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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장미>의 김응수 감독

김응수 감독의 신작 <달려라 장미>가 드디어 개봉한다. 지난해부터 영화제를 떠돌며 간간이 소식을 전하던 <달려라 장미>는 오랜 기다림 끝에 일반 관객들과 만나게 됐다. 일단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욕망>처럼 무거운 주제로 일관하던 김 감독이 코미디영화를 만든 점이 이채롭다. 그럼에도 <달려라 장미>는 그의 데뷔작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와 많이 닮았다. 이틀이라는 영화적 시간이나 과거를 되돌아보는 회환을 보여주는 감정의 진폭에서 두 작품은 매우 비슷한 얼굴을 드러낸다. 다만 <달려라 장미>는 김 감독이 살아온 지난 10년의 삶의 더께가 묻어나 <시간의 오래 지속된다>의 모더니즘에 리얼리즘이 더해진 모습이다. 유머와 상처가 공존하는 <달려라 장미>를 김 감독의 음성으로 들여다본다.

-<달려라 장미>는 개봉이 많이 늦어졌다. 배급과 관련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텐데… =일단 영화가 영화제에 나가는 것과 국내에서 개봉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만든 영화를 동시대 사람들과 어떻게 호흡하는가 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것은 국내 배급과 관련되고 이 문제를 간과하며 영화를 만들 수는 없다. 영화는 결국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영화는 다수의 사람들에게서 다양한 반응을 얻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영화든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잡는 것이 중요하다. 현 상황에서 작은 영화들은 관객에게 다가가는 경로에 접근하기가 힘들고 큰 영화는 기계적으로 개봉이 진행된다. 배급의 어려움이 영화의 존재 자체를 인지시키는 어려움으로 직결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적 낭만이 완전히 사라진 느낌이다. 상황이 점점 어려워지는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모든 것이 상업화되는 것도 문제지만 이런 것(비상업적 영화)에 관심을 가지면 스스로가 대중에게 마이너리티로 인식된다는 두려움이 존재한다. 속된 표현으로 이상한 애로 찍힌다는 것에 대한 공포감이다. 그러한 두려움으로 인한 피해는 아무도 보상해주지 않는다. 그로 인해 집단적 공포감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게 반복되는 것이다. 새로 나온 작은 영화가 절대 한정된 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이러한 두려움 때문에 저변을 넓히지 못한 탓이다.

-<달려라 장미>는 당신의 영화 중 일상에 매우 가까이 다가간 편이다.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와 <욕망>에 비해 무거운 느낌이 덜하고 일상의 소소함이 담겨 있다. 코미디물에 매력을 느낀 동기는 무엇인가? =항상 특정 사람들에게 웃긴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정말 썰렁하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따라서 대중적으로 웃긴다는 평은 아닐 것이다. 웃기는 맥락이 무대에서 개그처럼 웃기는 것이 아니고 은유적 차원의 유머에 가깝다. 러시아에서 유학할 때 교수가 이런 농담을 했다. “여기 오래 있으면 타르코프스키 귀신이 든다. 그건 진정한 네가 아니다”라고. 사람이란 존재가 원래 그렇지만, 나도 한편으로는 매우 진지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무척 가볍다. 작정하고 내 방식으로 코미디에 접근한 결과가 <달려라 장미>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욕망>보다는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와 공통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사건들이 방에서 벌어진다는 점, 그 사건들이 두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 벌어진다는 점. 또 두 영화 모두 기억을 되돌아본다는 점, 심지어 <달려라 장미>는 카메라로 기억들을 직접 재현하는 시퀀스가 그러하다. =그런 공통분모도 있고, 전체적으로 다루려는 관점의 유사점도 존재한다.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는 이념에 대해, <달려라 장미>는 결혼과 이혼에 관해, 각 영화의 인물들은 현실의 일반적인 모습 혹은 주류에 들어가지 못하는 공포를 가지고 있다. 그 주류에 결합하고 싶은 미련, 욕망 같은 것이 잔존한다. 특히 <달려라 장미>에서 두 주인공은 현실의 권태 속에서 어떠한 삶을 살 것인지의 문제를 앞두고 고민한다. 다른 사람들처럼 ‘일반’에 들어가서 편안한 삶을 살 것인가의 문제를 안고 괴로워하는 것이다. 아니면 남들이 보기에 “너희 둘은 결핍된 인간들이야”라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자유롭게 살기 위해 고민하고 방황한다. 이것은 사랑을 열망하는 길과 자유롭게 사는 길의 선택을 요구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웃기는 장면들은 매우 서늘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남대가 김밥과 우유 세례를 받는 장면 등 느닷없이 웃기는 순간이 스쳐가면 결국에는 감정의 상처가 강하게 드러난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재밌다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매우 슬펐다. 그들은 루저다. 하지만 이러한 슬픔을 그냥 슬프게 표현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슬픔의 정체를 인간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길 원했고, 내 방식의 슬픔을 보여주고 싶었다. 특히 일부러 여관에 가서 예전의 연애 기억을 연출하며 발버둥치는 장면이 그러하다. 또 남대가 영화사를 찾아가 발바닥 빠는 장면도 그것이 현실은 아니지만 수사적으로 풍자된 상징에 가까운 슬픔이다. 버스 정류장에서 우유를 남대의 얼굴에 붓고 김밥을 입에 밀어넣는 장면에서 남대는 자기 감정에 충실하지만 솔직함이 거짓말보다 상대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할 때는 그처럼 어이없는 순간이 많다. 결코 그 사건들은 드라마틱하지 않다. 결정적인 순간은 너무 허해서 어처구니가 없고 그런 감정 때문에 오래 여운이 남는 것이다.

-<달려라 장미>는 캐릭터의 힘으로 움직이는 영화 같다. 따라서 영화 자체의 표현이나 방법론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를테면 롱테이크로 감정을 담아내기보다는 사건이나 캐릭터의 심리 묘사로 진행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도드라지는 변화를 주기보다는 전체적으로 일반적인 영화의 방식으로 찍고 싶었다. 상황이나 감정을 상세히 설명하기 위해 들어가는 긴 장면을 제외하면 영미와 남대가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의 시선으로 찍었다. 서로 부딪히는 느낌을 잃지 않으면서 배우들의 리듬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빵가게 습격>의 패러디가 인상적이다. =하루키의 소설을 많이 읽었지만 그것이 가장 기억에 강하게 남았다. 그 단편을 읽었을 때 언제 꼭 한번 내 영화에서 사용하고 싶었다. 한번 털어보자. 그런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한다. 삶이 지루하고 권태로울 때, 황당해지는 느낌. 영화 내적으로도 효과적인 시퀀스였다고 생각한다. 영미가 그때까지 여관행을 비롯해 여러 시도 끝에 실패를 맞이했고 배도 고픈 상황이다. 될 대로 돼라는 심정적 요소도 작용했을 테고.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가 별장에서 벌어지는 이틀을 다룬 영화라면. <달려라 장미>도 간극을 두고 이틀간 벌어지는 일을 다뤘다. 짧은 시간에 벌어지는 이야기나 상황을 다루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그런 영화를 좋아한다. 서사적으로 길게 풀어내는 것보다 집중력 있게 상황과 일상 속에서 무언가 파열을 많이 일으킬 수 있는 대상을 가지고 과거 이야기까지 끌어들일 수 있는 방식을 좋아한다.

-<욕망>은 국내 최초의 장편 HD영화였다. <달려라 장미>의 다음 작품인 <천상고원>도 HDV로 작업했다고 들었다. 새 매체에 대한 호기심이 강한 편인가. =기본적으로 매체는 내가 무엇을 찍으려고 하는지와 관련된 문제이다. <욕망>을 촬영했을 때, HD에서 보이는 낯설음과 이질적인 냄새에 끌렸다. 그리고 이는 내가 다루려는 욕망이 현실적 드라마의 서사적 구조보다 우리 머리 속에 들어 있는 더 복잡한 정신적 메커니즘과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복잡한 심리상태를 보여주기에 HD라는 매체가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결정한 선택이다. 그 매체의 화면이 지금 현실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를 흑백으로 찍은 이유도 일단 영화 속에서 현재 벌어지는 상황들이 과거처럼 보이게, 과거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을 원했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 시간을 초월해버린 듯, 시간이 탈색된 느낌이 필요했다. 반대로 <달려라 장미>는 현실적으로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천상고원> 촬영 때는 가장 작은 카메라로 한 사람의 관광객으로 가서, 홈 비디오를 찍는 느낌으로 즐겁게 찍었다.

-러시아로 영화 유학을 결심한 배경은 무엇이었나? =러시아에 갔던 가장 큰 이유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알고 싶어서였다. 떠날 때, 그것 하나만 성취해도 유학은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아무리 그의 책을 읽어도 그의 생각 속에 담긴 다양한 본성, 그것이 문학적으로 표현됐을 때의 히스테리컬함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곳의 공기, 사람들, 책, 영화, 음악을 접하면서 조금은 그것을 알 듯했다. <악령>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악령>은 폭풍우가 치는 밤에 벌어지는 강력한 스릴러 같다. 함축된 하나의 대사에서 파생되는 상상력이 대단하다. 캐릭터들이 내뱉는 대사는 서로 대화를 한다고 가정했을 때 정확히 중립적 입장에 놓이는 느낌을 준다. 누가 그 말을 듣는지에 따라 상황의 판도가 확연히 달라지는 그런 대사이기 때문에 팽팽한 긴장감이 있다. 라스 폰 트리에의 <킹덤>을 보면 그런 느낌이 든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한 심리적 상상력이 엄청나다. 나도 내 방식대로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

-<달려라 장미>를 비롯해 당신의 작품에 출연한 배우들은 연극적 연기를 펼치는 경우가 많다. =한국영화의 연기는 지나치게 자연스러움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배우가 연극적 트레이닝도 되지 않았을 때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가끔 한국 관객이 어떻게 조절되지 않은 연기의 톤을 매번 자연스럽게 받아들일까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모든 영화의 연기 흐름이 그렇게 일방적으로 흐르는 건 문제가 될 수 있다. <달려라 장미>에서는 인물들이 황당한 현실들을 헤쳐나가기 위한 방법으로 연기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분히 연극적인 요소들이 강하다. 본인들이 연기하고 상황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올해는 <달려라 장미> 개봉에 이어 <천상고원>도 선보인다. =죽을 때까지 30편의 영화를 만들고 싶다. 내 인생의 성공을 위해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보다는 즐기면서 사는 게 재미있다. <천상고원>은 주제에서 전작들과 일맥상통한다. 어느 순간 어떤 사람이 이유없이 증발한다. 그 공간이 라다크이고 어떤 사람이 이 사람의 증발에 대해 집착을 보이고 찾아나선다. 그 사람을 만날 수도, 만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영화는 그런 과정을 바라보고 여행하는 사람과 그 사람이 보는 풍경, 특히 고원의 정경을 그려낸다.

-작은 영화가 살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내적으로는 만드는 사람들이 더 모험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결과를 맺을지를 염두에 두고 시작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상업영화와 다를 바 없다. 작은 영화는 나름의 독특함이 필요하다. 외적으로는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방법, 즉 유통의 문제가 있는데 이는 시장의 논리만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공공적 성격의 접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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