희생자로만 그리지 않으려 해요.”

39회차 촬영 중인 세트 어딘가에 스탭과 배우가 옹기종기 둘러서 있으면 김남길 배우가 중심에 있다. 보기도 듣기도 재미있는 이야기꾼이 사람을 끄는 이치인 것 같다. <보호자>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인물인 우진은 불행한 기억 때문에 사춘기에 고착된 남자로 천진하고 잔인하다. 캐릭터는 올이 풀리고 다른 천을 잇댄 묘한 의상으로도 표현되는데 김선형 의상팀장은 우진의 모든 옷은 진아가 리폼했다는 설정이라고 가르쳐준다. 캐릭터가 되는 경험이 무엇인지 아는 감독의 연기 연출이 편하기는 김남길도 마찬가지다. 다만 비범한 캐릭터다보니 “작품 전체 톤 안에서 어떻게 보일지 찍는 동안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난이도가 높다”고 진지하게 말한 김남길은 곧이어 “차 뒷좌석에서 재밌게 구르고 싶은데 차가 후륜구동형이라 화려하게 구르기 어렵다”고 투덜거린다. 납치자 입장에서 참으로 반납하고 싶은 성가신 인질임에 틀림없다.

컷 하나씩을 완수해가며 다다른 막바지. 분수 바닥에 충격 흡수 매트를 깔고 와이어 액션 숏들을 찍고 있는 데 <비트> <태양은 없다> <아수라>의 김성수 감독이 스튜디오에 등장했다. “마음대로 되면 그게 영화냐?”라고 독려하던 임동석 동시녹음기사가 <런어웨이>를 함께한 김성수 감독을 팔 벌려 환영한다. 역시 현장편집본을 즉석 시사한 정우성의 오랜 영화 동지 김 감독은 “한국영화의 관습적인 숏이 하나도 없네”라고 첫 감상을 말하고 “원래 정우성은 감독이 어울렸어요. 연기할 때도 시야가 넓었고, 단편을 연출할 때도 관성적 숏은 싫어했어요”라고 기자에게 도움말을 준다.

이날 저녁에는 20주년을 맞은 정우성 팬클럽 ‘영화인’에서 제공하는 치맥 파티가 열렸다. 다트 게임과 경품 추첨으로 흡사 영화과 엠티라도 온 듯 왁자한 자리에서 정우성 감독에게 장편 연출의 어느 단계가 가장 즐거웠냐고 목청을 높여 물었다. 편집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직 안 한 작업이라서? “현장에서 찍은 컷을 온전하게 만들어서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이라서요. 그다음은 믹싱이요.” 어찌 고심이 없으랴마는, 현장에서도 충분히 행복해 보이는데 더 설레는 작업이 남아 있다니, 참 멋진 인생 아닌가 싶어 흐뭇하게 부러워하며 기자는 서울행 자유로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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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