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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주술사,비열한 거리의 창세기를 휘갈기다 <갱스 오브 뉴욕>

1860년대 뉴욕의 파이브 포인츠. 아일랜드계 이주민들은 뉴욕의 토박이들과 생존을 건 전투를 벌인다. 아일랜드계의 우두머리 프리스트 발론은 이 전투에서 도살자 빌 더 부처(대니얼 데이 루이스)에게 살해당한다. 이후, 16년간이나 소년원에 감금되어 지내던 아들 암스테르담 발론(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은 아버지의 복수를 다짐하며, 빌 더 부처의 수하로 들어간다. 이곳에서 암스테르담은 제니(카메론 디아즈)를 만나게 되고, 그녀가 빌 더 부처의 정부임을 알게 된다. 암스테르담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복수를 감행한다.

“이 비열한 거리를 걸어가야만 하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비열하지도 타락하지도 두려움에 떨지도 않는다.” 제이 콕스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간단한 살인기술>에 적혀 있는 이 문구의 일부인 ‘비열한 거리’를 마틴 스코시즈의 영화제목으로 추천해주었고, 그것이 곧장 영화의 제목이 되었다. 30여년이 흘렀고, 그동안 <순수의 시대>를 같이하기도 했던, 제이 콕스와 스코시즈는 평생의 숙원인 <갱스 오브 뉴욕>을 완성할 수 있었다.

스코시즈를 작가라고 부를 때, 그리고 작가란 동일한 중심의 이야기를 매번 다른 서사와 이미지로 주석을 달아 나가거나, 판본을 바꾸거나, 혹은 재창조해나가는 사람들이라는 점에 동의할 때, 그는 거의 언제나 이 <비열한 거리>의 변주곡을 들려주고 있는 셈이다.

마틴 스코시즈가 <갱스 오브 뉴욕>에서 다루려 했던 것을 그냥 점잖게 미국의 어두운 역사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여전히 갱들이고 갱들의 역사이다. 심지어 그는 <예수의 마지막 유혹>에서 예수와 그 사도들을 갱단처럼 그려냈고, <순수의 시대>에서는 상류층의 사회체계를 뒤집힌 갱단의 거울 이미지로 보여주기도 했다. 이 영화 속에서 갱들의 역사가 뉴욕의 역사처럼 보일 수 있거나 그 거시성의 역사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은 뉴욕의 초창기 역사 자체가 ‘깡패스러움’을 동일하게 함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갱스’와 ‘뉴욕’의 앞뒷자의 위치를 바꾸어도 이 영화는 여전히 같은 의미에 있게 된다. 그런데 스코시즈는 여기에 고전적인 복수극을 끼워넣어 서사의 방향을 뒤틀어놓는다. 그럼으로써 결국 아버지의 복수를 감행하는 암스테르담과 그 상대자가 되는 ‘도살자’ 빌 더 부처는 마치 그들의 세계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대처하지 못하는 시대착오자적 인물들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영화의 후반에 이를 때까지 서사의 주변에만 붙어 폭발의 긴장을 예고하던 거대한 역사가 끝내는 이들의 시대착오적인 미시적 역사를 뒤엎어버린다. 칼을 들고, 삽을 든, 갱들은, 깡패들은, 떨어지는 포탄의 하얀 재를 고스란히 뒤집어쓰는 수밖에 없다.

`갱들의 뉴욕`이라고 제목을 바꿔도 무방할 정도의 강렬한 전투신으로 영화는 시작되지만, 그 폭력을 바라보는 스코시즈의 눈은 혐오로 가득차 있다. 그래서 그는 인물들을 비웃고, 때로는 파멸의 끝까지 몰아 넣는다.

이런 식으로 스코시즈의 영화 속에는 언제나 패배에 대한 자의식과 자기 조롱이 섞여 있다. 이 영화는 그것을 마지막에 배치하여 역전의 시너지를 가지려는 것처럼 보인다(이 점은 때로 <카지노>에서처럼 죽음의 결과에서 거슬러올라가는 플래시백의 형식으로도 나타난다). 다 같이 바보가 되어보는 게임을 해보는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의 이 해프닝만이 <갱스 오브 뉴욕>의 모든 것은 아니다. 전략적으로 기술된 역사적 아이러니의 귀결에도 불구하고 <갱스 오브 뉴욕>은 첫 장면의 전투신에서 보여준 폭력적인 피의 신들림을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게 한다. 마지막 싱거운 전투가 아무리 엄숙하게 첫 장면의 이미지를 잊어버리도록 교육을 해도, 그 잔상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관객을 영화적인 엑스터시로 끌고 들어가는 것으로 치자면 스코시즈만한 감독이 또 누가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의 주술에 걸려 끌려가다 어느 순간 갑자기 정신을 차려보면 언제나 무언가 남는 비참함이 있다. 항상 무언가가 물려 있다.

<갱스 오브 뉴욕>이 역사를 다루는 듯하면서도, 한편으론 폭력에서 희열을 만끽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갱들의 삶과 역사를 ‘매혹’과 ‘혐오’라는 두 고리로 붙들고 있는 스코시즈 자신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이중성이다. 스코시즈의 영화에는 폭력에 대한 매혹이 떠나지 않고 있다. <분노의 주먹>의 피가 튀는 제이크 라모타의 얼굴에서조차 매혹이 남는다. 그 순간 제이크 라모타가 서 있는 사각의 링은 비열한 거리이며, 그는 거리를 헤매는 갱들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그리고 그것을 스코시즈는 다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영화적 이미지로 창조해낸다. <갱스 오브 뉴욕>의 첫 장면이 쉽게 잊혀지지 않는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매혹을 폭력에서 느끼고, 폭력을 영화적으로 승화시키는 주술 속에서 관객은 무언가의 엑스터시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암스테르담과 제니는 쉽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지 못한다. 드디어 함께 춤추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두 사람.

그러나 한편으로, 그 폭력의 세계를 바라보는 스코시즈의 눈은 혐오에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인물들을 비웃고, 때로는 파멸의 끝에까지 몰아넣는다. 결국, 세상을 구하기 위해 겁없이 권총을 뽑아들었던 ‘택시 드라이버’의 삶은 세상의 움직임을 모르고 칼과 곡괭이를 든 파이브 포인츠의 갱들 어딘가에 끼어 있는 것이다. 스코시즈는 폭력의 이미지를 매혹으로 여기면서도, 조소와 파멸, 또는 착각이라는 서사의 귀결을 통해 그것을 철학적으로 경계한다. 그러면서 갱의 위치는 예수의 위치와 동일해지기도 하고, 예수는 갱이 되기도 한다. 또한 갱들의 역사는 뉴욕의 역사의 반영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 철학적인 경계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종교성이다. 폭력에 대한 매혹이 영화적으로 창조되고 있다면, 그 폭력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철학적으로 종교화된다. 갱들을 하층계급과 동일시하고 있으면서도 결코 그들의 저항의 역사를 재현하지 않는 것은 스코시즈가 그런 종교적 순응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비유를 하자면, 스코시즈는 언제나 관객을 홀려 황홀경 속에 목을 매게 한다. 그러나 그 순간 육체가 죽어간다는 사실도 잊지 않고 깨닫게 해준다. 하지만, 그는 때때로 교수집행인처럼 담담하게 반복한다. 그리고 스스로도 ‘교수집행인 또한 죽는다’는 사실에 순응한다. 착각 속에 빠진 ‘언더그라운드’의 역사라고도 부를 수 있는 <갱스 오브 뉴욕>을 마틴 스코시즈는 마치 그런 섬뜩한 매혹과 혐오와 순응의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다.

프로덕션 디자인지옥도를 상상하라

명감독 마틴 스코시즈, 조명의 마술사 마이클 발하우스, 메소드 연기의 달인 대니얼 데이 루이스, 의상의 귀재 샌디 파월을 거론하고도 남는 사람은 또 있다. <갱스 오브 뉴욕>은 1860년대 뉴욕 한 귀퉁이, 파이브 포인츠 거리의 모습을 실감있게 재현해내어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다. 그 수훈장은 바로 프로덕션디자이너 단테 페레티이다.

영화의 첫 장면, 전투에 나서는 아일랜드 이민자들의 집단 생활지인 양조장은 단테 페레티의 말처럼 마치 레미제라블의 지옥도처럼 보인다. 지하로 뻗어 있는 동굴들, 빽빽하게 들어찬 사람들과 칸막이로 나누어져 있는 방들이 뉴욕의 빈민가에서 살고 있는 인물들의 생활상을 감도 높은 상상력으로 표현하면서 첫 장면부터 관객의 시선을 묶어둔다. 또, 주인공 암스테르담과 제니, 빌 더 부처의 갈등이 폭발하는 ‘차이니즈 파라다이스’ 극장과 아일랜드계 이주민과 토박이 뉴요커 사이의 전투가 벌어지는 파라다이스 공원, 그 공원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상점과 교회들이 고증과 그에 덧붙여진 상상력으로 그 시대의 음습한 뉴욕 뒷골목을 옮겨왔다.

파졸리니의 영화 <메데아>, <켄터베리 이야기>, 그리고 테리 길리엄의 <바론의 대모험>, 장 자크 아노의 <장미의 이름으로> 등의 고증과 상상이 조화를 이루는 역사극에 주로 참여한 단테 페레티는 <갱스 오브 뉴욕>의 어두우면서도 신화적인 미국 초창기의 역사 재현에 상상력의 힘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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