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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재난사회와 그 적들,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

※이 글의 큰따옴표 안에 있는 말은 모두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의 대사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이 글을 마감하고 있는 12월19일, 오늘자 일간지를 펼친다. 북한은 고체연료 ICBM을 또 쐈다. 한미 핵작전 훈련 예고와 미국 전략핵잠수함의 부산항 입항에 따른 리액션 성격이다. 남북간 힘겨루기는 냉전에서 그치지 않을 수 있다는 태세로까지 치닫고 있다. 강대강 구도는 일단 시작되면 어느 한쪽에서 그만두고 싶어도 멈추기 어렵게 된다. 그래서 진짜 위기는 “이 모든 걸 조종하는 자가 없다는 것”일지 모른다. 많은 경우 재난은 집단의 산물이다. 통제 없는 강대강 구도는 미시 세계에서도 펼쳐진다.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종류도 다양한 인플루엔자 유행에 이어 마이코플라즈마 폐렴이 창궐했다. 코로나19 이후 항생제 투약 급증에 따라 슈퍼박테리아가 내성을 키운 탓이라는 분석이다. 우리는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항생제는 “옳은 일이니까” 처방했겠지만 “결국 우리에게 독이 될 것”이다. 이러면 우리 몸의 면역 시스템이 무너진다. 이미 우리 지구는 시스템의 상당 부분이 망가진 상태다. 그간 인류를 풍요롭게 한 화석연료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독이 되어 돌아왔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12월 기온은 영상 20도까지 치솟은 지 단 2주 만에 영하 20도를 기록했다. 도깨비 같은 날씨의 원인으로 북극 찬 공기의 남하를 막아주는 제트기류의 교란 현상이 지목된다. 북극과 한반도 사이 기류의 둑이 무너지기까지는 수많은 요인이 작용하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 활동에 의한 지구 가열화가 주된 원인이다. 미래 세대는 기후 위기에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다 깨닫기 시작했다. “어차피 신경도 안 쓸 텐데 뭘. 아무도 내 말엔 관심이 없어.”

잘못하지 않은 이들의 잘못된 결과

하지만 진짜 문제는, 오늘날 세계의 많은 잘못들이 특정 세력이나 소수의 악당에 의해 저질러지는 일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세상 모든 생명을 해치는 인간들”은 “종이빨대와 동물복지 제품을 쓰며 죄책감을 잊고”, “집단의 합의에 빠져 스스로의 끔찍한 실체를 외면하고 있다”. 겨울이 이렇게나 추운 걸 보면 지구 온난화는 허구라고 말한 바 있는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최근 이민자들을 두고 ‘미국의 피를 더럽힌다’는 혐오 표현을 내뱉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한 사람의 악덕이 아니라 그가 내년 미국 대선 당선 가능성 1위 후보일 만큼 다수가 지지한다는 것이다. 그의 명백한 불법 행각이 ‘팩트’로 드러날 때마다 지지율은 올라갔다. “팩트와 편견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 내 정치만 망가지면 그나마 다행이겠으나 그의 재집권은 세계 경제에 ‘트럼피네이터’(트럼프+터미네이터)가 될 것이란 걱정이 벌써부터 현실화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전쟁터 한복판에 있는지도 모른다.” 말할 것 없이 강대강 구도의 극단은 전쟁이다. 지구상에 대규모 전면전이 2곳에서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 2023년, 이스라엘은 오인 발포로 자국 인질을 사살하고 말았다. 강한 상대에 강하게 대처하다 같은 편 사람을 죽였다.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가족을 잃은 이들이 도처에서 통곡하고 있다. 이태원 참사 유족들은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아스팔트 바닥에서 오체투지 행진을 이어가야 했다. 거대 양당은 ‘네 탓’만 할 뿐 문제 해결에 나설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들이 만들어낸 갈등으로 이익을 보는 건 그들 자신뿐이다. 소수의 독재 세력이 다수를 억압하던 시절과 달리 맞서 싸울 대상이 모호해진 지금 “사람들은 적이 불분명할 때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게 된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부부가 제작한 넷플릭스 영화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는 우리가 재난과도 같은 일상사를 접할 때마다 각각의 장면과 대사들이 떠오르도록 하겠다는 의도를 숨기지 않는 작품이다. 거의 모든 대사를 일간지 기사의 주석으로 붙여도 될 만큼 영화는 21세기 재난의 보편적 실상을 노골적으로 읊는다. 한 작품의 장치들이 매우 노골적이어서 돋보이는 경우를 ‘노골미’라 부르기로 한다면, 이 영화는 <바이스>(2019)나 <어스>(2019), <돈 룩 업>(2021)만큼이나 현실 직유의 노골미를 갖춘 수작이다. 최근 미국에서 정색하고 자국 비판에 나서는 작품이 잇따르는 것은 그만큼 작가·감독들의 세상 걱정이 크다는 방증일 것이다. 이같은 흐름 속에서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가 갖는 차별성은, 비난하기 손쉬운 대상을 세워놓고 이를 과녁 삼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재 인류가 처한 문제란 ‘잘못하지 않은 이들이 모여 이룬 잘못된 결과’인 측면이 크다는 점을 정확히 아는 원작자가 쓴 이야기인 동시에, 세계 최고 권력의 핵심에 있던 제작자가 조언을 덧붙인 각본 덕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말하는 건 재난의 실체라기보다 재난을 맞은 인간의 실체다. 도입부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사람들이 정말 싫다”고 할 때, 영화는 아무리 둔한 관객도 알아볼 수 있도록 극단적인 줌인을 사용함으로써 ‘당신은 지금부터 몹시 노골적인 영화를 볼 것입니다’라고 안내한다. 동시에 특정 악당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 이 세계의 구성원들에 관한 이야기임을 선언하고 시작한다.

티핑 포인트

지구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듯한 첫 장면이 지나면 카메라는 자유의 여신상이 세계에서 가장 비싼 땅을 등지고 있는 구도로 뉴욕을 비춘다. ‘세상을 등지고 떠나라’는 중의적 뉘앙스의 타이틀 뒤로 가족이 휴가를 떠난다. 광고 회사에서 일하는 아내는 휴대폰, 교수인 남편은 터치패널 라디오, 아들은 비디오 게임, 딸은 아이패드로 OTT 스트리밍을 보고 있다. 이후 과정은 인물들이 한 걸음씩 디지털 세상을 강제로 등지는 상황을 그림으로써 우리 삶의 디지털 의존을 거꾸로 증명해 보인다. “왜 그거 있잖아요. 옛날 프로 다시 틀어주는 거.” “재방송?” “근데 그걸 왜 했댔죠?” 엄마(줄리아 로버츠)와 딸의 대화는 한 세대 만에 바뀌어버린 문화 양식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딸이 즐겨 보는 1990년대 시트콤 <프렌즈>에 줄리아 로버츠가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기억하는 이라면 이 영화의 ‘능청미’ 또한 예사롭지 않다고 느낄 것이다). 모든 디지털 기기가 먹통이 된 이후, 교수 아빠는 “난 휴대폰과 GPS 내비게이션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외치기에 이른다. 재난영화는 오래된 장르지만, 2020년대 들어 많은 영화들이 재난 이후 디지털 문물이 사라진 세계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기 시작한 것은 분명 현실 반영적이다. <슬픔의 삼각형> 또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같은 상황에서 인물이 어떤 선택을 할지 묻는 작업은, 기후 위기와 정치·경제의 양극화, 핵전쟁의 위협 속에서 한층 직접적인 질문이 되어가고 있다. 지금 인류가 처한 현실은 극영화에서조차 노골적이고 적나라하게 캐묻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함이 하나의 조류를 형성하는 것이다. 모호하지만 풍성하게 상상력을 돋우는 방식만이 예술적 태도라는 흔한 인식은, 이 대목에서 순진하거나 한가해 보이기까지 한다.

여기서 지나치기 어려운 것이 극 중 미래 세대와 기성세대의 대조다. 영화에서 재난의 징조를 먼저 감지하는 인물은 줄곧 13살 딸이다. 그는 스트리밍 중단 사태와 백사장을 향해 돌진하는 유조선, ‘세상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당신들 대체 어쩔 거야?’라고 묻는 듯한 사슴 무리를 가장 먼저 본다. 이 영화에서 가장 어린 인물인 그는 저 멀리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에도 누구보다 민감하다. 반면 이 집안의 엄마 아빠는 극이 시작되고 한참 동안이나 “사슴을 보면 좋은 징조래”라는 말 따위를 나누다 수시로 전해지는 경고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극 초반 아내와 남편은 자녀들이 침대에 든 뒤 젠가 게임을 한다. 온 가족이 심심풀이로 할 법한 놀이를 어른들끼리만 하도록 한 설정 역시 경고를 몰라보는 기성세대에 대한 상징이다. 번갈아가며 아래쪽 블록을 빼 위쪽에 쌓는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괸다. 젠가 탑은 아슬아슬하게 구조를 유지하지만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다. 세계 기후학자들의 공통된 경고는, 지구 생태 시스템이 티핑 포인트를 맞으면 서서히 와해되는 게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붕괴의 한순간이 온다는 것이다. 무서운 건 지금 인류의 위기가 기후 문제뿐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차를 몰고 나간 남편은 한 스페인계 여성과 마주치는데, 다급한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채 뿌리치고 돌아온다. 그러고는 나 몰라라 한 자신의 행동에 죄책감을 느낀다. 알고 보니 백인 지식인의 순진한 편견이었다. 그녀가 스페인어로 떠든 말은 “비행기가 붉은 물질을 뿌리고 있어요. 화학무기인 것 같아요”라는 경고였다. 이름 모를 여성의 절박한 외침은 도움을 요청하는 게 아니라 도움을 주려는 것이었다. 영화는 이 스페인어 대사에 자막을 달지 않음으로써 관객의 선입견에까지 노골미와 능청미를 갖춰 질문한다. 당신은 저 이주민 여성으로 보이는 인물로부터 무엇을 느꼈나요. 혹시 백인 주인공의 안위를 먼저 걱정하지는 않았나요. 시혜를 베풀어 스스로를 선량한 시민으로 부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안타까웠나요.

팩트와 편견 사이를 오가는 연출

관객의 편견을 서스펜스 조성에 직접 끌어들이는 방식의 연출은 이 영화가 우리 모두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과 긴밀하게 상호작용한다. 백인 주인공 가족이 휴가를 보낼 빌라를 빌려준 집주인은 흑인이다. 그는 뉴욕의 최상류층으로, 역시나 등장인물을 넘어 관객의 편견이 더해져 서스펜스가 작동된다. 전반부까지 관객은 누구를 의심해야 하는지 갈팡질팡하지만, 인물 누구도 거짓말하지 않았고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 모두가 재난을 구성한 일원일 뿐이다. 시장 분석가인 집주인이 말한다. “내 똑똑한 클리언트 중엔 거액을 잃은 사람들이 있어요. 팩트가 아닌 편견으로 투자했거든요. 최악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거죠. 엄청난 거액을 잃고도 말이에요.” 인류는 이미 숱한 경고를 받았지만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는 중이다. 인류 사회가 코로나19로 잃은 비용을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하지만 2023년 인류의 모습은 생태계의 강력한 경고를 알아듣지 못한 듯 보인다. 그래서 미래 세대는 <웨스트윙> 시리즈의 한 에피소드를 떠올린다. 매일 신께 기도하는 한 사람이 홍수를 맞아 라디오 경보도 무시하고 구조 보트와 헬기의 손길도 마다한 채 기도만 하다 결국 물에 빠져 숨졌다. 하늘나라에 가서 따졌다. “기도했는데 왜 구원해주지 않았나요?” 신이 답한다. “나는 너에게 경보 방송과 보트와 헬기를 보내줬다. 뭘 더 바라는가?” 인류는 지구 기온 상승 1.5℃의 티핑 포인트가 목전에 다가왔다는 걸 안다. 폭력의 악순환이 초래한 끔찍한 결과를 낳은 역사를 숱하게 목격했다. 하지만 멈출 줄 모른다. “웃기는 건 다들 속으론 알고 있다는 것”이다. 미래 세대는 그래서 결심한다. “더이상 기다리지 않을래요.”

영화를 보지 않은 채 이 글을 읽는다면 웬 프로파간다인가 싶겠지만,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는 서스펜스 스릴러로서도 손색이 없는 장르영화다. 일부 이 영화에 대해 내려지는 박한 평가는 ‘궁금증을 쌓아놓기만 하고 용두사미로 끝낸다’는 취지에 집중되는데, 이는 재난 상황에 처한 인간의 실체를 보여주려는 이 영화의 목표를 오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체를 볼 수 없고 연결된 재난의 일부만을 본 채 안다고 여기거나 혹은 외면한다. 나약하고 폭력적인 호모 사피엔스의 속성까지 파고드는 영화는 인류의 또 다른 면모에 주목한다. 극 종반 강 건너 도심에서 펼쳐지는 내전 상황을 목도하는 두 인물은, 애초 반목하던 사이였지만 대화를 통해 조금씩 서로를 이해해간다. 그리고 재난의 공포 앞에서 자연스레 손을 잡는다. 오바마 부부는 이 말을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인간이 아무리 끔찍한 존재라 해도 우리가 의지할 건 결국 서로뿐이란 점은 변치 않는다.”

P.S. 넷플릭스는 신작 대부분을 ‘돌비 애트모스’ 사운드로 제작한다.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는 사운드의 역할이 심각하게 중요한 영화다. 재난의 일부분이 한 걸음씩 엄습해 들어올 때 그 한복판에 자리한 인물들과 시청자가 교감할 필요가 큰 작품이거니와 그에 부합하게 디자인된 영화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날아오는 홍학 무리의 날갯짓, 인물을 포위한 사슴 떼의 발굽 소리, 저 멀리서 들려오는 의문의 포격 소리는 말할 것 없고 풀벌레가 울거나 소나기가 떨어질 때, 심지어 “정적이 시끄러운” 순간조차 다중 채널을 통한 정교한 음향 배치와 사운드 믹싱이 무의식 중에 시청자 귀에 들어와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사운드 디자인은 매우 만족스러운 수준이다. 문제는 최근 넷플릭스가 돌비 애트모스 콘텐츠를 ‘공간음향’이라는 이름의 다른 기술을 통해 국내 서비스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일반적 방식으로 넷플릭스를 시청하면 돌비 애트모스 콘텐츠를 공간음향으로 감상할 수밖에 없다. 공간음향이란 전방에만 배치된 스피커(보통의 TV 스피커나 사운드바)를 통해 소리의 반사 등을 이용해 시청자의 전후·좌우·상하 위치에서 사운드가 나오는 듯한 느낌을 주는 가상 입체음향 기술이다. 하지만 동일한 조건에서 비교한 결과, 적정한 시스템을 갖춘 돌비 애트모스 사운드를 4K UHD에 비유할 수 있다면 공간음향은 HD 수준에 불과할 만큼 입체감이 떨어진다. 당신은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의 제작 품질을 상당 부분 못 누렸을 공산이 크다. 그마저도 전후좌우에 적절한 거리를 두고 벽과 천장이 있어야 소리 반사를 통한 공간음향 구현이 가능해진다. 국내에서 넷플릭스의 돌비 애트모스 사운드를 제대로 향유하려면 애플TV 등 별도의 디바이스를 경유해야 한다. 국내 다수 가정의 시청 환경이 시청자 앞쪽에만 배치된 스피커로 넷플릭스를 감상한다는 현실을 감안할 때, 공간음향 기술이 차선의 대안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넷플릭스는 가정마다 다른 스피커 환경에 따라 ‘돌비 애트모스’나 ‘공간음향’ 등을 고를 수 있도록 하는 선택권을 제공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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