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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영화 우주를 창조한 시네아스트, 자크 타티 회고전
홍성남(평론가) 2006-06-14

<나의 삼촌> 등 장편 전작과 단편 4편 선보이는 자크 타티 회고전

자크 타티 특별전 포스터

자크 타티의 세 번째 장편영화인 <나의 삼촌>은 그에게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안겨다줬다. 그 바람에 그는 아카데미쪽으로부터 특별한 ‘향응’을 제공받을 기회를 갖게 되었다. 타티가 요구한 것은 스탠 로렐, 맥 세넷, 버스터 키튼을 만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런 식으로 그는 현재 자기가 속한 세계를 자신보다 앞서 풍요롭게 만들어준 대가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소문에 따르면, 타티와 만난 키튼은 그에게 그의 영화들은 유성영화로 무성코미디영화의 진정한 전통을 이어가는 것들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렇듯 막스 랭데에게서 혹은 맥 세넷에게서 발원지를 찾을 수 있는 영토 안에서 활동하고 그러면서 그 앞선 세대의 것과는 다른 그만의 세계를 축조해낸 이가 바로 타티였다.

이 프랑스 코미디영화의 대가는 우선 윌로씨(Monsieur Hulot)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우리에게 선사해주었다. 레인코트를 입고 파이프를 물었으며 구부정하게 걷는 이 키 크고 마른 남자는 단지 네편의 영화에 모습을 드러냈을 뿐인데도 영화사에 꽤 묵직한 존재감을 남겨놓는다. 조너선 로젠봄과 함께 작업하다 결국에는 결실을 맺지 못하고 만 프로젝트 <컨퓨전>에서 타티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그 인물을 죽여버릴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만일 그게 실현되었다고 할지라도 윌로씨가 우리의 기억에서 삭제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인상적인 타티의 캐릭터는 그 근본에는 선의를 갖고 있지만 지나갈 때마다 자신은 알지 못하는 크고 작은 소동 혹은 혼란을 남겨놓고 가는 사람이다. 주변의 사정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할 때에든 아니면 반대로 지나치게 무심할 때에든 그가 한 행위의 결과는 언제나 마찬가지이다.

현대인에 대한 관찰을 통해 유머를 끌어내다

타티는 거의 재난발생자라 불러도 무방한 이 서투른 인물(과 다른 여러 인물들)을 주로 때에 어울리지 않게 현대화가 이뤄진 공간 속으로 데려간다. <나의 삼촌>에서 보듯이 윌로씨는 갈색의 소박한 세계에 속한 인물이고 따라서 기계음이 울리는 세계로 오면 뜻하지 않은 사고를 일으키고 만다. 사실 타티는 그뿐만이 아니라 후자에 속한 사람들조차 그들 세계에서 이상한 행동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타티의 영화가 현대화와 기계화가 인간을 부조리하게 잠식하는 현상에 대한 비판을 담는다고 말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일단의 건축가들은 초현대적 건물로 현대 문명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영화 <나의 삼촌>이 공개적으로 자신들을 조롱했다며 격한 반응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타티가 이를테면 전전(戰前)의 르네 클레르(<우리에게 자유를>, 1931)와 인민주의의 전통을 공유하기는 해도 그의 날카로운 풍자정신까지 같이 하는지는 의문이다. 풍자의 시선을 갖는다는 것에 우열의 문제를 관련짓지 않고 말하자면, 타티의 비교적 온화한 시선에서는 풍자라는 단어에 결부되는 격한 예리함이 눈에 확 들어오지 않는다. 아무래도 타티의 관심사는 현대의 조건을 비판하는 것보다는 그 안에서 이상하게도 탄력적으로 반응하는 인간들을 관찰하는 쪽에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트래픽>에서 여러 운전자들의 다양한 행동들을 담은 숏들을 보라). 장 뤽 고다르가 적절하게 이야기한 대로 타티는 낯선 것을 관찰하는 데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는 시네아스트이고 그로부터 유머를 끌어낼 줄 아는 코미디 작가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하게는 그로부터 신비로움과 아름다움과 시성(詩性)을 발견해낼 줄 아는 사람이다. 예컨대 <플레이타임>은 그토록 비정하게 보였던 현대 도시에서 깊은 한숨을 뱉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패턴’에서 어떤 묘한 아름다움을 보는 것으로 끝맺었던 사실을 떠올려보자.

플롯의 독재에서 해방된 다성성의 영화

확실히 타티의 영화는 무언가 초조함이나 강박관념을 가진 이들을 위한 영화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건 그의 영화가 구축되는 형식적인 설계를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우선 그것에는 보는 이의 정신을 한쪽으로 열심히 모으게 하는 스토리의 흐름이란 게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윌로씨의 휴가>에서 보듯이 타티의 것은 사건과 사건이 인과관계의 연쇄를 이룬다기보다는 순간과 순간이 시간의 흐름을 형성해서 구조를 만들어내는 식의 영화이다. 그렇게 플롯의 독재로부터 벗어나는 그의 영화는 그 자체를 어떤 중심적인 인물의 독재로부터도 해방시킨다. 타티가 연기하는 윌로씨는 우리의 눈에 익은 인물이기는 해도 결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주인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그가 자신의 캐릭터를 가지고 궁극적으로 만들어보고자 했던 것은 그 인물도 엑스트라 같은 존재로 축소되어 존재하는 식의 영화였다. 영화평론가 장 앙드레 피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우디만큼이나 대담한 건축가이면서 세실 B. 드밀보다 더 나은 전략가이자 버스비 버클리보다 더 뛰어난 안무가인 타티는, 이같은 ‘민주주의’의 정신을 정교하게 만들어진 그의 화면 위에서도 구현해내려 했다. 그래서 그의 화면에서는 전면의 디테일과 후면의 디테일이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관련을 맺으려 하고 의미의 독재에서 풀려난 이런저런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소음과 음악이 한데 어울려 일종의 화음을 빚어낸다. 이렇게 해서, 마치 서커스 공연을 담은 타티의 마지막 작품인 <퍼레이드>가 관객을 끌어들이는 것처럼 타티는 관객에게도 그 자신들의 자리를 내주는 영화를 만들려 했다. 아마도 앙드레 바쟁의 이상에 근접할 것 같은 이런 영화야말로 진정 민주주의적인 영화이고 또 다성성(多聲性)의 영화라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나의 삼촌>

<네 왼쪽을 살펴라>

당연히 많은 평자들은 드라마투르기와 인물의 기능, 시청각적인 공간 등의 측면에서 타티의 영화가 전통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기존의 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형식상의 혁신을 이뤄냈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유명한 촬영감독인 라울 쿠타르에게 고다르가 자신과 프랑수아 트뤼포를 비교하면서 했던 말(“나는 시네마를 만들지 영화 작품을 만들지는 않는다. 반면에 프랑수아는 영화들을 만든다”)을 끌어와 본다면, 타티 역시 필름이 아닌 ‘시네마’를 만든 시네아스트라 간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또는 타티에 대한 뛰어난 비평서를 쓴 영화학자 미셸 시옹의 말로 하자면, 타티는 그것만의 생물군(群)과 땅, 산소 등이 완비된 영화적 우주를 만들어낸 사람이었다. 삶이 경의를 표해야 하는 그런 우주.

영화를 위해 모든 것을 내건 완벽주의자

그 어떤 표현을 쓰던 간에, 타티가 이룩한 바는 자기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것을 표현해내고자 영화작업의 모든 구석에까지 통제력을 발휘하고자 쏟았던 노고의 결과였다(다른 말로 이건 열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 트뤼포가 지적한 대로 타티는 로베르 브레송과 함께 지독한 완벽주의자의 양대 모범이 될 만한 인물이었다. 타티의 영화 속 한숏 한숏이 그의 그런 면모를 예상케 하지만 그 절정은 역시 <플레이타임>의 제작이라고 봐야 한다. 이 한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타티는 <축제> <윌로씨의 휴가>의 권리와 자기 집을 저당잡혀가며 돈을 모았다. 그리고는 소피아 로렌에게 개런티를 주는 것보다는 싸게 든다며 영화 속의 공간을 직접 지었다. 흔히 ‘타티빌’(Tativille)이라 불리는 거대한 영화의 세트를 건설하는 데만 다섯달이 소요되었고 영화는 3년이 걸려 완성되었다. <플레이타임>은 그렇게 타티의 온 노고가 들어가 만들어진 영화였건만 흥행에서는 참패를 기록하고 말았다. 그래서 힘들었지만 여하튼 살인은 저지르지 않았다고 말했던 타티가 은행 빚을 갚는 데만 10년 가까이 걸렸다. <플레이타임>의 타티를 보노라면 ‘예술로서 영화의 역사란 돈을 잃은 영화들의 역사’라는 말 옆에 ‘예술로서 영화의 역사란 제작과정에서 피폐해진 감독들이 만든 영화들의 역사’라는 말도 덧붙여야 할 것 같다. 그 피폐해진 이들이 우리를 즐겁게 만든다.

자크 타티 상영작

<축제> Jour de fete ㅣ 1949년 ㅣ 79분 ㅣ 흑백 자크 타티의 첫 장편인 <축제>는 그가 1947년에 만든 단편 <기술학교>를 확장한 영화다. 여기에서 타티는 윌로씨가 아닌, 자전거를 탄 작은 마을의 우체부 프랑수아로 나온다. 마을에서 축제가 열리던 날, 그는 속도를 중시하는 미국의 우편배달 방식에 대한 영화를 보고는 자신도 미국식 속도를 보여주리라 마음먹는다. 프랑수아가 이 생각을 실천하는 종반부의 꽤 긴 시퀀스가 보는 이들을 사로잡는다. 형식과 주제 면에서 타티의 다음작들을 예고하는 <축제>는 공개된 뒤 비평과 흥행 양쪽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타티라는 존재의 등장을 알리게 되었다. 장 뤽 고다르는 이 영화를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도시>(1945)에 비견하면서 타티와 함께 프랑스의 네오리얼리즘이 태어났다고 썼다.

<윌로씨의 휴가> Les Vacances de Monsieur Hulot ㅣ 1953년 ㅣ 87분 ㅣ 흑백 움직임마다 소동을 만드는 인물 윌로씨가 처음 등장하는 <윌로씨의 휴가>는 제목 그대로 그와 여러 사람들이 휴가를 맞아 해변의 휴양지에 도착한 다음부터 휴가가 끝나자 떠나기까지의 과정을 일정하게 나아가는 스토리의 흐름없이 보여준다. 플롯이 존재하지 않는 이 영화는 안과 밖, 밤과 낮, 행동의 반복 같은 요소들을 가지고 리듬을 만들면서 구조를 구축한다. 그러면서 영화 자체가 90분 정도에 담긴 휴가처럼 되어버린다. 이렇게 해서 <윌로씨의 휴가>가 미묘한 방식으로 혁신을 이룬 것에 대해서는 많은 평자들이 지적한 바 있는데, 그 가운데 데이브 커라는 평론가는 이 영화에서 타티는 영화를 고전적 내레이션과 결정적으로 결별케 만든 첫 번째 인물이라고 쓴 바 있다. 그는 이 영화가 없었다면 모던 시네마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나의 삼촌> Mon Oncle ㅣ 1958년 ㅣ 116분 ㅣ 컬러 <나의 삼촌>에서의 윌로씨는 조카를 학교에서 집까지 데려다주느라 자신이 거주하는 낡지만 안락한 지역과 누이 부부가 사는 초현대식 디자인으로 지어진 저택 사이를 왔다갔다 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많은 평자들로부터 르네 클레르의 <우리에게 자유를>과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1936)를 떠올리게 했던 이 영화는 그같은 반복의 왕복 과정에서 두 가지 생활 방식을 대조해서 보여준다. 그러면서 두 가지 다른 세계 속에 사는 사람들의 행태에 대한 흥미로운 관찰도 제공한다. 타티의 코미디에서 반복의 요소와 사운드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려주는 이 영화는 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과 오스카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플레이타임> Playtime ㅣ 1967년 ㅣ 120분 ㅣ 컬러 타티의 가장 야심적인 프로젝트라 할 <플레이타임>은 타티 자신의 말을 빌리면 “가장 사소한 각본을 70mm로 찍은 영화”다. 영화에는 영화사상 최고로 과대망상가적인 세트 가운데 하나인 ‘타티빌’을 거니는 사람들 사이의 짧은 스침들 이외에는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관객은 그 큰 화면 속의 주로 먼 거리에서 찍은 이미지를 스스로 돌아다닐 수밖에 없다. 영화학자 노엘 버치는 <플레이타임>이 그래서 여러 번 보아야 할 뿐 아니라 스크린으로부터 상이한 거리에서도 보아야만 하는 영화, “진정으로 ‘열린’ 영화”라고 말한 바 있다. 한편, <플레이타임>은 사운드 면에서 보면 여러 소리들이 주의깊게 구성된 일종의 ‘소음영화’라 불릴 수도 있다. 비록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영화라고는 해도 영화 후반부 점차 무정부적 에너지를 높여가는 45분간의 로열가든 시퀀스는 단연 압권이다.

<트래픽> Trafic ㅣ 1971년 ㅣ 96분ㅣ 컬러 사실 타티는 더이상 윌로씨를 스크린에 등장시키고 싶지 않았으나 윌로씨라는 ‘스타’가 없으면 제작비를 얻기가 힘들 것 같아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윌로씨는 가장 분명한 ‘임무’를 부여받는다. 자동차 회사에서 디자인 일을 하는 그는 새 캠핑카를 국제자동차박람회가 열리는 암스테르담까지 끌고 가야 한다. 영화는 그 목적지까지 가는 여정을 따라가면서 타티 특유의 거리를 두면서도 초연하지 않는 시선으로 사람들이 환경에 어떻게 탄력적으로 반응하는지를 유쾌하게 관찰한다. 현대사회가 만들어내는 형태와 색채로부터 아름다움을 이끌어내는 타티의 능력도 눈여겨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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