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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첩보액션, <한길수>
이종도 2005-09-20

정체성이라는 측면에서 이중첩자는 흥미로운 존재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 당시 한길수(1900∼76)의 이중첩자 행각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1941년 일본 공격 계획을 미리 입수해 미국쪽에 여러 경로로 전달했다고 한다. 만약 미국이 일찌감치 그의 경고를 받아들였다면 현대사는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1938년 미국 내 독립운동단체인 중한민중대동맹의 리더였던 그는 뒤에 미국과 일본 양쪽을 위해 이중첩자로 일했다. 영화는 그가 미 해군의 지시에 따라 하와이 일본 총영사관으로 위장취업하면서 시작한다. 독립운동을 하던 동료들은 일본군을 테러하기 위해 스스로 설치한 폭탄의 위치를 일본군에 알려주는 한길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테러 계획을 무화하고 일본쪽으로 돌아선 한길수 또한 자신의 계획을 독립운동 동료들에게 밝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길수는 총영사관의 소좌와 약혼한 영사관 직원이 독립운동가의 자녀임을 알고 그녀를 포섭해 영사관 내부의 기밀 문서를 빼돌린다. 그러나 미 해군은 한길수가 입수한 정보를 신뢰하지 않는다. 한길수는 워싱턴까지 날아가 진주만 공습 계획을 알리지만 미 정부는 의례적인 답신만을 준다. 미 언론은 그의 활약상을 뒤늦게 주목하지만 한길수는 신탁통치를 반대하면서 조국과 미국으로부터 모두 버림받고 오렌지 농장의 잡역부로 일하다가 샌프란시스코 근교에서 생을 마감했다. 극적인 삶이고, 현대사의 비극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삶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 무렵 40대였던 그는 아마도 일어와 영어에 능통하고 일본군을 교란하며 일급정보를 빼낼 정도의 대담함과 치밀성을 갖춘 사람이었을 것이다. 안재모의 풍모는 그런데 한길수의 실재와 거리가 꽤 있어 보인다. 안재모뿐 아니라 거개의 등장인물이 구사하는 외국어나 연기는 자연스러움과는 동떨어져 마치 재현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당시 하와이의 풍광과 미 해군의 위용을 재현한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겠지만 컴퓨터그래픽으로 처리한 진주만 공습은 사실성은 고사하고 상상력을 사용한 흔적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생사고락을 함께한 독립군 동료에게 전혀 밝히지 않은 채 자신만의 생각을 실천한 한길수의 행적보다 순제작비 60억원이 어디로 다 새어나갔는지가 더 수수께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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