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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슬프고 외로운 영혼에게, <릴리 슈슈의 모든 것>
문석 2005-06-21

이 영화가 시작되기 직전, 극장의 불이 꺼지면 당신은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해야 한다. 사이버 공간을 상징하는 화면이 마디마디 등장해 혼란스럽기 때문도 아니고, ‘에테르’, ‘세로토닌’ 같은 복잡한 개념에 시달려야 하기 때문도 아니다. 당신의 마음을 고도 제로의 절대 평정 상태에 놓아야 하는 이유는 이 영화가 당신의 마음을 우울함이 꽉 찬 작은 방으로 몰아넣을 것이기 때문이고, 때때로 이상기류를 만난 종이연처럼 돌연 추락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배경은 이와이 순지 감독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학교다. 주인공 유이치의 중학교 생활은 끔찍하다. 한밤중에 동급생에게 불려나가 그들 앞에서 자위를 하거나 마음에도 내키지 않는 음반을 왕창 가방에 쑤셔넣고 줄행랑치는 도둑질을 해야 하며 원조교제를 하고 있는 여학생의 일거수일투족도 감시해야 한다. 심지어 짝사랑하는 여학생이 성폭행당하는 것을 방조해야 하니 그가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지옥이다. 이 지옥의 꼭대기에는 한때 유이치의 절친한 친구였던 호시노가 있다. 여름 방학 때 오키나와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 이후 호시노는 돌변했다. 악의 화신이 됐다. 호시노가 돌변한 게 아버지의 사업이 망했기 때문인지, 오키나와에 영혼을 놓고 왔기 때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인류최후의 날은 1999년 9월1일 신학기. 그날을 경계로 세계는 잿빛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뤄질 수 있건, 아니건 간에 무언가 꿈을 갖고 있던 <스왈로우테일…> 속 주인공들과 달리 <릴리 슈슈…>의 주인공들에게 남은 거라곤 고통과 슬픔, 절망과 허무밖에 없다. 그들이 아버지뻘 아저씨들에게 몸을 팔고, 여자아이들의 질투와 남자아이들의 폭력성 때문에 성폭행을 당하고, 친구의 배에 칼을 찌르고, 슬픔이 북받쳐 서러운 눈물을 흘리는 사이사이에 간혹 찾아오는 아름다움과 기쁨, 용기와 행복은 찰나에 불과하다.

결국, 아이들이 유일하게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곳은 가수 릴리 슈슈의 음악뿐이다. 그들은 오로지 릴리 슈슈의 음악 안에서, 그 음악이 갖고 있는 ‘에테르’를 통해서 자유를 얻고 정화될 수 있다. 심지어 가해자로 보이는 아이까지도 상처를 공기 속으로 날려버린다. 이들 가해자와 피해자는 릴리 슈슈를 논하는 사이버 공간에서만큼은 한명의 ‘릴리 필리아’로 교류할 수 있다. 그것이 “나 여기 있어, 그렇게 외치고 싶어서 이 글을 적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차원에 불과할지라도.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이와이 순지의 모든 것’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그의 영화가 가진 요소를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작품이다. <언두>의 고도로 정제된 영상과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의 폭발적인 흐름, <러브레터>의 습기어린 감성과 <피크닉>의 분방한 공기가, 각각 넘치는 상태에서 서로 어우러지고 충돌한다. 이와이 순지가 “이 영화가 유작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때의 복잡한 심경을 미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 또한 ‘유작이었으면 좋’을 만큼 힘들었을 것이다. 애초 이와이 순지는 1999년 1월 홍콩에서 왕정문의 콘서트를 보며 감동을 받고 이 영화를 구상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한 소년의 시점으로 왕정문을 보고 있었다. 한 소년, 그것은 마침 막 쓰기 시작했던 시나리오의 주인공이었다.” 이 작품은 애초 에드워드 양, 관금붕 감독과 함께 추진되던 Y2K 프로젝트의 일환이었지만, “스스로 이야기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고 판단해 크랭크인 직전 기획을 엎어버렸다. 이 와중에 음악감독 고바야시 다케시에 의해 ‘릴리 슈슈’의 음악이 만들어졌고, 이에 힘을 얻은 이와이는 새로운 기획을 만들게 된다. 2000년 4월 인터넷 인터랙티브 소설로 탈바꿈한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많은 참여 속에서 연재됐고, 마침내 고단한 시나리오 작업을 거쳐 영화로 만들어지게 됐다.

<릴리 슈슈…>가 전하는 감정은 유난히 진하다. 그건 이와이 순지가 음악을 매우 효과적인 감정 증폭기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고통은 릴리 슈슈의 음악과 드뷔시의 <월광> <아라베스크>의 리듬만큼이나 서서히 스크린 밖으로 전이돼 보는 이의 마음에 문신처럼 고스란히 새겨진다. 이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오기 위해서 당신은 이 영화가 끝난 뒤에도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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