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영화제들을 통해 처음 주목받기 시작한 홍상수 감독이 프랑스영화계에 본격적으로 진입한 것은 2003년과 2004년의 일이다. 당시 그의 초기 세편의 영화가 한꺼번에 극장에서 개봉했고, 뒤이어 <생활의 발견>과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가 소개됐다. 불과 1년 남짓한 사이 다섯편의 작품이 소개되면서, 당시 함께 부상하던 다른 한국 감독들, 예컨대 봉준호나 박찬욱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홍상수 감독만의 강렬한 작가적 정체성이 빠르게 드러났다. 1999년 <카이에 뒤 시네마> 537호에 실린 홍상수 관련 초기 비평 중 하나에서 평론가 샤를 테송은 이미 그의 영화를 “이미지와 스타일을 신봉하는 아시아 영화 물결에 역행하는” 작업이라 평하며, 그를 “곤충학자 같은 영화감독”, “인간 행동을 놀란 눈으로 관찰하는 자”라고 묘사한 바 있다. 시네필 관객이 쉽게 동일시할 영웅적이지 않은 지식인과 예술가 군상을 통해, 홍상수는 변덕스러운 인간관계를 연출하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감독으로 빠르게 인식되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유럽과 감응하는 감수성을 지닌 감독이기도 하다. 단지 파리에서 1년을 보냈기 때문만이 아니라, 로베르 브레송과 그의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의 영향 때문이다. (홍상수 감독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정착하기 전 1991년 파리에서 1년간 머물렀다. 파리 시절에 대해 그는 <씨네21> 641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좋아하던 사람들 중에서 유독 프랑스랑 관련이 있는 사람이 많더라. 한국에 정착하기 전에 한번 구경하고 싶은 마음, 막연한 동경 같은 게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한번 보고 싶었다. 마침 아는 분 친구인 여자 화가의 파리 집에 꼭대기층 방이 하나 비었다기에 무작정 갔다. 그러다가 아무것도 안 하고 1년 있게 된 거지.”-편집자) 2011년 프랑스 시네마테크에서 열린 회고전을 위해 쓰여진 소개문은 프랑스에서 홍상수가 어떻게 수용되어왔는지 잘 보여준다. 프로그래머 장프랑수아 로제는 언어와 욕망이 얽히는 방식을 두고 에릭 로메르와 나란히 놓고, 술자리 장면의 중요성 또한 강조했다. 홍상수 감독의 이름은, 대사량 많은 술자리를 그린 긴 장면들과 곧바로 연결되기 시작했고, 유럽 관객은 소주와 과음을 한국적인 색채로 받아들였다.
내가 2011년 그 회고전을 통해 홍상수의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도 이런 요소들은 매우 두드러졌다. 어쩌면 지나치게 두드러져 그런 요소들이 그를 비교 불가능한 감독으로 만드는 요소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예를 들어 우연을 다룬다는 점에서 로메르와 닮은 점이 있다 해도, 홍상수는 훨씬 덜 도덕주의적이며 서사의 형태는 훨씬 더 파편적이다. 욕망이나 사회에서 느끼는 불편을 강조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의 영화를 사실주의적이고 심리 중심적인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영화는 무엇보다도 인물들의 삶과 서사의 관습을 모두 깨뜨린다. 홍상수 자신도 이를 명확히 말한 바 있다. 2004년 <카이에 뒤 시네마>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내가 현실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고 말하지만, 오해다. 나는 내가 구상한 구조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든다.” 그는 또한 좋은 영화란 사고의 습관을 바꾸는 영화라고 말하기도 했다.
홍상수가 항상 똑같은 영화를 만든다는 농담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30년에 걸친 그의 작업을 돌아보면, 그의 영화는 서로 다른 층위들을 일관되게 엮어내며 점점 더 자유로워지는 방향으로 진화해왔음을 알 수 있다. 단순해 보이는 표면 아래에는 과감한 순간들이 숨어 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보이지 않는 남자(로메르보다 루이스 부뉴엘의 영향이 더 선명하다), <풀잎들>에서 지영(김새벽)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시퀀스, (흐릿함이 <물안에서>에서 이미지를 압도하기 전)<강변호텔>에서 시가 낭독되는 동안 흐려지는 숏들, <북촌방향>에서 배우 김보경이 두 인물(옛 연인 경진과 술집 주인 예전)을 연기하는 설정 등이 그렇다.
나에게 홍상수 영화로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것은 바로 이 영화 <북촌방향>이었다. 남자주인공 성준(유준상)이 몇년 만에 재회한 옛 연인 경진을 찾아가는 장면에서 나는 강렬한 감정을 느꼈다. 그는 무너져내리며 그 연인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하고, 그 넘치는 감정은 그녀에게 전해져 두 사람은 침대 위에서 포옹한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컷 이후 두 사람은 떨어지고, 성준은 전화번호가 이전과 같다면서도 연락하지 말라고 부탁한다. 심리를 넘어, 반전을 동반하는 컷은 형식과 인물들의 관계 사이에 연결고리를 형성한다. 나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서도 비슷한 지적 자극을 주는 즐거움을 느꼈다. 해원(정은채)이 연인 성준(이선균)과 남한산성에서 키스하는 낭만적인 순간 바로 뒤에, “거기서 그만 갈걸 그랬다”는 해원의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모든 것은 한순간, 한숏 사이에도 달라질 수 있다. 우유부단한 인물들은 중단, 공백, 말과 행동 사이의 불일치, 원인과 결과의 어긋남, 시간과 시간 사이의 불일치 위에 구축된 서사와 맞물려 있다.
홍상수는 뻔한 일반론을 거부하며, 그의 영화가 인간성에 대한 교훈을 제시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영화에는 유희적 차원이 있다. 특히 반복의 활용은 관객이 장면들 사이의 연결을 맞춰나가도록 유도하는 동시에,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환상과 탐구심을 해체한다. 홍상수는 산세바스티안의 한 기자회견에서 20대에 읽은 니체가 자신에게 깊이 각인됐다고 말한 적이 있으며, 이는 그가 이상주의적 견해나 잘 구축된 관념보다 삶과 삶의 예측 불가능한 경로에 더 가치를 두는 방식에서도 감지될 수 있다. 그의 서사는 꿈과 현실의 구분을 흐리고 시간 순서를 교란하며(<자유의 언덕>), 고정된 인물 정체성의 개념에 도전하고(<우리 선희>,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장면의 반복을 통해 현실은 개인의 선택을 복잡하게 만드는 다수의 가능성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드러낸다(<오! 수정>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2017년 이후 홍상수 감독의 플롯은 점점 더 미니멀해졌고, 캐릭터들 역시 변했다. 불안한 남성과 뒤틀린 관계들은 우정, 홀로 선 여성 인물들, 그리고 삶의 통제 불가능성을 받아들이는 노년의 인물들로 대체됐다. 다시 말해, 죽음을 앞둔 채 그저 눈앞의 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일상의 기적으로 음미하고자 하는 <당신얼굴 앞에서>의 상옥(이혜영) 같은 인물의 실존적 태도는 영화의 형식에 반영됐으며, 이는 기존의 극 구조를 해체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태도는 <인트로덕션>의 제목과 구성에서도 드러난다. 죽음이 삶을 중단시키고 인간의 의지를 교란하듯, 홍상수는 감정과 그 길 위에서 마주치는 소박한 순간들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굳이 완결된 이야기(기승전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홍상수가 추구하는 형식의 단순화는 언제나 구조적 효과와 이미지 사이의 보이지 않는 차원을 드러낸다. 겉보기에 평범해 보이는 표면 아래에서, 인물들의 말은 우리가 보는 것(혹은 <우리의 하루>의 인터타이틀이 말하는 것)과 충돌하고, 장면과 장면 사이의 변주와 모순은 어떤 판단도 복잡하게 만든다. 롱테이크와 줌이라는 단순한 영화의 운동 속에서 대화와 연기는 음식 이야기와 철학적 대화 사이, 다정함과 과도한 고통 혹은 기쁨 사이를 오간다. 때로 말은 약간의 음악이나, 사물의 거친 현존, 이를테면 애벌레, 고양이, 나무에 자리를 내주기도 한다. 거대한 선언과 메시지를 경계하는 태도 속에서, 나는 그의 영화의 철학적 지평이 역설적으로 순수하고 천진한 현재를 제시하는 듯 보이는 사소한 순간들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하루>에서 대화가 가위바위보 놀이로 전환되는 순간, <소설가의 영화>에서 수어 동작을 반복하는 즐거움 같은 장면들 말이다. 그러나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의 마지막에 수박을 먹는 즐거움이 남자주인공 영수(김주혁)가 여자 친구 민정(이유영)을 통제하려는 욕망을 극복하는 여정의 결과인 것처럼, 현재의 순간을 포착하는 일 역시 하나의 영화적 노력의 산물이며, 그 정서적 힘은 고독, 불안, 우울을 함께 품는 방식과 깊이 연결된다. 홍상수 감독은 모든 장면이 플롯과 연결되어 결말로 나아가야 하는 산업적 영화문법과 정반대를 지향한다. 그의 영화가 남기는 인상은 직관을 의도보다 우선시하고, 배우들이 심리적으로 캐릭터를 미리 구상하기보다는 즉각적인 감정을 표현하고 행동하도록 이끄는, 당일에 시나리오를 쓰고 바로 촬영하는 영화의 제작 방식과 일치한다.
나는 매년 홍상수의 영화를 잘 모르는 젊은 학생들에게 홍상수에 관한 강의를 한다. 학생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우선 한국영화나 K드라마를 좋아해서 수업을 선택한 학생들은 적잖이 당황한다. 그러나 매년 소수의 학생들은 그의 영화에 깊이 매혹되고 감동받는다. 영화를 배운다는 것은 흔히 기술적·서사적 완벽성을 추구하고, 관객을 놀라게 하려는 방향으로 흐르기 쉽다. 진정성 있게 스스로를 표현하기보다 말이다. 하지만 영화는 반드시 극적인 이야기를 하거나 의미를 강요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하나의 태도를 전달할 수도 있고, 통제하려는 충동에 저항함으로써 우리를 삶에 더 가까이 데려갈 수 있다. 한 학생은 언젠가 모든 영화학도가 홍상수 감독의 <물안에서>를 봐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솔직히 말해 그때 나는 그렇게나 미니멀하고 급진적인 작품을 언급했다는 사실에 꽤 놀랐다. 하지만 아마 그가 느낀 것은 이런 것이었을 테다. 홍상수 영화를 발견한다는 것은 시선을 부드럽게 재교육받는 일이며, 영화를 만들고 감상하는 또 다른 방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안도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