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전영객잔
욕심 많은 돈 주앙의 안타까운 몸부림, <브로큰 플라워>

연인의 자리를 확인하기 위해 떠나는 돈 주앙의 여행

뭐랄까, <데드 맨>이 조니 뎁의 영화인 것처럼, <고스트 독>이 포레스트 휘태커의 영화인 것처럼, <브로큰 플라워>는 빌 머레이의 영화이다. 그들 없이 그 영화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영화들이다. 그의 할머니의 아버지로부터 인디언의 피를 물려받은 조니 뎁만이 인디언의 영혼을 따라서 저 머나먼 19세기 서부의 끝에 자리잡은 바다에 이를 수 있을 것이며, 뉴에이지에 심취한 포레스트 휘태커만이 뉴욕 한복판에서 사무라이의 정신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흑인 닌자 살인청부업자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토요일 밤의 라이브’의 아웃사이더 빌 머레이만이 이제는 지쳐버린 돈 주앙의 길을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여행은 빌 머레이만이 할 수 있는 여행이다. 짐 자무시가 (그의 영화적 아버지인) 빔 벤더스와 다른 것은 그 자신의 여행을 떠나는 대신 그 누군가의 여행의 동반자를 자처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영화 속에서 여행 떠나는 자를 진심으로 믿는다. 말하자면 짐 자무시의 <브로큰 플라워>는 빌 머레이의 영화이다. 빌 머레이는 돈 존스턴이라는 가면을 쓴 다음 그의 이름으로 그 자신의 심경을 바라본다. 그냥 바라본다. 하지만 끊임없이 되풀이 되면서 수없이 그냥 바라보는 장면 중에서 이상하게도 인상적인 장면은 동거하던 여자 쉐리(줄리 델피)가 떠나간 다음, 혹은 그에게 19살 아들이 있는데 그가 지금 당신을 찾아가고 있다는 발신인 불명의 편지를 받고 난 다음 텔레비전에서 돈 주앙의 영화를 볼 때이다. 이 영화는 알렉산더 코르다가 1934년에 만든 <돈 주앙의 사생활>이다. 그리고 화면에 나온 돈 주앙은 더글라스 페어뱅크스이다. 물론 무성영화 시대의 저 위대한 페어뱅크스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 나올 때 페어뱅크스는 이미 52살이다. ‘토키’ 이후 그의 인기는 몰락한 다음이고, 그는 메리 픽포드와 이혼한 다음 영국에 가서 초라하게 이 영화를 찍었다. 그 자신에 관한 거울처럼 텔레비전에서 방영되고 있는 이 영화가 안겨주는 초라한 장면 앞에서 빌 머레이는, 혹은 돈 존스턴은 거의 숨을 멈춘 것처럼, 그냥 태연자약하게, 아무런 감정없이 ‘늙은‘ 페어뱅크스가 연기하는 돈 주앙을 쳐다보고 있다. 거기엔 쓸쓸함도, 초라함도, 슬픔도 없다. 그냥 쳐다본다.

오이디푸스의 도착을 막아라

지금 그의 곁을 쉐리가 막 떠나갔고 그는 집에 혼자 남았다. 그리고 그녀가 떠나갈 때 발신자 없는 편지가 도착한다. 말하자면 왜 그때 그 분홍색 편지가 이 지쳐버린 돈 ‘주앙’ 존스턴에게 비로소 도착했을까? 그 편지는 무려 19년을 기다린 다음에야 도착한 편지이다. (상징적인) 그 자신을 그냥 쳐다보는 그로 하여금 다시 한번 지나가버린 실재의 네트워크 안으로 끌어들이는 이 편지는 돈 존스턴의 평화로운 세상을 깨트리기에 충분하다. 그 편지가 도착했을 때 돈 존스턴은 사랑의 포기로부터 얻어낸 평화를 포기해야 하는 포기의 포기라는 우스꽝스러운 처지에 놓였음을 발견한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가 되는 순간 거의 죽음을 맞이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렇지 않고서야 텅 빈 거실에 혼자 앉아 죽은 자의 영혼을 기리는 (가브리엘 포레의) 레퀴엠을 듣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말하자면 그가 이 편지를 들고 편지의 주인을 찾아가는 것은 자신이 아버지의 자리에 앉을 의사가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아들은 일종의 죽음이다. 그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아들의 도착을 지연시킬 작정이다. 오이디푸스는 이미 출발했고, 아버지는 이 상징적 사건을 막기 위해 그 반대의 방향으로 여행을 떠난다. 이 여행은 두개의 여행이다. 하나는 우리가 따라가는 아버지의 여행이고, 다른 하나는 그 목표를 향해서 날아오는 아들의 여행이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그 아들을 따라간다. 그러나 짐 자무시는 그 반대를 따라간다. 말하자면 <브로큰 플라워>는 상징적 사건의 무효를 겨냥하고 있다. 그때 돈 존스턴은 아버지가 아니라 돈 주앙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그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거실에서 일어나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 결심의 순간, 이 영화에서 제일 이상한 순간은 돈 존스턴이 옛 여인들을 찾아다니기 직전 검은 페이드 화면이 있은 다음 그의 거실에서 앞으로 매번 들고 다니게 될 장미꽃을 보여줄 때 벌어진다. 이 숏이 이상한 것은 돈 존스턴이 꽃을 보는 것이 아니라 꽃이 돈 존스턴을 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꽃은 돈 존스턴의 마음에 대한 은유가 아니다. 그 순간 돈 존스턴의 시선은 무효가 된다. 그때 그 장미꽃이 돈 존스턴을 그냥 쳐다본다. 하지만 돈 존스턴은 마치 장미꽃처럼 그냥 앉아 있다. 여기서 돈 존스턴이 장미꽃을 보는 (반대의) 숏은 없다. 그건 자유간접화법도 아니며, 사물의 정취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여기서 짐 자무시가 입버릇처럼 존경한다고 말하는 오즈 야스지로의 필로우 숏을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미꽃에 마음이 있을 리 없기 때문에 거기서 슬픔을 본다고 말하거나 혹은 아직 만나지도 않은 옛 여인들의 시선을 느낀다고 말하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쳐다보던 돈 존스턴을 장미꽃이 쳐다보게 될 때 여기에는 이상한 질문이 있다. 왜 짐 자무시는 돈 존스턴의 여행이 그가 주체이기를 포기할 때 성립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게임 ‘늙은 돈 주앙의 사생활’을 클리어하라

그때 이 여행이 떠밀려 떠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환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첫째는 편지 때문이고, 두 번째는 이웃에 사는 윈스턴 때문이다(존스턴과 윈스턴, 이상할 정도로 비슷한 성씨). 처음에 이 편지는 정확하게 자기의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러나 발신인을 알 수 없는 이 편지는 이 편지의 주인을 찾으러 가는 여행 속에서 돈 존스턴 그 자신이 주소 없는 편지가 된다. 혹은 수신자 없는 편지가 된다. 물론 그 편지의 메시지는 돈 존스턴 그 자신이자 돈 주앙이다. 같은 말이지만 편지는 돈 존스턴을 불렀고, 그 편지에 대답하는 사람은 돈 주앙이다. 그때 돈 존스턴이라는 편지를 부치는 사람은 윈스턴이다. 윈스턴은 존스턴의 여행 계획을 상세히 짜고 난 다음, 그에게 그 여행길에 들어야 할 물라투 아스탓케와 에티오피아 재즈 5중주의 CD를 ‘구워준다’. 나는 짐 자무시의 영화에서 이렇게 이상한 음악을 들은 적이 없다. 그의 영화에서 음악은 로컬한 지역성의 복화술이었다. 그러나 돈 존스턴은 지금 에티오피아로 여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여행을 떠나기 전에 작고한 미셸 페페의 묘지를 방문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이 다섯번의 여행 내내 돈 존스턴이 어느 지역을 방문하는지 우리는 그의 카라디오에서 지방방송 DJ가 선곡하는 음악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그곳을 끝내 알 수 없다. 말하자면 <브로큰 플라워>는 짐 자무시의 영화에서 보는 도시, 장소, 지역의 정서가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페이드가 끝나면 우리는 이미 그곳에 와 있는 돈 존스턴을 보아야 한다.

두 가지 질문. 첫 번째, 어떻게 돈 존스턴은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두 번째, 왜 그의 여행길은 모든 것이 계획대로만 진행되고 예기치 않은 만남이나 혹은 다른 방향으로 그 여행이 옆길로 들어서지 않을까? 우리는 이 편지가 어디서 왔는지, 끝내 알지 못한다. 돈 존스턴은 네명을 방문하고, 그녀들과 네번의 만남을 차례로 갖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야기는 진전되지 않고 매번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한다. 돈 존스턴은 마치 같은 장소를 몇번이고 되돌아오는 것 같다. 일종의 미로, 그 안에서 반복하기. 그것은 짐 자무시가 이제까지 만들어온 로드무비와 다른 길을 가는 것이다. 이를테면 <천국보다 낯선>에서 그들이 가고자 하는 그 구체적인 천국의 지명, 플로리다. 짐 자무시는 여기서 지도를 그리지 않는다. 어쩌면 짐 자무시의 로드무비는 그가 <고스트 독>을 만들었을 때 이미 끝났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돈 존스턴의 여행은 윈스턴의 프로그램에 따라 진행되는 게임 ‘(늙은) 돈 주앙의 사생활’이다. 돈 존스턴은 옛 여자들의 홈피, 혹은 스테이지를 방문하는 것이다. 첫 번째 스테이지를 끝내면 두 번째 스테이지가 기다린다. 그리고 세 번째…. 이 비디오 게임형 내러티브는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처럼 이야기의 선형성을 무시하고 일종의 사이클에 따라 같은 상황을 다른 행동으로 반응하면서 진행된다. 혹은 홍상수가 <극장전>에서 같은 이야기를 두번 반복시키는 것처럼 여기서는 네번을 반복한다. 매번 우리는 두눈을 크게 뜨고 있어야 한다. 그곳에 분홍색이 어디에 있는지를 마치 프레임 안의 미장-센에서 숨은 그림을 찾듯이 보고 또 보아야 한다. 여기서 미장-센은 그 비밀의 대답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이야기이다. 좀더 정확하게 이것은 미장-게임이다. 그때 돈 존스턴은 매번 그 스테이지를 떠돌며 그 장소의 이곳 저곳을 쳐다보는 일종의 아바타이며, 빌 머레이의 무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그 역할을 잘해낸다.

아버지 자리의 부정 아닌 연인 자리의 긍정을 위한 여정

우리가 네번의 스테이지에서 돈 존스턴과 함께 네명의 여자를 만나지만, 그 네 여자가 이상할 정도로 공통점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돈 존스턴은 그녀들의 어떤 (공통된) 매력에 끌린 것이 아니라 그녀들이 돈 존스턴의 그 무엇에 끌린 것이다. 그녀들은 돈 존스턴과 헤어졌다. 그런 다음 다시 만난 그녀들은 ‘어머니’ 로라(샤론 스톤), ‘아내’ 도라(프랜시스 콘로이), (클로에 세비뉴의) 레즈비언 ‘애인’ 카르멘(제시카 랭), 그리고 ‘아내’ 페니(틸다 스윈튼)가 되어 있다. 돈 존스턴은 그녀들을 연인으로 만났지만 지금 그녀들은 그 누군가의 그 무엇이다. 돈 존스턴은 그 누군가가 아니다. 그러므로 돈 존스턴은 그녀들에게 그 무엇을 이제는 더이상 갖고 있지 못하다. 그 무엇을 갖지 못한 가엾은 돈 주앙. 이것을 오해하면 안 된다. 돈 존스턴은 그 무엇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무엇을 보장받기 위해서 이 여행을 하는 것이다. 그는 아들을 본 적이 없다. 그는 그 아들의 어머니가 누군지도 모른다. 아니, 아들 그 자체가 정말 존재하는 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왜 그렇게 돈 존스턴은 여행을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하는 것일까? 그는 자신이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서 이 여행을 계속하는 것일까? 핵심은 다른 데 있다. 돈 존스턴은 그의 옛 여인 중 그 누구도 아들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아들의 어머니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상 그들이 어머니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여전히 자기의 자리가 연인의 자리에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것이 침대이건, 식탁이건, 사무실이건, 문 앞이건 개의치 않는다. 왜냐하면 돈 존스턴은 그 자신이 돈 주앙이라는 것을 오직 그녀들을 통해서만 보증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욕심 많은 돈 주앙의 안타까운 몸부림. 그는 과거의 그 어느 질서에도 포함되지 않으면서 한편으로는 그녀들의 과거가 아니라 현재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자신을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되돌리기 위해서, 아버지라는 호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만나고 또 만나서 확인한다(네명의 여인들이 돈 존스턴을 19년 만에 만나는데도 마치 어제 헤어진 사람처럼 기억해낸다는 사실을 굳이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편지는 이미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편지는 아들의 역할을 이미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브로큰 플라워>는 마지막 순간 아들을 정말 만났는지 아닌지를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을 두번 만나는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한번은 (편지를 통하여) 제 장소에 도착하여 상징적으로 만나고, 다음 한번은 (서로 다른 장소에서 스쳐 지나가면서) 세번의 운명적 오류를 통해서 만난다.

나는 네 아버지지만, 너는 내 아들이 아닐지도

그 오류를 셈하기. 돈 존스턴은 그의 여행에서 세명의 아들(일지도 모르는 소년)을 만난다. 그 하나는 막 여행을 떠났을 때 소녀들의 수다의 대상이 된 검은 선글라스를 낀 소년이다. 그때 돈 존스턴은 똑같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스쳐 지나가고, 두번 다시 만나지 않는다. 두 번째는 모든 여행이 끝난 다음 돌아오는 공항에서 한 소년을 만났을 때이다. 돈 존스턴은 그를 집 근처의 식당에서 다시 한번 만난다. 소년에게 샌드위치를 사주고 난 다음, 소년이 그에게 철학적 배움을 줄 만한 대사를 원할 때 말한다. “과거는 흘러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오직 우리에게 남은 것은 현재뿐이다.” 이 말은 정말 철학적 배움에 관한 말일까? 혹은 이 단 한마디가 정말 <브로큰 플라워> 전체를 요약하는 말일까? 짐 자무시는 그 자신의 영화가 그런 식으로 유치하게 요약되기를 바란 것일까? 내 생각은 다르다. 이 말은 아버지가 아들일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한 말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혹은 이 이야기가 돈 주앙의 이야기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아버지는 살아남기 위해서 오이디푸스를 쫓아버려야 한다. 그래서 그 자신의 원래의 돈 주앙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바로 그 돈 존스턴으로 하여금 그를 돈 주앙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바니>에서 돈 주앙은 은총을 약속하고 회개를 요구하는 신 앞에서 차라리 불 속에 들어가 죽는 쪽을 택한다. 돈 주앙은 단지 플레이보이가 아니다. 돈 주앙의 미덕은 그 모든 잘못에 대한 세속적인 반성의 요구에 대한 거절에 있다. 돈 존스턴이 (아들일지도 모르는) 소년에게 베푸는 자비는 그를 아들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때 이 자비는 배고픈 오이디푸스에게 네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유혹의 제스처이다. 그때 오이디푸스는 아들의 요구를 하는 대신, 아버지의 잘못을 셈하는 대신, 갑자기 철학적 배움을 바란다. 하지만 이 순간 돈 존스턴이 돈 주앙이기를 포기할 만한 그 어떤 이유가 있는가? 그러므로 그때 돈 존스턴의 말은 “이제 과거는 충분히 즐겼고, 미래의 즐거움은 알 수 없으니, 현재의 나를 제발 돈 주앙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는 하소연으로 들어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 더. 이 말은 이상할 정도로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에게 한 바로 그 질문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돈 존스턴이 오이디푸스에게 한 유일한 그 존재의 인정이다. 그러나 그는 오이디푸스가 아니었다. 그는 배움을 얻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도망친다. 혹은 그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때 돈 존스턴이 “내가 네 아버지다”라고 말하는 그 고백은 루크 스카이워커에게 하는 다스 베이더의 고백만큼이나 우스꽝스럽게 들린다. 이 말은 사실상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로 들어야 한다. 같은 말의 반복. 나는 네 아버지라고 말했으나, 너는 내 아들이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짐 자무시의 유머. 그런 다음 마지막 장면에서 돈 존스턴을 슬쩍 보고 지나가는 차 안에서 어쩌면 아들일지도 모를 듯한 표정으로 지나가는 세 번째 소년은 빌 머레이의 진짜 아들 호머 머레이이다. 당신이 어쩌면 그가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은 단지 짐 자무시의 연출 덕분만은 아니다. 이보다 간결하고 확실한 친자 확인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나의 유머. 하지만 그는 23살이기 때문에 빌 머레이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돈 존스턴의 19살 난 아들은 아닐 것이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