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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듣보인간의 생존신고’, 재밌으면 되는 것 아닌가?
정재현 사진 백종헌 2023-09-07

가수 이승윤, 감독 권하정, 김아현, 출연자 구은하 대담

2018년 권하정 감독은 우연한 기회에 싱어송라이터 이승윤의 라이브 공연을 관람한다. 공연 이후 이승윤의 팬이 된 권하정 감독은 동서대학교 영화과 입학 동기인 김아현·구은하 감독과 의기투합해 2020년 이승윤의 노래 <무명성 지구인>의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그에게 직접 헌사한다. 그리고 이승윤에게 본인이 직접 출연하는 뮤직비디오를 함께 만들어볼 것을 의뢰한다. 이들의 염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응답받는다. “내내 울다가 이렇게 메일 드립니다. 어떤 삶을 사셨는지 어떤 꿈을 포기하셨는지는 제가 알 수 없지만 하정님 길에 제가, 제 노래가 도움이 된다면 무조건 함께하고 싶습니다. 권하정 감독님의 팬 이승윤 올림.” 이 모든 일은 이승윤이 2021년 리부트 오디션 <싱어게인-무명가수전>(이하 <싱어게인>) 시즌1에서 우승하며 스타덤에 오르기 전 일어난 기적이다.

두 친구와 함께 이승윤의 곡 <영웅 수집가>의 뮤직비디오를 만든 권하정 감독은 성공한 덕후의 표본이다. 모든 덕후들이 저마다 공상해봤을 ‘최애와의 작업’을 실현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듣보인간의 생존신고>는 과몰입의 모범 사례다. 이들은 아티스트와 그의 산물을 소비하는 단순 수용자에 그치지 않고 직접 우상의 저작물을 함께 창작하는 생산자가 된 셈이다. 영화제에서 화제를 모은 후 극장 개봉을 앞둔 <듣보인간의 생존신고>의 감독 권하정·김아현, 출연자 구은하 그리고 이 모든 작업을 가능케 한 싱어송라이터 이승윤을 만났다. 이들은 어느새 팬과 스타의 관계를 넘어 절친한 동료 예술가가 되어 있었다. 이마저도 세상 모든 덕후들의 부러움을 부른다.

- 권하정 감독은 2018년 <무얼 훔치지>의 라이브를 듣고 이승윤의 팬이 됐다. 이승윤식 표현에 의하면 이 노래가 ‘한 모금의 노래’로 작용한 것이 아닐까 싶은데.

권하정 당사자를 앞에 두고 이 이야길 하다니! 가사가 좋았다. 당시 내 상황과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 가사가… ‘장롱에 넣었다’가 맞나?김아현 맞다.

이승윤 넣긴 뭘 넣어~.

권하정 ‘옷장에 숨겨놓았던 꿈을 몇벌 꺼내서’구나. (웃음) 이 가사가 당시 내 상황과 굉장히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감독으로서 나를 온전히 드러내되 관객에게 해석의 여지를 어느 정도 남겨두는 작법을 늘 고민했는데 승윤씨는 자신의 생각을 정확한 언어와 음률로 표현했다는 점에도 마음이 갔다.

- 이 곡을 권하정 감독이 처음 들었던 2018년과 뮤직비디오 작업에 착수한 2020년 사이의 이승윤씨는 어떤 시간을 보냈나.

이승윤 음악에 사활을 걸고 모든 걸 불태우던 때였다. 어디서 어떻게 누구와 불태울 것인가에 관한 막막함이 있었지만 오히려 스스로 결승점을 설정해둔 터라 원없이 하고픈 걸 해보는 해방의 날이기도 했다.

- 이 프로젝트가 뮤직비디오 촬영을 넘어 다큐멘터리로까지 이어지기 위해선 당사자의 동의가 필요하다. 이승윤씨는 두 감독에게 촬영 당시 “올해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앨범 준비 중”이라는 말을 건넸다. 이 각오가 영화 제작 동의 여부에도 영향을 끼쳤나.

이승윤 그렇진 않다. 당시 희한하게 비슷한 제안이 많이 들어왔지만 전부 거절했다. 첫째, 즐겁지 않을 것 같았다. 둘째, 창작자끼리의 만남은 대개 허세와 허세의 만남인 경우가 많아 허세 가득한 제안들에 끌려다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친구들은 달랐다. 음악 인생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시기를 이 친구들과 함께한다면 서로 즐거운 일들만 가득할 것 같았다. 다른 때에 이 친구들로부터 제안이 왔어도 흔쾌히 동참했을 것이다.

재빠르고 무모하게 협업하기

이승윤

- 이승윤씨는 여러 인터뷰에서 협업의 가치를 자주 언급했다. 이 작품이야말로 세 사람이 보여주는 협업의 절정 아닌가. 이들의 협업을 지켜보는 마음은 어땠나.

이승윤 부러웠다. 대개 함께 일을 해도 구성원간 쏟는 에너지의 밀도가 저마다 다르지 않나. 그런데 셋은 비슷한 정도의 에너지를 쏟아가며 인생의 한철을 바쳤다. 멋진 공작을 끝까지 완수해낸 점도 존경스럽다.

- 영화의 매 챕터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단어가 ‘무작정’이다. <듣보인간의 생존신고>는 미리 정해둔 것 없이 무언가를 만들고 전달하며 기다린 프로젝트의 연속이다. 이 일을 무작정 실행할 수 있는 동기는 어디서 왔나.

권하정 무언가를 작정하면 용기가 사라질 것 같았다. 그래서 프로젝트의 당위성을 고민할 새 없이 재빠르고 무모하게 진행했다. 물론 우리가 처음 <무명성 지구인>의 뮤직비디오를 전달했을 때 이걸 승윤씨가 좋아할지는 고민했지만.

김아현 나는 좋아할 거라 확신했는데! 뮤직비디오를 만들 때부터 ‘이승윤씨가 감동해서 우리를 위한 노래를 써주면 어쩌나’ 싶었다. (일동 폭소)

- 영화에 나오지 않지만 구은하씨는 열혈 아미(BTS의 팬덤 명)다. 덕질의 경험이 삶의 동력으로 작용하는 순간도 겪어보았나.

구은하 (속삭이며) 멤버십 갱신이 곧이다. 누구든 덕질을 한번은 해보았으면 한다. 살면서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사랑해보는 경험을 하기가 쉽지 않다. 덕질로 인해 누군가는 새로운 꿈을 꿀 수도 있고, 누군가는 마음속에만 품어둔 생각을 다른 존재에게 투사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 뮤직비디오를 만드는 과정에 관한 다큐멘터리지만 정작 실제 <영웅 수집가>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하는 현장은 영화에 포함돼 있지 않다.

권하정 촬영 소스는 거의 다 사용했다. 뮤직비디오를 찍는 과정을 담자는 생각으로 출발했지만 촬영 중엔 우리가 영화의 주인공이란 사실을 종종 잊었다. 분위기가 좋지 않은 등 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순간에도 촬영을 감행해야 했는데 그럴 때마다 찍지 못한 영상이 많아 아쉽다.

김아현

- 내가 찍은 영화의 피사체가 되는 경험은 어땠나.

김아현 우리를 객관화할 수 있었던 점이 재밌었다. 특정 상황에 놓인 각자의 표정을 보는 게 즐거워 넋을 놓고 편집했다.

권하정 객관적인 시각에서 영화를 보니 함께한 친구들의 속마음이 이제야 보였다. 당시 우리의 감정이 고스란히 반영된 영상을 보는 게 좋았다.

- 이승윤씨는 감독들과 첫 미팅 당시 뮤직비디오에서 가장 지양하고 싶은 요소로 신파를 꼽았다.

이승윤 서사 흐름과 무관하게 ‘이래도 안 울래?’식의 감정을 자아내는 요소에 거부감을 느낀다. 그런 것도 한두번이어야지. 버블티를 매일 먹으면 물리지 않나. <영웅 수집가>의 뮤직비디오는 버블티가 아니길 바랐다.

- 세분에게도 영화감독으로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장면이 있나.

이승윤 (세 창작자가 생각하느라 정적이 생기자) 너희 감독이잖아. 일개 관객인 나도 이렇게 신파에 관해 말하는데! (웃음)

김아현 내가 온전히 느끼지 못하고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나 캐릭터를 함부로 창작하지 말자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구은하 자극적인 영화를 못 본다. 그래서 <범죄도시> 시리즈도 아직 안 봤다.

이승윤 그런데 BTS 슈가의 뮤직비디오는 어떻게 봤어?

구은하 그건 다르다! (웃음) 서로 주먹다짐은 안 하지 않나.

해야 할 일과 하고픈 일 사이에서

권하정

- 서울에서 뮤직비디오를 준비하던 중 이런저런 사기를 당하고 수모도 겪었다. 이후 부산으로 내려갈 땐 다 같이 파마를 하고 내려가기로 합의했다던데 이 에피소드를 자세히 듣고 싶다.

권하정 친구들의 제안이었다. 내가 키도 작고 차분한 긴 생머리의 소유자라 만만하게 보이는 거라며 힙한 파마를 권했다. 그런데 파마를 하고 왔더니 다들 웃으며 도망가더라. 막상 파마를 해도 부산에서 일이 잘 풀린 건 아니다.

- 시련이 끊이질 않았다. 뮤직비디오의 촬영감독이 두번이나 바뀌었고 비용과 시간의 한계도 매번 마주해야 했다. 냉철한 피드백도 종종 직면하지 않았나. 아무리 좋아서 하는 일이라지만 고역을 감당해야 하는 순간도 많았다.

권하정 감당하지 않으면 안됐다. 뮤직비디오 촬영 직전 두번이나 촬영감독이 바뀌었을 땐 침울했다. 우리 셋을 제외하곤 학연으로부터 독립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데 결국 학과 선배가 촬영감독을 맡았다.

- 끊임없이 피드백에 노출된 채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일은 이승윤씨도 매번 겪어야 하는 일이다.

이승윤 나를 증명해야 한다는 명제를 인정하는 순간 편해진다. 지금의 난 연예인이란 비아냥을 듣기도, 장르 뮤지션이란 비아냥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의 존재를 증명해내면 그만이다. 오디션 프로그램 <싱어게인>도 매 무대가 나를 입증해야 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오디션 프로그램은 오히려 자의식 과잉이 아니라 버틸 만했다. 스스로의 처지를 인식한 채 ‘내가 뭐라고’ , ‘내가 최선을 다한 다음 변명하지 않으면 돼’라는 마음을 품으면 단계마다 평가를 당해도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지 않게 된다.

- 최근 많은 이들이 이승윤씨에게 초심 유지의 여부에 관해 물었다. 사실 초심은 변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고 유지될 필요도 없다. 처음 품었던 마음이나 생각이 변화하는 과정을 들여다보기도 하나.

이승윤 솔직히 내 초심을 본 사람은 대한민국에 몇 없다. 혹자는 매체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이후를 초심이라 주장하지만 내 초심은 내가 명확히 안다. 초심을 구현하는 데엔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 그리고 나를 둘러싼 제반 환경이 거듭 바뀌면 마냥 초심을 우기기도 난처해진다. 나는 올해에서야 초심으로 살고 있다. 한편 초심이 지나치게 신성시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초심이란 건 결국 외부의 견해고, 어떤 일을 도입한 극 초반의 마음 아닌가. 인생의 초기도 중기도 말기도 살아가야 하는데 초심만 신성시되면 중심과 말심은 소외될 수 있다. 나는 생의 모든 단계에 놓인 마음을 한번씩 손보며 균형 잡힌 삶을 살고 싶다.

구은하

- 감독님들은 어떤가. 처음 이 영화를 만들 때와 개봉을 앞둔 지금의 심정은 얼마나 같고 다른가.

권하정 처음 영화제에서 우리 영화를 공개할 때 관객이 이 영화를 통해 전하고픈 메시지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정말 많이 건네셨다. 그럴 때마다 “관객이 ‘저런 애들도 영화를 찍는데 나라고 도전 못하겠어?’라는 마음을 품었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개봉을 맞아 다시 우리 영화를 보니, 나조차도 영화 속에 담긴 그때의 내가 부러웠다. 그래서 요즘은 <듣보인간의 생존신고>를 찍던 내가 상당히 운이 좋았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부럽다는 관객도 계시지만 나 또한 무수한 실패를 겪고 이 작품 하나 얻어걸린 거다. 관객이 내가 누린 일시적 행운을 스스로의 처지와 비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아현 영화제에 우리 영화가 뽑힐 때보다 개봉을 앞둔 지금 책임감이 훨씬 커졌다. 친구와 둘이서 의기투합해 시작한 일이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극장 개봉까지 하게 된 걸 생각하면 절로 책임감이 든다.

- 권하정 감독은 이 프로젝트를 마친 후 “하고픈 일을 하는 게 돈이 되는 일보다 중요하다”라는 말을 남겼고, “마음가는 대로 살아보니 좋았다”라는 말도 영화에 등장한다. 사실 이런 삶의 방식은 창작자나 예술가가 아니어도 누구나 꿈꾸는 것 아닐까. 하지만 실현하기까지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권하정 현실적인 고민도 필요하다. 당시 그 말을 한 것은 진심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오만방자한 말이다. 삶의 99%가 해야만 하는 일을 수행해야 하는 시간이라면, 그 시간을 온전히 보낸 후에야 남은 1%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는 용기를 걸 수 있다.

이승윤 내가 기필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일을 하는 것이 우습게 비치지 않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그 일을 잘해낼 때만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다.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이 일을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의 수고도 동반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 이승윤씨는 아티스트로서 자신할 수 있는 부분으로 본인의 범용성을 꼽았다. 범용하게 소비되기 위해선 본인이 범용한 사람이어야 하지 않나. 개인이 품은 고유의 날을 무디게 만들지 않은 채 범용해지는 비급이 있나.

이승윤 남에게 과시하지 않더라도 스스로가 가진 알맹이가 단단하면 범용해질 수 있다. 그리고 유연해져야 한다. 하고픈 일이 분명히 있어도 그 하나를 지키기 위한 다른 일들도 마다하지 않으면 된다.

- <듣보인간의 생존신고>는 덕질과 과몰입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구석이 도처에 깔려 있는 영화다. 제47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관객상도 수상했다.

이승윤 범용한 영화, 재밌으면 되는 것 아닌가?

김아현 맞다. 바라건대 진짜 재밌었으면 한다. 관객이 러닝타임 내내 아무 생각 없이 재밌다는 감정을 가진 채 극장을 나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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