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반부의 어느 장면, 산에 오른 어머니의 모습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옥실(이정은)은 막내딸과 남편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든 상현(변요한)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를 붙잡아 등에 지고 산꼭대기로 향한다. 상현의 육신은 옥실의 허리와 묶여 있다. 허리춤에 그를 안고, 그녀는 고통스럽게 땅바닥을 기어간다. 마치 교수형에 처하듯 부자연스러운 두 사람의 구도, 영화는 그녀가 나무에 범인을 걸쳐놓고 하늘로 끌어올리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 신은 다른 어떤 부분보다 더 단호하고 직설적이다. 바닥에서 연결된 울퉁불퉁한 천의 고리는 이제 막 숨통이 끊어진 남자의 몸을 붙잡는다. 잠시 후 바람이 지나가고, 세상은 고요해진다.
영화 <경주기행>(2026)을 구성하는 이야기 구조는 비교적 간단하다. 어느 가족이 막내딸을 죽음에 이르게 한 원수에게 복수를 가하고자 한데 뭉친다. 가족은 이제 막 출소한 범인을 납치해서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몇 가지 허술한 실수로 사건이 발생한다. 그 과정에서 가족 내부에 분열이 일어난다. 이야기의 결말에서 어머니의 강력한 결단은 마침내 범인을 처벌받게 만든다. <경주기행>은 법적 처벌과 사적 복수의 영역을 누구나 생각할 법한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통해 드러내는 영화이다. 사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실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사회적 금기의 영역에 대해 이 작품은 평범하고 장르적인 방식으로 관객에게 이른다. 정확히 말해, 서두에서 묘사한 영화 후반부 어머니의 활약이 비쳐지기 전까지의 서사가 그렇다.
영화 속 모든 남성 캐릭터는 죽거나 약화되고, 혹은 소외되는 운명을 지닌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여성주의적이다. 남성의 부재는 ‘가족’이라 새겨진 흰색 티셔츠를 입은 네명의 여성이 보충한다. 그녀들의 중심에는 ‘어머니’가 있다. 8년 전 수학여행을 떠난 막내딸이 살해당한 후 아버지마저 스스로 목숨을 끊자, 남겨진 이들은 각기 자신의 역할을 찾아서 새로운 가족의 형태를 구성했다. 둘째 딸 영주(박소담)에게 어머니가 말한 내용은 일종의 죄책감을 포함하고 있다. “똑똑한 딸 영주야, 딸들 중 네가 가장 어려웠어. 너 좋아하는 법 공부 그만두게 한 게 내 탓인 것 같았다. 다음 생엔 내 딸로 태어나지 말고 하고 싶은 공부 실컷 해.” 한편, 셋째 딸 동주(이연)는 엄마에게 자주 이렇게 말한다. “미안해”라고. 동주는 모든 사건의 발단에 자신의 책임이 있다고 믿고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첫째 딸 장주(공효진)의 고백 같은 실토가 이어진다. “엄마, 그놈을 풀어준 건 바로 나야.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엄마가 멈추질 않으니까. 아빠 장례식에서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는 엄말 보며 다짐했어. 이제 내가 아빠 대신이라고.” 언뜻 대상화된 여성의 변화한 재현처럼 보이는 가족의 역할 분배는 각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유토피아적 이미지의 실현과 맞닿아 있음을 드러낸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페니미즘적 구성은 일반 여성영화의 표면을 딛고 진짜 심정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장치가 된다.
기존 사례를 넘어서는 평범한 상황에의 잠재력, 우리가 스크린을 향해 던지는 질문은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까?”가 아니라, “내가 설마 하던 그 일이 진짜로 일어나게 될까?”에 집중된다. 상황은 익숙한데, 의도가 이중적이다. 의미를 지닌 사건에 대한 열린 기대감, 어쩌면 위화감을 주는 몇몇 부분을 통해 영화는 관객에게 인식되어야 하는 것을 구분한다. 몇 가지 예상 밖의 갈림길을 발견한다. 먼저, 필례(남권아)의 존재이다. 어떤 면에서 그녀는 존재 자체로 의아하다. 옥실은 자신이 계획한 범행의 실행을 남의 손에 떠넘기는데, 필례는 이를 직업이라 여기며 기꺼이 행동한다. 마치 시체를 받는 산파가 된 듯, 전문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필례는 카리스마 넘치는 아들 둘과 함께 옥실의 나쁜 의뢰를 실천한다. 묘한 범죄의 협력자인 이 인물의 행위는 위기를 공유한 애정으로만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금전적 보상은 충분하지 않으며, 의뢰에 대한 마무리도 완벽하지 않다. 다만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였기에, 그녀의 역할은 감동적이다. 다음으로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인식이다. 영화 속 가장의 죽음은 낙하를 통해 이뤄진다. 막내가 생을 마감한 자리에의 간극을 메우길 포기한 채, 아버지란 인물은 삶의 끝을 보여주었다. 비견컨대 <나쁜 피>(1986)의 이야기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작되듯, <경주기행>에 나타난 가장의 죽음은 단순한 플롯의 장치가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의 정체성을 구축한다. 그 죽음으로 인해 어머니의 결정은 예상치 못한 목적을 가지고 가족 전체의 지향점을 변화시킨다. 셋째, 출소 이후 범인의 행동 역시 주목할 만하다. 흥신소에 연락해서 자신이 해한 가족의 소재를 지속적으로 파악하는 이 인물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 부차적이다. 남겨진 여성들에 겁먹은 그의 외양, 이는 실제로 그가 지닌 캐릭터에 걸맞지 않다.
이제 장주의 딸 윤지(김세아)를 떠올린다. 아이는 가족여행에 부수적이거나 관습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예기치 않은 상태에서 소녀는 무서운 행동을 목격한다. 어른들은 이 아이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아이의 주관적 숏도 영화는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공인 어머니를 중심으로 진짜 영화가 대립시키고자 하는 것은 예상 밖의 것일 수 있다. 범인을 향한 옥실의 돌진, 그렇지만 그녀의 후손은 방치되어 있다. 강한 의지와 비범한 관습의 부재, 그리고 규범에 대한 거부. 그리하여 이 영화의 결말부는 기대하지 않은 계승을 향해 나아간다. 완전히 기울어지거나 뒤집힌 피아타의 형상을 보이면서 말이다. 아이를 잃은 어머니는 자신의 비통함을 직시하게 만들고자 사건을 일으켰다. 사건 이후의 정적, 그녀는 그동안 감추었던 연민을 표한다. 이제 모든 등장인물은 예측 가능한 상황에 놓이지만, 어머니 옥실만은 예외이다. 산에 올라 스스로의 허리를 범죄와 묶는 행동, 그 장면을 전후로 공감과도 같은 삶의 신비로움이 관객에게 전달된다. 죽음과 탄생이라는 낙하와 상승의 교차점, 영화 소재의 겉면이 진짜 감추고 있던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목표는 ‘구원’일 것이다. 언제나 사람들은 자신을 가두어놓은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애쓰지만, 죽음은 그 무엇도 되돌리지 못한다.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다만 과정 자체가 우리 몫이다.
사회의 부조리를 대변하는 살해범의 얼굴, 어쩌면 <경주기행>은 시대의 병폐에 조금 더 귀 기울여야 한다는 직설적인 유머를 전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사회적 결정론과 불행한 만남의 시작, 일상적이고 거친 현실의 표면, 영화가 전달하는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모성의 성스러움을 바라본다. 죽음 너머에 있는 삶의 비밀, 일상의 사유는 이 과정에서 조금 더 경건해져야 한다. 사회의 잔혹함이 품고 있는 비통함과 성스러움의 사이, 어머니가 상징하는 우리 삶의 중요성을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