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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힘을 빼면 보이는 것들, ‘화란’ 홍사빈
송경원 사진 백종헌 2023-10-24

‘놀라운 신인의 발견’이라는 표현은 게으르다. 2018년 <휴가> 이후 무수한 독립영화에서 색을 다듬어온 홍사빈은 이미 준비된 배우다. 어쩌면 <화란>은 꽃망울을 터트리는 계기에 불과했을지도 모르겠다. 연기에 대한 쏟아지는 칭찬에도 불구하고 홍사빈은 서두르지 않고 자신을 단속하며 더 높은 곳을 향한 도약을 준비 중이다. <화란> 개봉 후 한결 가벼워진 그의 표정 속에는 계절을 지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성숙한 기운이 어려 있는 것 같다. 이 동물적인 감각의 배우는 폭발적인 성장이나 외적인 성과보다 중요한 건 꾹꾹 눌러 자신을 단단하게 다지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 칸영화제 이후 빠르게 영화가 개봉했다. 소감이 남다를 것 같은데.

= 촬영부터 5월의 칸영화제,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산영화제)와 개봉까지 꼬박 1년 넘게 <화란>과 함께했다. 칸 공개 이후 개봉까지 빠르게 이어진 덕분에 즐거운 경험을 하고 있다. 다양한 장소, 다양한 관객들을 만나고 감상을 접하며 차츰 내 안에서 영화가 성장하고 완성되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부지런히 관객 반응과 리뷰를 찾아보고 있는데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을 짚어주거나 해석해주는 걸 보며 영화가 관객에 의해 완성된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고 몸으로 체험 중이다.

- 봤던 해석 중에 기억에 남는 게 있나.

=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칸에서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분조차 시네필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가 의도한 대로 영화를 읽고 객관적인 평을 내려주어 더 긴장되고 떨렸다. 부산영화제에서는 배경이나 문화가 좀더 밀접해서 그런지 해석의 폭이 훨씬 좁고 밀착된 인상을 받았다. 일반 개봉 후엔 겹겹이 쌓인 레이어를 관객들이 각자의 시선으로 풀어나가는 게 놀라웠다. 어떤 장면에서는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연규의 마음을 관객들이 알아봐준 해석도 있었다. 어쩌면 이 영화가 지금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유효한 작품이 될 수 있는 지점을 함께 발견한 것 같아 기뻤다.

- 칸영화제 때보다 훨씬 편해진 듯 보인다.

= 많이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익숙해진 부분도 없지 않다. 관객수라는 성적표를 받아보고 나니 이젠 조금 내려놓고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같다. 사실 스스로 연기가 부끄러워서 평가를 잘 보지 않는 편이었는데 <화란>에 보내주시는 이야기를 통해 시야가 넓어진 경험을 했다.

- 2018년 데뷔 후 수많은 독립 단편영화에서 활약했는데 아무래도 장편 주연을 맡은 <화란>은 달랐나보다.

= 일단 물리적인 시간으로만 봐도 압도적이었다. 단편 혹은 조연으로 짧게 출연했던 시간을 다 합쳐도 <화란> 한편에 쏟아부은 시간이 더 길지도 모른다. 감독님께 듣기로 일반 상업영화의 네배 분량은 족히 찍었다고 하는데 리허설 세팅까지 합치면 천 시간은 연기하고 찍은 것 같다. 이걸 버텨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모든 걸 쏟아부었고, 내 생에서 이 정도로 단기간에 밀도 있게 연기만 한 기간은 없었다.

- 피치 못하게 삭제된 장면 중 아쉬운 것도 있겠다.

= 감독님이 선택한 최종본이 곧 <화란>이기에 이견은 없다. 다만 몇몇 장면이 기억나긴 한다. 가령 명령을 받아 일을 저지른 연규가 사무실에서 돈 봉투를 챙겨 나오는 장면에서 연규는 도망치듯 정신없이 나온다. 그때 넋이 나간 상태로 도망쳐나오다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몇 바퀴를 굴렀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거부반응으로 헛구역질을 하는 장면도 있다. 이 모든 게 계산된 액션은 아니고 내가 연규라면 어땠을까 고민하다 저절로 나온 반응이었다. 나는 그게 흔들리는 연규의 분기점이란 생각에 몰입하고 공을 많이 들였는데 아쉽게도 분량상 나오지 못했다.

- 연기에 대한 호평이 이어졌는데도 스스로 연기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 이랬다 저랬다 한다. (웃음) 리뷰 중에 ‘연규의 몸부림 속에 홍사빈의 시간과 노력이 보인다’는 글을 봤을 때 큰 힘이 됐다. 캐릭터에 나를 어떻게 녹여낼지는 여전히 숙제다. <화란>은 물론 이후 찍은 다른 작품들에서도 부끄러워지는 순간들이 많았다. 스스로 너무 한심하고 아쉬워 집에 가는 차에서 펑펑 운 적도 있다.

- <화란>처럼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탱한다는 건 배우로서 쉽지 않은 경험이다.

= 지나고 보니 소중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무엇보다 조급함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걸 배웠다. 힘을 빼기로 했으면 더 과감하게, 확실히 빼야 했는데 그 부분이 여전히 아쉽다. 선배님들에게 힘을 빼고 넓게 보면 더 많은 해석이 열릴 거라는 조언을 들었는데 이제야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다. 아마도 내 연기 인생에서 <화란>과 같은 영화가 그렇게 빨리 찾아오진 않을 거라 생각한다. 송중기 선배님의 표현을 빌리면 “<화란>은 시간이 지나도 꾸덕꾸덕하고 이상하게 씁쓸한” 영화로 기억되리라 생각한다. 그 일부가 될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겨야 한다는 강박이 없지 않았는데, <화란>을 통해 많이 털어냈다. 아직도 부족하지만 <화란>과 함께 ‘참 잘했어요’ 도장 받으면서 20대의 한 챕터를 마무리하는 중이다.

- 앞으로의 계획은.

= 최근엔 계속 무언가 기대하고 들뜨는 나를 다잡는 중이다. 내가 워낙 조급해하는 편이라 스스로 되뇐다. “사빈아, 뭐가 그리 급해.” 천재는 요절한다는 말도 있는데 나는 천재도 아니고 요절하고 싶지도 않다. (웃음) 긴 호흡으로 멀리 보고 차근차근 담담하게, 오래가는 배우가 되고 싶다. 그걸 위해 잘 멈추는 방법을 모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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