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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의 연애담 <여름이 가기 전에>

뻔한 푸념과 핑크빛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스물아홉의 연애담.

ABO식 혈액형에 근거한 성격 판단법은 누구에게나 그럴듯하게 맞아떨어진다. 그것은 혈액형에 따라 인간의 성격이 정확하게 나눠지기 때문이 아니라 한 인간 안에 여러 가지 성격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은 소심하지만 때때로 과감하게 결단을 내린다’나 ‘당신은 대체로 상냥하지만 갑자기 냉정해질 때가 있다’와 같은 상호 모순적인 명제로 이루어진 그 성격 판별법에 푹 빠져들게 된다. 성지혜 감독의 <여름이 가기 전에>는 연애라는 단어 속에 포함된 무수한 행위들이 하나의 주체에게 얼마나 자아분열적인 행동을 가져오며, 상호 배반적인 행위들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게 만드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특히 그 연애가 단일한 객체를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매우 상이한 두 존재를 두고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 분열의 강도는 더할 것이다.

<여름이 가기 전에>는 프랑스에서 유학 중인 소연(김보경)이 방학 중에 한국에 들어와 두 남자와 벌이는 아슬아슬한, 혹은 안타까운 연애담이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난 재현(권민)은 호감가는 외모의 소유자일 뿐 아니라 잠시 한국에 와 있는 소연의 바쁜 일정을 배려하기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소연은 그에게 끌리지 않는다. 그와 만나고 있을 때도 그녀의 머릿속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민환(이현우)이 있기 때문이다. 엄청난 격무에 시달리는 외교관이자 전 부인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혼남인 그와 단 하루를 지내기 위해 소연은 부산으로 달려가기도 하고, 일주일을 여관방에서 외롭게 보내기도 한다. 소연을 힘들게 하고 마음 아프게 만드는 것은 민환이지만 정작 그녀가 짜증내고 소리 지르는 대상은 재현이다.

영화 속 소연의 나이는 스물아홉이다. 파릇파릇하고 지고지순한 사랑에 대한 환상은 이십대와 함께 사라져버리고, 사랑이란 애초에 지리멸렬한 게임이라는 걸 알아가는 나이다. 스물아홉 누군가에게는 아직도 청춘이고 다른 이에게는 알 만큼 알게 된 애매한 나이이기도 하다. 소연은 두 사람과 동시에 연애를 하면서 자신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이것은 역설적으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민환이 자기 집에서 일주일간 머물지 않겠냐고 말한 것 때문에 소연은 가족들과 재현에게 일주일 먼저 프랑스로 떠난다고 거짓말을 한다. 재현에게는 소중한 소연의 시간들은 민환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이 공허하게 버려진다. 그녀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어하고, 점점 더 다가서려는 재현을 소연은 매몰차게 몰아 붙인다. 반면 민환의 무신경한 말투와 지켜지지 않은 약속들 때문에 상처받으면서도 그에게 그녀는 한없이 관대하다. 어떤 것이 진짜 소연일까?

소연의 흔적을 좇아 공항까지 찾아온 재현이 “도대체 소연씨는 누구예요?”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나도 모르겠어요. 내가 누군지”라고 대답한다. 스물아홉살의 여름, 소연은 n개의 사랑 앞에서 n개로 분열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자기도 모르게 자기 안에 숨겨져 있던 자아들을 만나게 되고, 그로 인해 극도의 혼란에 빠지면서 그 모든 것을 자신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는 그 지점에 그녀가 서게 된 것이다. 재현의 대사 가운데 소연의 폐부를 찌르는 한마디가 또 있다. “그 사람은 소연씨 사랑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은 다 아는데, 왜 소연씨만 몰라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지만, 소연도 우리도 다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마음이 가는 것까지도 멈출 수 없다는 걸. 가슴과 머리가 분리되지 않는다면, 이성이 시키는 대로 감정이 따라가 주기만 한다면 인간들이 사랑 따위로부터 상처받을 일들이 얼마나 줄어들겠는가. 그리고 이 대사는 부메랑처럼 재현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그 역시 소연이 사랑하지 않는 것을 모르거나, 모르는 척하는 것이 아닌가.

성지혜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여름이 가기 전에>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남녀간의 미묘한 감정 대립과 복잡하게 얽힌 관계들 속에서 흔들리는 여성의 모습이 섬세한 묘사를 통해 전달된다. 그리 많지 않은 대사들은 간결하지만 말하는 이의 심리적 상태와 성격을 정확하게 전달해주기 때문에 짧은 기간 동안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세명의 인물에 접근하는 일이 어렵지 않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갖는 미덕은 보통 사랑을 둘러싼 감정선을 집중한 영화들이 빠지기 쉬운 감상성과 이런 식의 디테일로 승부하기 쉬운 영화들이 범하기 쉬운 냉소, 둘 중 어디에도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항에서 두 남자의 이상야릇한 배웅을 받게 된 소연, 그녀의 마음이 누구를 향해 귀결될 것인지 관객은 알 수 없다. 그녀 안에 있는 결핍은 두 남자 중 누구를 통해서 충족될 수 없는 것이기에. 영화는 프랑스에서 담담하게 혼자 가을을 맞는 소연을 보여주면서 끝난다. 다소 상투적으로 보이는 결말이 좀 아쉽기는 하지만, 스물아홉 여성의 심리와 남성들과의 관계를 다루면서 이 작품만큼 담백한 영화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한국의 여성 관객에게는 남자들을 비춰주는 거울로서의 여성이 아닌,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소연 같은 여성 인물들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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