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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밤 11시에 영화 이야기를 시작하면, <사랑하는 장면이 내게로 왔다> 서이제, 이지수 작가
김소미 오계옥 2023-12-07

영화로 친구가 된다는 것의 의미는 관객의 일원으로서 낯선 이와 극장 좌석에 나란히 앉는 일이 그렇듯 종종 급작스러운 조우와 기이한 친밀감을 포괄한다. 한국영화 100주년에 독립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 <0%를 향하여>, 그리고 올해 <낮은 해상도로부터>를 낸 서이제 소설가와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키키 키린의 말>을 옮긴 번역가이자 에세이 <아무튼, 하루키> <우리는 올록볼록해>를 쓴 이지수 작가의 관계도 그러하다. 북토크에서 진행자와 게스트로 처음 만났던 둘은, 영화를 사랑한다는 절대적 공통점 아래 늦은 밤 메신저 채팅창 앞에 모여 서로의 인생을 주고받았다. 첫 영화관 경험, 혼자 본 날들과 누군가와 함께한 날들, 요리스 이벤스와 심형래 사이의 종잡을 수 없는 영화 취향, 데인 드한과 쓰마부키 사토시로 귀결되는 최애의 역사를 공유하는 동안 어느샌가 둘은 책상 앞에서 서로를 그리워하게 됐다. 영화 에세이이자 일종의 교환일기인 <사랑하는 장면이 내게로 왔다>는 그렇게 책의 울타리를 넘어 독자에게까지 우정의 손길을 뻗친다.

- <키키 키린의 말> 북토크에서의 첫 만남 이후 이지수 작가가 먼저 출판사에 서이제 작가와 함께 영화 이야기를 주고받는 책을 쓰고 싶다는 의견을 냈다, 이유가 무엇이었나.

이지수 이 사람의 말을 듣고 있으면 밤을 새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대화가 끝나지 않기를 바랐고, 이전까지 일면식도 없던 사이에 이런 친밀감이 드는 것이 신기해서 북토크 이후로도 한동안 서이제 작가와 나눈 대화의 여운을 곱씹다가 같이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 서이제 작가에겐 첫 에세이다. 망설임 없이 제안을 수락한 이유는.

서이제 서점에 먼저 도착해 북토크를 준비 중인 내 모습을 이지수 작가가 유리창 너머에서 찍은 사진이 있다. 누군가에게 몰래 찍히는 일이 당혹스러울 수도 있는데, 반대로 이지수 작가의 시선에 담긴 나는 언제까지고 계속 보고 싶었다. 이처럼 따뜻한 시선을 가진 사람은 영화를 어떻게 볼까 하는 호기심, 그리고 대화하는 동안 나도 그처럼 나이 들고 싶다는 직감을 따르기로 했다. 막상 쓰면서는 영화 에세이란 것의 방향을 잡기 쉽지 않아 초반에 조금 헤매기도 했다.

- 총 10개의 소주제에 맞추어 두 작가가 서로 다른 기억과 영화 취향을 꺼내어 쓴다. 원고를 교환하는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서이제 새 주제로 글을 쓸 때마다 카카오톡으로 긴 대화를 나눈 뒤 다시 흩어져서 각자의 글을 썼고 다 쓴 글은 교환해서 읽었다. 소설 작업도 계속 병행했다.

이지수 서이제 작가의 제안으로 카톡 대화를 시작하면서 내 일상도 재편됐다. 김수경 편집자까지 셋이서 밤 11시에 모이곤 했는데, 채팅하기로 한 날은 아침부터 무지 바빴다. 하루치의 번역 일을 끝내놓고 애를 빨리 씻기고 재워 육아 퇴근까지 마친 다음 블루투스 키보드를 켜놓고 식탁에 앉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끝없는 육아와 일에서 벗어나 환기되는 전환의 시간이었다. 나만 늘 맥주 한캔과 함께였고. (웃음)

- 이지수 작가가 쓴 프롤로그는 두 사람의 첫 만남을 복기하고, 서이제 작가가 쓴 에필로그는 탈고 끝에 앞둔 오랜만의 만남을 기대한다. 실제로 얼마나 자주 만났나.

이지수 책 쓰기 전까지는 북토크에서 처음, 책 계약서를 쓸 때 두번 만난 게 전부였다. 책 쓰는 동안은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이라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서이제 그래서 에필로그를 쓸 때쯤엔 이 원고만 보내면 이제 정말 만날 수 있다는 엄청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세 번째 만남이 1년간의 책 작업을 마친 후였으니, 따지고 보면 책이 나오기까지 우리가 물리적으로 함께한 시간은 5시간이 채 안된다. 그런데 세 번째 만남 때는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서로를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영화 이야기를 통해 각자의 삶을 공유했기 때문에 생긴 친밀감이 있었다.

- 두 사람은 직업도, 나이대도, 생활양식도 다르다. 그런데 영화를 매개로 각자의 유년기, 20대, 영화를 혼자 보거나 함께 보던 기억들이 시차를 두고 나란히 겹치는 것이 감동적이다.

서이제 신기한 경험이었다. 나중에 영화 에세이를 쓰게 된다면 이런 주제로 쓰지 않을까, 했던 것들은 전부 날아가고 이지수 작가와의 대화 도중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글감과 정서들이 줄줄이 끌려나왔다. 예를 들어 이 책을 쓰면서 비로소 내가 야마시타 노부히로의 영화를 아주 사랑한다는 사실을 처음 제대로 인정하게 됐다.

이지수 나도 내가 첫사랑과 함께 본 <고양이를 부탁해>의 기억에 관해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인터스텔라>의 책장 뒤편을 함께 헤매는 기분이었다고 할까.

서이제 맞다. 이지수 작가의 과거가 내 삶의 일부가 된 느낌도 받았다. 또 다른 시간, 또 다른 세계에 있는 나의 과거인 것만 같은.

- 글을 주고받으면서 비로소 알게 된 서로의 면모가 있다면.

이지수 서이제 작가의 소설은 온도로 말하자면 조금 차갑고 구조적인 느낌을 준다. 그런데 그의 실제 모습과 에세이는 그보다 훨씬 따뜻한 분위기라 재미있었다. 고교생 서이제가 배낭을 메고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찾아 찜질방을 전전하는 에피소드는 귀엽기까지 하다. 미성년자는 받아주지 않는 부천 찜질방에서 번번이 거절당하고선 영화제 관계자를 찾아 읍소하는 대목을 오늘 지하철에서도 다시 읽으며 왔는데 어찌나 짠하던지!

서이제 이지수 작가가 영화를 함께 본 친구들을 언급하는 부분들이 모두 좋았다. 친구들이 등장할 때마다 내가 그를 알기 전의 모습들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에세이를 읽는 동안에도 내내 이지수 작가는 정말 한결같은 사람이라고 느꼈다.

- 책의 날개에는 두 작가가 각각 영화를 전공한 소설가, 영화를 좋아하는 번역가로 소개되어 있다. 두 사람에게 소설과 번역, 그리고 영화는 언제부터 인생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나.

이지수 PC통신 세대로서 받은 영향이 크다. 모두가 왕가위에 흥분하고 <인생은 아름다워>를 찾아보던 시절에 나도 비디오방을 드나들었다. 하지만 시네필과는 어쩐지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서이제 소설가 같은 사람과의 대화가 더 궁금하고 절실했는지도 모르겠다. 번역가가 되기 전엔 회사원이었다. 총 네곳의 회사를 다녔고 결국 모두 사표를 내고 떠났다. 물류 회사에서 비행기에 어떤 물건을 실을지, 어떻게 해야 싼값으로 물건을 수송할 수 있을지 궁리하는 일이었다. 그러다 로펌으로 옮겨 비서 일을 했다. 일본어 번역 대학원에 가려다가 결혼을 하게 됐다. 결혼 후엔 출판사 두곳에서 일했다. 번역에 거창한 소명이 있었다기보다 내게 주어진 기회 중 회사원으로 살지 않는 방법을 소거법으로 찾아나가다보니 번역가가 된 게 아닌가 싶다. 돌고 돌아 비로소 번역 일에 정착하게 되었을 때 이 일이 내게 잘 맞는다는 걸 알 수 있었는데, 책이 매번 바뀐다는 사실, 그래서 도저히 질리지가 않고 자꾸만 더 잘하고 싶어진다는 점이 좋다. 요새는 일본영화, 드라마의 영상 번역에도 관심이 간다.

서이제 최근에 중학생 때 쓴 일기장을 오랜만에 펼쳐보았는데 훌륭한 영화인이 되기 위한 덕목을 빼곡히 정리해서 써놓았더라. 그 시절부터 다짐을 시작해서, 지금껏 그 다짐대로 살아온 것 같다. 문학을 하게 된 계기를 찾자면 결국 영화 때문이었다. 영화만 좋아했지 책은 한권도 읽지 않는 애였는데, 네이버 지식인에 영화감독이 되는 법을 검색했다가 책을 많이 읽으라는 답변을 보고 대단히 절망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해서 삶이 많이 변화했다. 돌이켜보면 영화와 했던 약속을 지키려는 날들이었다. 요즘에는 영화가 이미 내 삶에서 제 몫을 충분히 다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어떤 시기를 잘 건너올 수 있게끔 좋은 것들을 알려주고, 친구들을 만들어주었으니까. 영화감독이 되진 않았지만 그보다 값진 시간들을 나에게 주었다. 그래서 내 지론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 영화를 자기 식으로 공부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웃음)

- 영화를 놓고 각자의 내밀한 경험을 이야기하는 시간이 두 사람에게 남긴 흔적은 무엇인가.

서이제 이 책을 쓰면서 깨달은 건데 영화를 같이 본다는 건 그 사람의 기억 속에 영화와 함께 기억되는 일이다. 실은 오늘 이지수 작가와 처음으로 함께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을 볼 예정인데, 작가님의 기억 속에 <괴물>과 내가 어떻게 남을지 궁금하다. 훗날 그의 또 다른 에세이에 내가 나왔으면 싶다.이지수 같이 영화를 보는 일이 때로는 혼자 볼 때보다 더 외롭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상대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할까, 지루하지는 않나 등등. 나만큼 이 영화를 좋아할 것 같지 않은 사람과 영화를 볼 때는 긴장하게 된다. 같은 영화를 보고 전혀 통하지 않는 감상을 느낄 때 소외감을 느끼기도 하고.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그러면 뭐 어때?’ 싶다. 영화를 두고 감상을 나누고 싸워도 보고 해소도 해보고 싶다. 서이제 작가와 영화로 대화를 나누면서 내게는 어떤 용기가 생겼다.

<사랑하는 장면이 내게로 왔다>

서이제, 이지수 지음 | 마음산책 펴냄

“그래도 아름다워.” 이지수는 옆자리에 앉은 동료를 바라보며 말했다. “서이제 작가가 책의 마지막 챕터에 쓴 <아사코>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됐다. 그의 언어를 통해서 내 마음까지 해설되었으니까. 아사코가 료헤이를 붙잡기 위해 뛰어가는 후반부 장면을 묘사할 때 특히 그랬다. 달리는 운동의 교차 속에서 진짜와 가짜가 전복되는 순간의 감흥을 포착해주어 고마웠다.” 아사코가 료헤이를, 료헤이가 아사코를 쫓는 것 같은 이 분절된 숏의 연결들은 료헤이와 바쿠를 같은 배우가 연기했다는 점에서 아사코가 바쿠를, 바쿠가 아사코를 쫓는 것 같기도 하다. 소설 속에서도 동시대의 디지털적 인식과 감각을 녹여온 서이제는 이렇게 쓴다. “영화는 복제의 예술임으로 모두 가짜라는 것. (…) 무한히 복제될 뿐 아니라, 왜곡과 변형의 가능성까지 품게 되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그 속에 담긴 모든 것이 허상이라는 것.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영화를 사랑한다. 그래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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