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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 가는 재능 <뒤로가는 연인들>
김도훈 2007-10-24

90년대 영화광 세대의 뒤로 가는 재능

대학기숙사에 기거하는 청춘군상이 있다. 유럽여행을 떠난 환상 속의 연인 빅터의 귀환을 기다리는 숫처녀 로렌(섀닌 소사몬), 남성호르몬 넘치는 드럭딜러 숀(제임스 반 데어 빅), 숀을 짝사랑하는 게이청년 폴(이안 소머핼더), 로렌의 기숙사 룸메이트이자 생각없는 금발의 코카인쟁이 로라(제시카 비엘). 섹스와 마약으로 청춘을 탐닉하던 이들 훈남훈녀는 서로를 향한 일방통행의 공허한 관계로 얽혀 있지만 ‘세계 종말의 파티’를 기점으로 우르르 허물어지게 된다. 브렛 이스턴 엘리스의 원작을 각색한 <뒤로 가는 연인들>은 로저 애버리의 신작이다. 애버리가 누구냐고? 90년대를 휘어잡았던 ‘비디오 가게 점원출신’ 중 한명인 그는 <펄프 픽션> <트루 로맨스>의 각본을 공동으로 썼으며, 데뷔작 <킬링 조이>(1994)로 한때 “타란티노를 능가할 것”이라는 기대도 받았던, 잊혀진 감독이다.

<뒤로 가는 연인들>은 애버리가 지난 2002년에 만들었던 두 번째 극장용 장편영화로 영화광 세대다운 재기발랄함은 여전하다. 필름을 뒤로 돌려서 만들어낸 깜찍한 시퀀스가 수미쌍관을 이루고, 빅터의 유럽여행을 MTV식 편집으로 요약해서 이야기의 중간에 갑자기 삽입하는 장난도 꽤 귀엽다. 하지만 기술적인 장난이 무한반복되는 가운데 종잇장처럼 얄팍한 캐릭터들은 갈팡질팡이다. 스트레이트 남자들만 뒤쫓는 게이 캐릭터, 약물에 빠진 멍청한 블론드, 처음으로 사랑을 느끼는 드럭딜러 괴짜 등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청춘의 공허함을 아주 직접적으로 부르짖는 가운데, 심지어 애버리는 종잇장 캐릭터들이 탐스러운 입술을 이용해 끊임없이 철학적인 독백을 내뱉게 만든다. 클로즈업 정지화면에다가 이름을 박아넣어서 캐릭터를 소개하는 장난은 <트레인스포팅>을 비롯한 십수편의 90년대 청춘영화에서 이미 충분히 즐기지 않았나. <뒤로 가는 연인들>은 재주 좋고 약간 거만한 영화과 학생이 만든 졸업영화 같다.

타란티노 세대의 장점은 그들이 비디오 가게에서 익힌 엄청난 영화적 레퍼런스들이었다. 하지만 그 세대 중 살아남은 자는 타란티노가 거의 유일하다. 레퍼런스를 변주하는 독살맞은 능력 덕분이다. 로저 애버리에게는 그냥 레퍼런스에 대한 레퍼런스밖에 없다. 모든 게 어찌나 얄팍하게 인위적인지, 심지어 이 남자는 흔한 술주정 파티에다 ‘세계 종말의 파티’라는 근사한 이름을 붙여준 다음 <위커맨>(1973)의 불타는 ‘위커맨’을 등장시켜 학생들로 하여금 불태우게 만든다. 그 의미없이 근사한 장면은 에릭 스톨츠의 카메오 출연만큼이나 비극적으로 초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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