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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처럼 흐리지만 진실된, 마크 러팔로
박혜명 2004-11-11

마크 러팔로는, 한번 보면 잊혀질 얼굴이다. 주위 사람들에게 ‘저는 콜린 파렐, 베니치오 델 토로, 마크 러팔로 등을 좋아해요’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돌아올 반응은 응, 너는 라틴 피가 흐르는 느끼한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겠지만 러팔로가 나머지 둘과 다른 점은 지나치게 평범한, 흐린 안개 같은 인상을 가졌단 사실이다. 올해 국내 개봉한 <인 더 컷> <콜래트럴> <완벽한 그녀에게 딱 한 가지 없는 것>이 모두 마크 러팔로의 출연작이란 것도 눈썰미가 예민한 사람들이나 알아차릴 일이다. <인 더 컷>에선 축축한 도시 속에서 부스러질 것 같은 여인 멕 라이언과 얽혀드는 형사 말로이 역으로, <콜래트럴>에선 택시운전사 제이미 폭스의 결백을 유일하게 감지한 형사 패닝으로, <완벽한 그녀에게…>에선 잘 나가는 패션지 에디터 제니퍼 가너를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순진한 사진작가 매트 플램하프로 출연했다.

바로 그 안개 같은 인상 때문이었을까. 너른 오대호 곁의 위스콘신에서 태어난 마크 러팔로는 캘리포니아로 이사간 뒤 10대 시절을, 그리고 대학 대신 선택한 스텔라 애들러 아카데미 학생 시절을, 수천번의 오디션과 함께 보냈다. 로버트 드 니로와 크리스 쿠퍼가 졸업했다는 그 학교에서 베니치오 델 토로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스타였지만, 러팔로는 화장실 청소 따위의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버는 조용한 학생이었다. 그러고도 3년 코스를 6년 만에 졸업할 만큼 천성적으로 스스로를 닦달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오디션장에서 사람들은 “니 얼굴은 LA 필이 아니라 뉴욕 필이야”라고 말했다. 그 말이 마음에 두고두고 쌓였던 건지, 러팔로는 정말로 뉴욕행 짐을 꾸렸다.

그는 친구와 함께 오르페우스 시어터 컴퍼니라는 작은 극단을 만들었다. 10년 가까이 30여편의 연극을 무대 위로 상납했는데, 공연 한번 보러오마고 약속한 캐스팅 디렉터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스무명 남짓한 관객의 절반은 그의 친구들이었다. 혼자 각본을 쓰고, 무대를 만들고, 연출을 하고, 연기를 했다. 수지가 맞지 않는 일이니 바텐더를 주부업 삼아 도어맨, 요리사, 페인트공, 심지어 땅 파고 나무 심어주는 일을 겸업했다. 그 와중에 다시 800번이 넘는 오디션을 치렀다. 시답잖은 공포영화에나 간간이 얼굴 내미는 소속 배우가 못마땅해 에이전시도 그를 버렸다. 저보다 예쁜 얼굴을 갖고 배우를 꿈꾸는 웨이터들이 넘쳐나는 도시에서, 마크 러팔로의 구깃구깃한 인생은 케네스 로너갠의 희곡 <이것이 우리의 청춘>(This Is Our Youth)을 만나고서 다려지기 시작했다.

유머가 뭔지 아는 게으른 청춘. 허무주의자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하는 길거리 폐인의 열아홉살짜리 인생. <이것이 우리의 청춘>에서 그가 보여준 연기는 뉴욕 비평가들에게 ‘젊은 말론 브랜도!’라는 호들갑스런 칭찬을 자아냈고 러팔로는 로너갠의 데뷔작 <유 캔 카운트 온 미>의 주연이 됐다. 로버트 레드퍼드와 <라스트 캐슬>을, 니콜라스 케이지와 <윈드토커>를 찍었다. 허구한 날 거절당하고 인정 못 받던 시절이여, 안녕. 이제야 뭔가 풀리는구나, 했을 러팔로는 M. 나이트 샤말란의 <싸인> 출연이 확정되고 한 달 뒤에 황당하게도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뇌종양 걸리는 꿈을 꿨는데, 진짜 같았다. 깨보니 진짜더군.” 자칫하면 의사의 메스가 정말 중요한 부분을 잘라내갈 수도 있었던 10시간의 수술. 후유증으로 부분 마비를 겪었고, 회복하는 데만 6개월이 걸렸고, 몸무게는 40파운드가 줄었다. <싸인>의 역할은 와킨 피닉스에게로 갔다.

죽음과 삶을 오갔으나, 겨우 잡은 성공의 줄을 놓칠 뻔했으나, 마크 러팔로는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와의 인터뷰 약속도 잊어먹고 친구들의 가족들과 아내와 3살짜리 아들과 말리부의 자기 집에서 정신없이 놀 만큼 서러운 과거에도 야물게 다져지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의 삶은 떡반죽처럼 무르고, 그의 인상은 한랭과 온난, 두 종류의 전선에서 만들어지는 안개 같다. <인 더 컷> <콜래트럴>에서처럼 차가워졌다가 <유 캔 카운트 온 미> <완벽한…>에서처럼 따뜻해졌다가. 호수의 정경은 안개가 다 걷힌 뒤에야 온전해지던데, 러팔로의 안개는 아직 물가에 머물러 있다. 뒤늦게 욕망의 출구를 찾은 이 배우의 온전한 정경을, 마이클 만 감독은 “대니얼 데이 루이스와 하비에르 바르뎀이 가진, 예술적으로 완벽한 무결함”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사진제공 GAM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