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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난 시간의 파편들 틈으로 솟아오르는 삶, <21그램>

조각난 시간의 파편들 틈으로 서서히 솟아오르는 삶, 그 삶 속에서 펼쳐지는 죄의식과 복수심간의 숨바꼭질. ‘가벼운’ 제목과는 달리 지극히 ‘무겁게’ 삶을 살아가는 세 인물들에 관한 비극.

어쩌면 한숨처럼 가벼운 것일지도 모르는 영혼, 이것을 천근의 납덩이처럼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두 번째 장편영화 <21그램>의 세 인물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교통사고로 남편과 딸을 잃은 여인 크리스티나(나오미 왓츠), 그녀의 가족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전과자 잭(베니치오 델 토로), 그리고 크리스티나 남편의 심장을 이식받아 가까스로 생명을 잇게 된 폴(숀 펜)에게 있어서 삶은 그저 무심히 계속되면서 지옥도를 펼쳐 보일 뿐인 악몽에 지나지 않는다. 복수, 죄의식, 그리고 운명이라고 하는 낡고 오래된 테마는 이들의 주변을 맴돌면서 점점 형체를 갖추고 육중해지는데, 그러한 테마를 탁월한 솜씨로 설득력 있게 빚어내는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연출력은 고작 두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을 뿐인 신인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미스틱 리버>(2003)의 그것보다는 반쯤 잦아든 듯한 연기를 보여주는 숀 펜, 점점 두터워지는 죄의식의 무게를 이겨내기 못하고 파멸해가는 인물인 잭을 연기한 베니치오 델 토로, 그리고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 후반부에서 스스로가 맡았던 역할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하는 나오미 왓츠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21그램>은 충분히 기대에 값한다. 또한 오랜만에 적역을 맡은 듯한 샤를롯 갱스부르 - 아직까지도 클로드 밀러의 <귀여운 반항아>(1985)와 <귀여운 여도적>(1988), 그리고 아녜스 바르다의 <아무도 모르게>(1987) 같은 영화에서의 연기로 기억되는- 의 모습을 확인하는 즐거움도 놓칠 수 없다.

사실 <21그램>의 줄거리를 요약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우선 이 영화가 서사적으로는 스토리의 처음, 중간, 끝에서 동시에 시작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플롯의 논리를 따르기보다는 각각의 신(scene)이 간직하고 있는 고유의 정서들을 충돌, 대조, 대비, 융합시킴으로써 보는 이를 유인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 여기서 부서진 시간의 조각들은 별다른 이유없이 우리에게 툭툭 던져지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도대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사건들은 과거인가 현재인가 혹은 미래인가?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결코 서두르는 법 없이 관객을 조바심에 몸부림치게 만들면서 비극의 형상을 천천히 완성해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그램>은 (비단 테마뿐만 아니라 구성에서도) 매우 고전적인 영화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모든 시간의 조각들은 단 하나의 빈틈도 없는 퍼즐의 일부임이 밝혀진다. <21그램>의 모든 이미지들은 하나의 현재, 하나의 중심을 설명하기 위해 구성된 거대한 플래시백, 즉 회상-이미지일 뿐이다. 이 점에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21그램>은 가히 알랭 레네적인 복수극이라 할 만한 스티븐 소더버그의 걸작 <라이미>(1999)만큼 멀리까지 나아가진 않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21그램>에 육중한 운명의 힘을 끌어들이는 몫을 맡은 이는 베니치오 델 토로가 연기한 잭일 것이다. 그는 죄악으로 얼룩진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이 거듭나기 위해 종교를 선택하지만, 결국 강박적인 신앙이 불러들이는 어마어마한 무게의 죄의식으로 인해 자멸하기에 이른다. 그로 인해 <21그램>은 일그러진 <욥기>가, 끝내 시험에서 패배하고 마는 비천한 영웅의 비극이 될 수 있었다. 신을 향한 그의 배신감 내지는 증오는 급기야 (정확히 니체적 도식을 따라) 자신의 내면을 향한 원한으로 뒤바뀌고, 이처럼 외부에서 내부로 방향을 돌린 원한은 죄의식을 만들어낸다. 이때 토마스 만의 다음과 같은 통찰은 잭이라는 인물의 심리를 정확히 설명한다. “만사를 행하는 건 주님인데, 그분은 그 일에 대한 양심의 가책은 우리 가슴에 심어놓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 앞에서 책임을 느끼게 된다. 그건 그분을 대신한 책임감이다…. 사실 희생제물에게 희생보다 더 적절한 보상이 어디 있겠는가.”(<요셉과 그 형제들>) 물론 자신의 생명이 타인의 죽음으로 인해 가까스로 연장된 것임을 참지 못하고 방황하는 폴 역시 죄책감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다. 결국 <21그램>은 인물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죄의식 내지는 부채감이 마침내 (크리스티나의) 복수심과 만나 비극을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하는 영화가 된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끊임없이 중얼거린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는 것”이라고, 아무리 무시무시하고 견딜 수 없어도 흘러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때 이른바 영혼의 무게라고 하는 ‘21그램’은, 그 가벼움은 오직 잔인하기 짝이 없는 신의 저울에서만 가능한 삶의 무게일 것이다. 그가 인간의 육신에 불어넣은 한숨이 결코 언제나 축복이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고전적인 주제를 정색하고 우리에게 들려주는 영화, 이토록 ‘낡은’ 주제를 기어이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만들고자 하는 영화, 그것이 바로 <21그램>이다.

:: 영혼의 질량 측정에 관련된 실험들

21그램의 정체-영혼인가, 공기인가?

영혼의 무게, 아니 정확히 말해 영혼의 질량은 과연 얼마일까? ‘비물질적인’ 존재로 간주되는 영혼의 물리적 질량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 혹은 영혼은 (예컨대 광자처럼) 질량이 없는 소립자들로 구성된 것은 아닐까? 이런 것들은 영화 <21그램>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물음도 아니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부질없는 질문일 수도 있지만, 여하간 영혼의 존재- 바꿔 말하면 사후의 세계- 에 대한 강박적인 호기심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라면 꼭 그렇지만도 않을 성싶다. 실제로 영혼의 질량을 측정함으로써 영혼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과학적’ 실험이 19세기 이후 발달하기 시작한 측정도구들에 힘입어 몇 차례 수행된 바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선구적이고 유명한 것으로는 맥두걸 박사의 실험(1870)을 꼽을 수 있는데, 그는 자신의 실험에 동의한 죽어가는 환자들을 직접 고안한 저울 위에 눕혀놓고 임종의 순간에 얼마만큼의 질량이 감소되는가를 측정했다. 그 결과 20~30g 정도의 질량 감소가 측정되었다고 하는데, 그는 자신의 실험결과가 누구에 의해서라도 반복적으로 얻어질 수 있는 합리적인 절차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21그램> 말미에 숀 펜은 영혼의 무게가 ‘21그램’이라는 말을 우리에게 들려주는데 그것은 바로 맥두걸 박사의 실험으로부터 연유한 것이다. 물론 맥두걸의 실험에 대한 의문이 없었을 리 없다. 1915년 트위닝이라는 이는 쥐를 대상으로 맥두걸의 실험을 다시 수행했는데, 그는 그 결과 쥐가 죽는 순간 분명 질량 감소가 있었지만 죽어가는 쥐를 잘 봉인된 유리병 안에 놓고 측정한 경우에는 전혀 질량 감소가 없었다고 발표했다. 트위닝은 자신의 실험이 맥두걸의 실험에서 나타난 질량 감소분이라는 것이 실은 임종시에 체내에서 빠져나가는 공기의 질량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양을 대상으로 한 최근의 실험(2001)에서는 죽는 순간에 아주 일시적인 질량 증가가 나타났음이 보고되었는데, 그 원인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죽은 양의 몸을 빠져나가면서 일시적인 반작용을 일으킨 것이라는(즉 어쩌면 영혼 같은 것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이외에도 영혼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분자생물학에 양자물리학의 지식까지 동원해 여러 해석을 내놓는 사람들이 있어왔지만 아직은 그저 주장에 그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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