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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 헤매는 청춘에 대한 영화,<8마일>
황혜림 2003-02-18

■ Story

1995년 디트로이트. ‘버니 래빗’으로 불리는 지미 스미스 주니어(에미넴)는 래퍼를 꿈꾸는 백인 청년이다. 흑인 거주지의 클럽 ‘셸터’에서 열리는 랩 배틀에 나간 날, 상대의 래핑에 한마디 반격도 못한 채 참패하고 만 지미. 랩 배틀의 사회자인 퓨쳐(메키 파이퍼) 등 그의 재능을 아는 친구들은 그를 독려하지만, 지미에게 무대는 아직 부담스럽기만 하다. 우승자 파파독의 패거리들은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오고, 어린 애인과 지내는 철없는 어머니(킴 베이싱어), 그 어머니의 트레일러에 얹혀 살면서 철강 공장에 다녀야 하는 현실도 그의 어깨를 짓누른다.

■ Review

암전 화면이 채 밝아지기도 전에 경쾌한 사운드가 한 박자 먼저 청각을 두드린다. ‘쿵쿵짝’ 울리는 비트에 맞춰 화장실 거울 앞에서 섀도복싱을 하듯 래퍼 특유의 손짓을 연습하는 에미넴의 창백한 얼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심하게 훑어내리는 카메라. 긴장 때문에 토악질을 한 뒤 흑인 관중들로 가득 찬 무대에 오른 지미를 좇는 오프닝부터, 은 음악과 영상이 같은 심장 박동수로 뛰는 영화다. 90년대 중반 이후 청년문화의 주류로 떠오른 랩음악과, 랩음악이 낙이자 희망인 디트로이트 밑바닥 청춘군상의 풍경. 이 두 요소가 절묘한 화음을 이루는 가운데, 비루한 일상에서 자신의 꿈을 찾고자 애쓰는 한 청년의 고달픈 성장기를 들려준다.

지미의 인생은 좀처럼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임신한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집도 없이 트레일러에서 사는 어머니에게 돌아가지만, 제 또래인 어머니의 애인에게 구박받는 처지. 트레일러의 임대료도 내지 못해 쫓겨날 위기에, 애인의 보험금을 기대하며 돈 벌 생각도 않던 어머니까지 버림받자, 공장 잔업을 자청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할 만큼 빈곤한 노동자에 불과한 게 그의 현실이다. 어린 여동생 릴리와 언제나 든든하게 그의 편이 되어주는 퓨쳐, 넉넉한 덩치만큼 낙천적인 솔, 급진적인 철학자 같은 DJ 이즈 등 불완전한 가족을 대신하는 흑인 친구들과 어울려 꾸는 래퍼의 꿈만이 그나마 숨통을 틔워줄 뿐.

하지만 백인인 지미는 흑인들의 세계인 셸터와 랩음악 신에서 “흰둥이”로 역차별을 면치 못한다. 백인들의 사회에서 흑인들이 온전한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했던 것처럼, 흑인문화에 속하는 지미와 친구들의 그룹 ‘3 1/3’에서 ‘1/3’은 백인 래퍼인 지미. 지미에 대한 차별을 의도한 게 아니라 디트로이트시의 지역번호 ‘313’에서 따온 이름이지만, 중의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다. 영화에 제목을 제공한 ‘8마일 로드’는 디트로이트에 실재하는 거리이며 지역번호 ‘313’인 시내의 흑인 거주지와 근교의 백인 거주지를 가르는 상징적인 경계선. 감독인 커티스 핸슨의 말을 빌리자면 “정통 힙합과 사이비 힙합의 경계”, 또는 “누구나 인생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가고자 하는 길 혹은 원하는 것과 현실의 경계”이기도 하다.

그래서 <8마일>은 흑백의 문화적 경계를 넘어 래퍼를 꿈꾸는 백인 청년을 다룬 음악영화이자, 암울한 현실과 모호한 꿈 사이에서 제 길을 찾아 헤매는 청춘에 대한 영화다. 너무 무겁게 흐르지도, 가벼워지지도 않으면서 드라마의 탄력을 유지하는 핸슨의 균형 감각은 얄미울 정도. 랩음악을 정면으로 다루진 않았지만 흑인들의 거리 문화인 힙합에 바탕한 <사회에의 위협> <벨리> 같은 영화에서 필연처럼 등장하는 갱들의 총격, 폭력의 남용을, <8마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페인트 총알로 장난을 치긴 해도, 정작 지미의 친구 체다 밥이 진짜 총을 꺼냈을 때는 다들 공포에 떠는 식이다. <8마일>은 힙합의 역동적인 리듬과 소외된 청춘들의 독설을 발산하되, 결코 어떤 선을 넘지 않는다. 흑인 청중에게 얕보이지 않을 만큼 맹렬하면서도, 백인 청중에게도 호소력 있는 가사와 래핑으로 최고의 힙합스타에 등극한 에미넴의 음악처럼, 폭넓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흑인문화의 선이랄까.

지미의 인생은 좀처럼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불완전한 가족을 대신하는 흑인 친구들과 어울려 꾸는 래퍼의 꿈만이 그나마 숨통을 틔워줄 뿐이다.

어쨌든 “DJ, 판 돌려!” 하는 퓨쳐의 큐 사인을 신호로 셸터의 무대에서, 거리에서 틈틈이 벌어지는 랩 대결만큼은 여느 라이브 못지 않게 생생하다. “랩 배틀에서 지는 것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에미넴의 말처럼 불안한 청춘들의 절실한 욕망이 투사된 랩 배틀을, 핸슨은 마치 팽팽한 권투시합처럼 포착해냈다. 주먹만 쓰지 않을 뿐,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각운을 딱딱 맞춰가며 적나라한 독설을 치고받는 래핑장면들은 <8마일>의 백미. “이봐, 너에게 한번의 시도, 한번의 기회가 있다면/ 항상 원했던 것을 잡을 수 있는 한순간/ 그걸 붙잡겠어 아니면 그냥 지나가도록 내버려두겠어?” 하고 시작되는 <Lose Yourself>는 영화에 쓰인 랩 중에서도 압권이다. 영화 틈틈이 랩 가사를 끼적대던 지미가 파파독과의 결전을 마친 뒤 엔딩에 흐르는 이 곡은, 자신의 현실에 대한 분노에 찬 고백이자 <8마일>의 정서를 대변하는 주제가이기도 하다.

멀게는 엘비스 프레슬리부터 가깝게는 브리트니 스피어스까지, 영화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다수의 팝스타들과 달리 <8마일>에서 에미넴은 확실한 존재감을 지닌다. 이 한편의 영화로 그가 배우의 자질을 가졌다고 속단할 순 없지만, 자신에게 맞는 옷을 고른 것만은 확실하다. 하긴 불우한 가정, 디트로이트의 클럽에서 랩 배틀을 벌이며 래퍼로 인정받기 위해 애쓴 경험 등 <8마일>의 상당 부분은 “백인쓰레기”였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에미넴 자신의 전사와 닮아 있다. 애초 에미넴을 염두에 두고 썼다는 스콧 실버의 각본은, 에미넴이 직접 맡은 음악에서 더욱 진솔한 힘을 얻는다. 랩음악과 영화의 내러티브와 리듬을 뛰어난 DJ처럼 자유자재로 뒤섞는 커티스 핸슨의 연출은, <요람을 흔드는 손> 등의 스릴러와 <LA컨피덴셜> <원더 보이즈>를 거쳐온 그가 장르에 얽매이지 않는 이야기꾼임을 다시 한번 입증해 보였다. 황혜림 blauex@hani.co.kr

영화에 제목을 제공한 `8마일 로드`는 디트로이트 시내의 흑인 거주지와 근교의 백인 거주지를 가르는 상징적인 경계선, 감독인 커티스 핸슨의 말을 빌리면 "누구나 인생에서 맞딱드리게 되는, 가고자 하는 길 혹은 원하는 것과 현실의 경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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