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아임 낫 데어> 밥 딜런은 [          ]다

토드 헤인즈가 만든 밥 딜런의 특별한 초상화, <아임 낫 데어>는 어떤 영화인가?

밥 딜런을 영화의 창작자 중 누구와 견줄 수 있을까. 철지난 말처럼 영화가 고다르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것이라면 누군가는 미국의 대중음악은 밥 딜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주장하고 싶어질 것이다. 고다르가 “니콜라스 레이가 영화다”라고 말한 것을 두고 ‘밥 딜런이 음악이다’라고 흉내내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밥 딜런은 한명의 가수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라고 누군가는 또 의미심장하게 말할 것이다. 밥 딜런 스스로는 본인에 관해 “만약 내가 밥 딜런이 아니라면 아마도 나는 내게 줄 많은 해답을 밥 딜런 그가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라며 알 듯 말 듯 기지 넘치게 자기의 존재를 인정한다. 실제로 밥 딜런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영미권의 영향력있는 영화전문 계간지 <시네아스트>의 공동편집장 리처드 포튼은 “그를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미국 팝 컬처에서 대중오락과 이른바 진지한 예술 사이를 밥 딜런 이상으로 횡단해낸 인물은 없다”고 <아임 낫 데어>에 관한 글의 첫머리에 단언하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아임 낫 데어>의 감독 토드 헤인즈는 “밥 딜런의 예술적 업적은 내게서 어떤 보증 따위를 필요치 않는다. 그를 좋아하건 그렇지 않건 전후 문화와 대중음악의 영향력있는 리더로서 그를 피해갈 방법이란 없다”며 짠 것처럼 말한다.

좋든 싫든 어느 모로나 피해갈 수 없는 인물. 하지만 피해갈 수 없는데 쉽게 다루기도 힘든 인물. 1960년대 초반 등장하여 포크 음악계의 음유시인이자 저항의 선지자로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으나 지식인들의 추앙이라는 그 달콤하고 어엿한 지위를 몇년 만에 내팽개치고 시대정신의 배신자로 낙인찍히면서까지 자기의 내면이 이끈 자유의 가시밭길로 내처 나아간 밥 딜런. 그 뒤로도 이끼가 끼지 않는 돌처럼 그의 변화는 멈추지 않았고, 더불어 갖가지 풍문과 사건도 끊이지 않았다. 적어도 밥 딜런에게 변화는 무슨 거창한 의지였다기보다는 본능의 충실함을 따라 사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만약 대중성과 예술성 사이를 횡단한 미국 문화의 대표적인 아이콘이 된 것이라면 자유로움에 대한 무작정의 믿음과 확신을 실천했기 때문이었을 텐데 도대체 밥 딜런만이 알고 있는 그 확고함의 느낌을 그에 관한 영화라면 어떻게 옮겨낼 것인가. 그는 확고했으나 대중은 항상 뒤늦게 눈치채고 좇아야만 했던 빈칸을 영화는 어떻게 채울 것인가. 혹은 어떻게 흥미로운 빈칸으로 만들 것인가. 그게 핵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밥 딜런의 이야기는 상상이 다룰 수 있는 영역이며 애초부터 상상이 가미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프로젝트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임 낫 데어> 이전까지 그에 관한 전기영화가 단 한편도 만들어지지 않은 이유. 밥 딜런이 아마도 수차례 있었을 자신에 관한 극영화의 제안을 수락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토드 헤인즈가 밥 딜런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딜런의 오랜 매니저 제프 로슨에게 조언을 구했을 때 그가 알려준 딱 한 가지 비책이란 이거였다. 절대로 “천재적인”, “시대의 목소리” 따위의 표현은 쓰지 말고 기획안을 작성하여 밥 딜런에게 보낼 것. 지금도 밥 딜런이 이 프로젝트를 허락한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실토하는 토드 헤인즈가 자기의 지난 작품들과 함께 묶어 밥 딜런에게 동봉해 보낸 기획안에는 이렇게 괴상한 제목이 적혀 있었다. “아임 낫 데어: 딜런에 관한 영화에 있어서의 추정들.” 밥 딜런은 자기를 추정해보겠다고 청한 자에게 생애 처음으로 그 영광을 허락했다. 지금껏 그는 뻔하고 당연한 헌사가 아니라 용감한 추정을 기다린 것이다.

밥 딜런을 그리기에 더 없이 합당한 연출자와 제목

밥 딜런에 관한 많은 자료들을 읽고 본 다음 토드 헤인즈가 결정한 영화의 방향이 실은 밥 딜런이 원하던 모양새와 이미 같았다. 밥 딜런에 관한 영화는 “시간대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전기영화가 될 수는 없다. 실제 딜런 혹은 진짜 딜런을 찾으려던 전기작가들은 모두 실패하고 있다. 픽션을 통하지 않고는 진실을 전달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동시에 “딜런에 관해 알려져 있던 인식들을 산산조각내고 싶었다. 특정 시대와 장소를 살았던 창조적 예술가로서, 동시에 미국 대중의 투쟁, 대립, 전통을 체화하고 있는 밥 딜런이라는 사람을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한번 뒤집어보고 싶었다. 이 영화가 딜런의 광팬들을 건드려 도취와 분노를 동시에 일으키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욕망도 갖고 있었다. 적어도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밥 딜런에 관한 영화가 확실한데 밥 딜런은 등장하지 않는 영화라면서, 그런데 밥 딜런은 이런 사람이었고 또는 저런 사람이었다며 빠지지 않고 한마디씩 거들고 싶어하니 토드 헤인즈의 욕망은 얼마간 성공이다.

마틴 스코시즈가 밥 딜런에 관한 다큐멘터리 <노 디렉션 홈>(2005)에서 해낸 업적을 토드 헤인즈는 극영화에서 매끄럽게 잇는 중이다. 한 가지 추가되는 게 있다면 기지와 재치랄까. 밥 딜런의 연인이었던 수즈 로틀로가 자기를 다루는 데 있어 그동안의 저술이 항상 빼먹는 것 같아 불만을 갖고 있었던 점, 그러니까 “재미”까지 <아임 낫 데어>는 겸비하고 있다. 토드 헤인즈는 이미 <벨벳 골드마인>이라는 독창적인 음악영화의 연출로 글램록 시대와 그 영웅 데이비드 보위의 기괴하고 매력적인 초상을 상상해낸 경력이 있다. 그리고 연이어 <파 프롬 헤븐>에서 보여준 것처럼 특정 문화에 관한 예민한 감식안을 갖고 있음도 사실이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문화에 통달한 그보다 이 프로젝트에 더 합당한 적임자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아임 낫 데어>라는 제목은 물론 밥 딜런의 곡에서 가져왔다. 1966년 밥 딜런은 급작스러운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뒤 몇년간 칩거하며 더 밴드(마틴 스코시즈의 음악다큐 <라스트 왈츠>의 주인공들)와 함께 우드스탁의 빅 핑크 별장에서 연주와 녹음을 하며 보낸다. <아임 낫 데어>라는 곡은 당시 연주 녹음된 것으로 1975년 발매된 <지하실의 테이프들>(The Basement Tapes)에 실릴 예정이었지만 실제 발표되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해적판으로 떠돌다가 <The Genuine Basement Tapes, Vol2>(1992)에 실렸고, 이번 사운드트랙에도 들어갔다. 이 제목은 “여러 명의 밥 딜런이 등장하는 것을 가리키는 제목으로 합당하다”는 의미에서 지어졌고, 또 하나는 토드 헤인즈 개인에게 이 말(나는 거기에 없다)이 프랑스의 낭만주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시구를 생각나게 했기 때문이다(“나는 타자다.”).

상상과 추론에서 탄생한 여섯 배우의 여섯 얼굴

특이한 제목만큼 흥미로운 건 캐스팅이다. 케이트 블란쳇, 마커스 칼 프랭클린, 벤 휘쇼, 크리스천 베일, 히스 레저, 리처드 기어 등 스타와 신인들이 제각각 밥 딜런의 일면을 연기한다. 특히 남자 밥 딜런을 연기하는 여자배우 케이트 블란쳇의 역할 ‘주드’가 화제인데, 토드 헤인즈는 “처음부터 주드 역에는 여배우를 생각하고 있었다. 1966년 당시 누구와도 닮지 않았던 깡마른 모습의 밥 딜런이 갖는 기묘한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설명한다.

주드(케이트 블란쳇), 우디 거스리(마커스 칼 프랭클린), 아르튀르 랭보(벤 휘쇼), 잭/존(크리스천 베일), 로비(히스 레저), 빌리(리차드 기어). <아임 낫 데어>는 특별한 설명없이 이 여섯 인물의 이야기를 교차시키며 전개한다. 그 인물들은 각자의 이름을 갖고 있지만 실은 다 밥 딜런이다. 주드는 포크 음악을 등지고 백밴드들과 함께 전자기타를 메고 연주하는 것으로 전향한 시기의 밥 딜런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포크와 시대를 배신한 명목으로 대중과 언론의 지탄에 시달리던 상황이 묘사된다. 우디 거스리는 젊은 시절 밥 딜런의 우상이었던 컨트리 음악가 우디 거스리의 실명을 가져온 것이다. 백인인 우디 거스리를 흑인 소년으로 바꾼 뒤 밥 딜런의 유년 시절에 이입한, 재치 넘치는 가정이다. 랭보의 경우는 음악적인 면모보다 언어를 다루는 시인의 기질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고, 밥 딜런이 했던 특정 기자회견의 모습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영화에서 “시대의 양심”으로 불리는 잭은 당연히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를 중심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데뷔 초기 포크계의 밥 딜런을 상기시킨다. 그 잭이 종적을 감추고 20년 뒤 음악가에서 목회자로 변신하여 ‘목사 존’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크리스천 베일은 이때도 존을 맡아 일인이역을 한다. 한편 <아임 낫 데어>에는 영화 속 영화가 삽입되는데, 사라진 전설의 포크 가수 잭에 관한 영화에서 잭의 역할을 로비라는 배우가 맡는다. 이때 로비는 밥 딜런의 연애사와 가정사에 대한 부분을 대변한다. 마침내 가장 뜬금없이 등장하는 서부 사나이 빌리는 밥 딜런이 조연으로 출연했던 샘 페킨파 영화 <관계의 종말>의 주인공 빌리 더 키드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왔다. <관계의 종말>에서 밥 딜런이 맡았던 역할 앨리아스는 무법자 빌리 더 키드를 선망하여 따르는 추종자 중 한명이다. <아임 낫 데어>에서는 이들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전개된다.

토드 헤인즈가 <아임 낫 데어>에서 야심차게 추진한 건 이미 말한 대로 밥 딜런을 연기하는 이 여섯 배우의 여섯 얼굴 혹은 일곱 얼굴(크리스천 베일이 연기하는 목사 존을 따로 떼어낸다면)을 통해 밥 딜런을 추정하는 것이다. 그러니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아임 낫 데어>가 밥 딜런의 각각의 시기를 인물들의 분할을 통해 대변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은 각 시기를 대변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저 상상과 추론에서 왔다. <아임 낫 데어>는 결국 밥 딜런의 생애는 어떠했나, 밥 딜런은 누구인가, 보다는 밥 딜런이라는 수수께끼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라는 문제가 된다.

밥 딜런이라는 수수께끼의 만끽

먼저 부인할 수 없는 사실들이 있다. 포크 음악계의 신기원, 그러나 1965년 뉴 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전자 기타음을 선사해 포크 음악을 기다렸던 대중을 분노케 한 일, 1966년 영국 맨체스터의 프리 트레이드 홀 공연장에서 있었던 관중과의 설전, 각종 기자회견장에서 벌인 언론인과의 언쟁, 오토바이 사고, 각종 염문설과 마약. 하지만 사실의 변형도 있다. 밥 딜런이 영화를 연출하거나 출연한 적은 있지만 그는 영화배우가 아니다. 영화배우 로비는 사실의 변형에서 온 인물이다. 실제 밥 딜런의 애인이었던 수즈 로틀로와 아내 사라 라운즈를 합쳐놓은 듯한 인물 클레어. 그녀와의 갈등은 로비가 맡는다. 영화는 밥 딜런의 유명한 거짓말까지도 담아낸다. 밥 딜런이 컬럼비아 레코드와 첫 앨범 계약 당시 한 말, “뉴욕까지 화물열차를 타고 왔다”는 건 거짓이었지만 토드 헤인즈는 그걸 알면서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영화 속에서 우디 거스리를 화물열차에, 그리고 빌리를 다시 그곳에 태운다. 중요한 건 그 거짓말이 오랫동안 밥 딜런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면 그 역시 담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더해지는 상상. 밥 딜런은 가스펠을 부른 적은 있지만 목회자가 된 적은 없다. 포크음악의 대변인 잭에서 목회자 존으로 바뀌는 건 밥 딜런의 음악적 추이에 대해 상상적 스토리로서 응대하는 토드 헤인즈의 방식이다. <아임 낫 데어>라는 밥 딜런의 육면체는 사실과 사실의 변형과 버젓이 인정받고 있는 오해 또는 편견 또는 거짓말과 거기 더해진 토드 헤인즈의 상상력까지 다양하며, 밥 딜런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물었을 때 빈칸에 채워지는 건 이런 것들이다. <아임 낫 데어>를 보는 특별한 즐거움이다.

“인간은 모두 자유를 원한다. 자기 방식으로 사는 자유. 그런데 어떤 방식에 맞춰 산다면 자유는 그만큼 줄어든다. 나는 시시각각 변할 수 있다. 잠에서 깰 때의 나와 자러 갈 때의 내가 다르고 마치 한 공간에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내가 있는 것 같아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예측할 수 없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내레이션이다. 오래전에 시인 랭보는 그 말을 좀더 간명하게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누군가가 나를 생각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말의 유희를 용서하라. 나는 타자다.” 그리고 밥 딜런은 더 간명하게 말했다. 아임 낫 데어.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