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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이매진] 비디오 게임 혹은 인터액티브 필름

영화·게임간 상호침투의 대표적인 예인 데이비드 케이지 감독의 <파렌하이트>

<파렌하이트>

“Every night in my dreams I see you, I feel you….” 셀린 디온의 감미로운 노래가 흘러나온다. 로즈가 뱃머리에 서서 두팔을 벌리고, 잭이 두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싼다. 그리스의 나이키 조각상처럼 지그시 두눈을 감고 온몸으로 바람을 받던 로즈, 깜짝 놀라서 환성을 지른다. “내가 날아가고 있어!” 순간, 화면이 멈춘다. 그리고 스크린 위에 윈도 창문과 더불어 이런 자막이 나타난다. ‘자, 선택하시오. 1. 잭이 죽는다. 2. 로즈가 죽는다. 3. 잭과 로즈가 모두 죽는다. 4. 잭과 로즈가 모두 산다.’ 과연 이런 영화를 보고 싶어할 사람이 있을까?

최근 미술에 이어 영화에도 인터랙션을 도입하려는 실험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이게 못마땅했던 걸까? 어디선가 어느 감독이 인터랙션 시네마에 대해 논평했던 대목을 읽고, 유쾌하게 뒤집어졌다. 관객이 매번 영화를 중단시켜 놓고 버튼을 눌러 플롯을 진행시켜야 한다면, 관객은 영화 속으로 몰입하는 데에 심각한 방해를 받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터랙션 영화는 극을 중단시켜놓고, 관객의 의견을 물으며 태도를 결정하라고 다그쳤던 브레히트의 연극을 닮았다.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는 물론 ‘몰입’을 막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가상현실 시대에 대중은 몰입에 대한 열렬한 욕망을 갖고 있다. 다른 한편, 컴퓨터 게임에 익숙한 대중은 또한 눈앞에 보이는 이미지와 상호작용을 하려는 강력한 충동을 느낀다. 여기서 대중의 두 가지 욕망은 서로 충돌하는 양상을 보인다. 상호작용을 위해서는 관객의 결정을 기다리기 위해 플롯의 진행을 중단시키고 화면에 창문을 띄워야 한다. 문제는 이런 영화를 보러 돈 주고 극장에 갈 관객이 있겠냐는 것.

<키노아우토마트>

실제로 그런 영화가 있었다. 1967년 캐나다 몬트리올 엑스포의 체코관(館)에는 특수하게 제작된 극장이 지어졌다. 극장 안의 127개 좌석에는 각각 빨간색과 푸른색의 버튼이 달려 있었다. 영화는 상영 중에 다섯 차례 중단된다. 그때마다 라이브 퍼포머가 무대 위로 올라와 좌석에 앉은 관객에게 다음 플롯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할지 버튼을 눌러 투표를 하라고 종용한다. 이후의 줄거리는 물론 이 전자투표의 결과 다수의 지지를 얻은 방향으로 민주적으로(?) 전개된다.

경우의 수는 둘이므로, 신세라 감독은 이를 위해 두대의 영사기를 사용했다고 한다. 관객은 상영 도중 모두 다섯번 투표를 한다. 따라서 여기서 생성될 수 있는 플롯의 수는 이론적으로 25=64가지에 달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아날로그 기술로 64개의 플롯을 모두 담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관객이 어느 쪽을 선택하든, 두 갈래로 달리던 이야기는 끝에서 동일한 결과로 합류하고, 여기서 관객은 또다시 두개의 가능성 중 하나에 투표를 하도록 요청받는다.

아무리 민주적이라 해도, 이렇게 플롯의 진행을 다수결에 맡길 경우 영화 수준은 결국 대중의 평균적 취향 안에 머물게 된다. 가끔은 주인공 미스터 노박이 나타나, 관객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당신이 그런 결정을 해서 기쁩니다.” 이 말은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사실 관객이 어느 쪽 버튼을 누르든, 끝에서 결말은 동일하다. 그런데도 그것을 ‘선택’이라 부를 수 있을까? 주인공이 관객에게 늘어놓는 공치사가 내게는 다수결의 원리와 민주적 투표라는 환상을 비웃는 듯이 느껴진다.

인터랙티브 필름

최초의 인터랙티비티 시네마라고는 하나, 사실 신세라 감독의 <키노아우토마트>(1967)에는 전혀 새로운 기술이 사용되지 않았다. 기존의 영화에 보탠 것이 있다면, 영사기를 한대 더 쓰고, 분기하는 스토리를 위해 필름 자료를 이중으로 마련한 것뿐이다. 모든 것이 아직 아날로그였기에, 플롯의 다양성을 생성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관객이 어느 쪽을 선택하든 결말에는 동일한 상황으로 귀결된다는 설정도 실은 기술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은 이와는 차원이 다른 인터랙티비티를 구현할 수가 있게 해준다. 그것은 훨씬 더 많은 필름 자료를 기억하여 더 많은 플롯의 조합을 생성해낼 수 있다. 물론 <키노아우토마트>처럼 영화관이 좌석마다 입력을 위한 하드웨어를 갖추기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게다. 이것이 인터랙티비티 시네마의 가능성을 좁히지만, 오늘날 대중은 이미 영화를 컴퓨터 모니터 위에서 보고 있다. 영화가 DVD 속으로 들어오면, 그것은 관객과 무리 없이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

이 경우 영화와 게임의 경계가 흐려질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데이비드 케이지 감독의 <파렌하이트>(2005). 전세계적으로 80만장이 팔려나간 이 작품은 흔히 ‘비디오 게임’으로 분류되나, 감독 자신은 이를 “인터랙티브 필름”(interactive film)이라 불렀다고 한다. 실제로 이 게임은 화면, 대사, 플롯, 음악 등 영화의 모든 요소를 포함하며, 거기에 더해 관객과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인터페이스까지 갖추고 있다.

<파렌하이트>

영화는 2009년 1월의 어느 날 밤 뉴욕에서 시작된다. 루카스 케인은 자신이 화장실에서 한 사내를 살해했음을 깨달으나, 자신이 왜 그랬는지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는 경찰의 추적을 피해가면서 자신이 완전히 미쳐버리기 전에 자신의 의식을 통제하는 이 초자연적 힘을 파악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관객은 주인공 루카스 케인, 그를 추적하는 여형사 카를라 발렌티, 동료 형사 타일러 마일러, 주로 이 세 인물을 조종하여 영화(게임?)의 플롯을 스스로 창조하게 된다.

관객은 이 세 사람을 서로 돕거나 대립하게 하면서 커다란 줄거리를 바꿔 나가게 된다. 그런가 하면, 아주 사소한 변경을 통해서도 플롯이 변할 수도 있다. 가령 루카스 케인이 살인현장에서 어떤 물건을 놔두고, 어떤 물건을 치우느냐에 따라, 카를라 발렌티는 각각 다른 단서를 얻어 다른 방향을 범인을 추적하게 된다. 형사들이 루카스 케인을 어디서 처음 목격하느냐에 따라서도 줄거리가 달라질 수도 있다. 옵션의 선택에 시간제한이 있어, 시간을 넘기면 원치 않는 장면이 돌아간다.

이 모두가 3.1GB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 영화는 마지막 장면의 결과에 따라 세 개의 상이한 엔딩을 갖는다고 한다. 그때마다 루카스가 나타나 자신이 3개월 전부터 카를라와 동거하고 있으며, 곧 아기를 낳을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영화가 늘 이 세개의 엔딩으로 끝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상황에 따라 예상치 못한 결말로 영화가 급작스레 끝나 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다행히 녹화 장치가 되어 있어, 이런 경우에는 중단됐던 부분에서 다시 영화를 리플레이시킬 수가 있다.

게임과 영화

이미 게임의 매출이 영화의 매출을 넘어섰다고 한다. 이는 대중의 이미지 취향을 결정하는 것이 영화에서 게임으로 바뀌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에서 영화 개봉으로 얻은 수익보다 2차시장의 매출이 두배에 달한다고 한다. 그것은 더 많은 대중이 영화를 더이상 스크린이 아니라 컴퓨터 모니터로 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미지를 수용하는 취향과 방식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벌써 영화의 모습을 바꾸어 놓고 있다. 영화와 게임의 경계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영화와 게임의 상호침투에는 크게 두 가지 방향이 있다. 하나는 영화가 게임 속으로 들어오는 길. 오늘날 웬만한 할리우드영화는 곧바로 게임으로 출시된다. 물론 개봉영화의 상징자본으로 게임의 인지도를 높이려는 전략이다. 다른 하나는 비디오 게임이 영화 속으로 들어오는 길. <스트리트 파이터>(1994), <툼 레이더스>(2001), <파이널 판타지>(2001), <레지던트 이블>(2002) 등 게임을 바탕으로 한 영화는 이미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이보다 재미있는 것은, 게임과 영화가 서로 상대의 언어를 참조하는 것. 가령 <다이하드>의 경우, 플롯을 짜는 데에 비디오게임의 미션수행의 모티브를 차용했다. <파렌하이트>는 게임이면서 동시에 대사와 플롯을 갖춘 영화가 되려고 한다. 이 경우 영화와 게임의 상호참조는 외적 차용의 수준을 넘어 내적 구현의 단계, 말하자면 영화-게임의 하이브리드를 만들어내는 경지에 도달한다. 아마도 이것이 영화-게임-콘버전스의 (현재로서는) 가장 높은 수준일 것이다.

예술에서 혁명은 내용이나 형식이 아니라 기술에서 먼저 일어난다고(베냐민). 미래의 영화감독은 오늘날의 게임 제작자를 닮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