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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하의 애버뉴C] 30th street / 알프레도 아저씨, 여전히 시네마천국에 계신가요?
글·사진 백은하( <매거진t> 편집장) 2005-07-27

동네극장, 그리고 '토토' 의 지독히 감상적인 여행기운

여름의 맨하탄에서 즐겁게 생존하기 위한 필수품이 있다면 바로 작은 돗자리나 비치타월이다. 그도 아니라면 두툼한 신문지라도 상관없다. 엉덩이를 깔 수 있는, 혹은 몸을 누일 수 있는 ‘마법의 양탄자’만 있다면, 굳이 바닷가에 가지 않아도 센트럴 파크에서 비키니를 입고 선탠을 즐길 수 있고, 고가의 오페라나 뮤지컬 표를 사지 않아도 <베로나의 두 신사>나 <맘마미아>를 만날 수 있으며, ‘드라이브 인 극장’에 갈 차가 없다 해도 쩌렁쩌렁한 사운드로 둘러싸인 야외극장에서 영화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이 무료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단연코 여름의 맨하탄은 가난한 여행객들이나 배고픈 학생들에게 천국도 이런 천국이 없을 정도다.

특히 매주 월요일을 ‘시네마’ 천국으로 만드는 주인공은 브라이언트 파크의 ’썸머필름 페스티벌’이다. 이 대중적인 행사는 <추억> (The Way We Were) 같은 연인용 영화부터, 오슨 웰스의 <악의 손길> 이나 히치콕의 <서스픽션>같은 고전, <죠스>나 <더 플라이>같은 가족영화까지 다양한 여름상을 차려 놓았다. 하긴, 잔디공원에 벌러덩 드러누워 차가운 아이스커피를 홀짝거리며, 여름 밤의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가끔은 별들을 바라보며 만나는 영화라면 그것이 <인 디스 월드>같은 심각한 영화인들, <고스터 버스터>같은 명랑영화인들 상관 있으랴. 몇 년 전 부산영화제의 수영만 야외상영장에서 <화양연화>를 만나던 순간도 그랬다. 그 순간만큼은 장만옥과 양조위의 숨은 사랑이, 극장 안에서 오랫동안 감금되어 있던 그들의 ‘빛나는 순간’이 대기 속으로, 밤하늘 위로 훨훨 자유롭게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밖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을 상상도 못해보던 시절에 보았던 <시네마천국>은 그러니까 야외극장에 대한 내 첫 번째 기억인 셈이다. 저녁을 먹고 어슬렁 어슬렁 걸어 나온 동네 사람들이 어깨와 어깨를, 머리와 머리를 맞대고 광장에 앉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영화를 보던 그 장면. 그 때만큼은 초라한 영사기 뒤의 노인이 세상을 밝히는 태양의 신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영화를 보고 있는 나도 영화 속 동네 주민들만큼이나 행복해졌었다. 알프레도, 그래, 그 할아버지의 이름은 알프레도였다.

뉴욕의 하루하루가 작은 여행이라고 생각해온 나로서는 여름이 와도 굳이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못했는데 한 친구의 제안으로 로드 아일랜드 여행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여행에서 우연히 알프레도 아저씨의 유령을 만나게 된 것 같다. 마치 어른이 된 토토가 다시 그 마을로 돌아갔을 때처럼.

친구가 영화를 공부하던 대학은 프로비던스(Providence)라는 작고 조용한 마을에 위치해 있었다. 이 마을엔 극장이 두 개 있는데 예술대학이 있는 동네답게 둘 다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들이 주로 상영되어서 친구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정상적인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려면 보스턴으로 운전해서 나가야 할 정도였다고 했다. 영화를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시네마 천국’ 같은 마을인 셈이다.

나에게는 여행을 가면 그 동네 극장부터 가본다는 스스로 만든 작은 법칙이 있는데, 그 저녁에 선택한 곳은 ‘케이블카’라는 카페 안에 있는 작은 영화관이었다. 극장의자 대신 2인용 천 소파가 여러 개 놓여진 이 극장은 어찌나 허름한지 여기저기서 쥐나 벼룩이 튀어 나올 것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이 소박한 극장의 ‘프리뷰’ 시간에는 기대치 않는 쇼가 숨어져 있었으니, 바로 영화가 시작 되기 전 기타를 둘러맨 한 할아버지가 나와 스크린 앞에서 작은 공연을 벌이는 것이었다.

벌써 25년 동안 비가 오나 바람이부나 이 ‘라이브 예고편’을 책임져왔다는 이 노인의 노래는 미안하지만, 지독히도 음정과 박자를 벗어나 있었고 가끔 둥둥거리는 기타는 거의 타악기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의 아슬아슬한 블루스는 음정, 박자 딱딱 들어 맞는 <아메리칸 아이돌> 예비 가수들의 팝보다 훨씬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구슬픈 블루스와 함께 비로소 이 저녁의 작은 행사가 580배 풍족해 지는 느낌이었다.

“신기하지? 저 할아버지 노래는 10년 전에도 저렇게 엉망이었어. 그런데도 늘 저 자리에서 앉아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노래를 불렀어. 글쎄, 그 사이 좀 변했나? 흰머리가 조금 더 생긴 것도 같군…” 아니나 다를까 이제 노인은 나이 때문인지 월, 수, 금요일에만 공연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쿨럭 쿨럭, 미안해. 아, 이 놈의 지독한 알레르기, 알레르기가 또 시작이요. 얼마나 또 이럴 건지. 아님 이제는 영영 안 나으려나…. 쿨럭 쿨럭… 영원히, 영원히, 안 나을지도 모르겠어…” 어쩌면 그 옛날 알프레도 아저씨가 영사기 뒤에서 삶을 마감했듯 그는 저렇게 스크린 앞에서 생을 마감 할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기침소리가 추임새처럼 들어가는 작은 공연이 끝나고, 몇 명 되지 않은 관객들 사이로 동전이 담긴 종이컵이 조용히 돌고 난 후 그는 우리의 시야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영화 재미있게 보시오” 라는 마지막 인사와 함께.

'토토' 의 지독히 감상적인 여행기운 때문이었을까?

불이 꺼지고 시작 된 영화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여름휴가’라는 풍족한 단어와 도통 어울리지 않는 바흐만 고바디의 <거북이도 난다>였다. 절벽 위에 위태롭게 선 소녀의 등장부터 조용히 여동생의 신발을 가슴으로 안고 떠나가는 ‘팔 없는’ 소년의 퇴장까지,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글쎄, 그 눈물이 거북이와 함께 날아간 그 소녀 때문이었는지, 얼마 후면 저 스크린 앞에서 영원히 퇴장해 버릴지도 모르는 할아버지의 알레르기 천식 때문이었는지, 그 노인의 모습과 겹쳐진 추억의 알프레도 아저씨 때문이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영화란 것이 이 세상에 있어서 너무나도 행복하다고 새삼스럽게 느끼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한 ‘토토’ 의 지독히 감상적인 여행기운 때문이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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