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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 역사상 가장 계몽적인 영화 <월·E>
김혜리 2008-08-06

픽사의 용감한 두뇌는 거꾸로 생각할 줄 안다. 여름용 가족영화인 주제에(?) <월·E>는 더없이 고요하고 황량한 패망의 이미지로 시작한다. 2810년, 오염되어 버려진 지구에는 쓰레기 마천루가 하늘을 찌른다. 거기서 관객을 맞는 살아 움직이는 존재라고는, 작달막한 로봇과 바퀴벌레 한 마리가 전부다. 심지어 초반 30분은 대사 한마디 없다. 그러나 지구에 홀로 남아 시시포스처럼 쓰레기를 분리하고 쌓아올리는 로봇 월·E의 일상과 고독, 따스한 심성을 완벽하게 전달하는 30분의 팬터마임은 숨막히는 시다.

우리의 주인공은 성실하지만 수줍고 서투르다. 동료 로봇들이 모두 방전된 다음에도 월·E가 홀로 살아남은 이유는 (짐작건대) 스스로를 태양열로 충전하고 수리할 줄 알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월·E는 인격과 감정을 발현하도록 진화했다. 그는 폐기물의 성분만 인식하는 게 아니라 취향을 적용하고 가치를 판단한다. 다이아몬드 반지가 든 케이스를 보면 반지는 버리고 상자를 챙기는 이 괴짜 수집가가 좋아하는 물건은 전구, 지포라이터, 루빅스 큐브 등등. 일과가 끝나면 월·E는 잊혀진 평범한 뮤지컬 <헬로, 돌리>의 비디오를 황홀하게 바라보다가, 차곡차곡 정리한 물건들 곁에 나란히 누워 잠든다. 영화 속 연인들처럼 누군가의 손을 잡는 꿈을 꾸며. 그런데 기적이 일어난다. 정체불명 우주선을 타고 온 예쁘고 쌀쌀맞은 식물 탐사 로봇 이브를 만난 월·E의 심장은 합선될 지경이다. 프로토콜의 장벽을 넘어 친구가 된 두 로봇은 <맨하튼>의 우디 앨런과 다이앤 키튼을 연상시키는 그림을 연출한다. 월·E가 발견한 풀포기 덕에 임무를 완수한 이브가 귀향길에 오르자 일편단심 월·E는 우주선에 밀항한다. 그들이 도착한 호화판 우주정거장에는 소비와 탐욕으로 지구를 망친 인류의 후예들이, 퇴행한 우량아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 예고하자면 <월·E>는 픽사 역사상 가장 계몽적인 영화다.

<니모를 찾아서>에서 물고기의 감정과 퍼스낼리티를 그렸던 앤드루 스탠튼 감독과 픽사 애니메이터들은, 코도 입도 없는 로봇과 더불어 우리를 울고 웃게 만든다. 인간 형상을 모방한 안드로이드형 로봇이 아니라 철저히 기능을 반영한 생김새의 월·E는 픽사 로고의 탁상 스탠드‘룩소’와 동류다. 즉 캐릭터처럼 보이도록 디자인된 기계가 아니라, 기존 사물에 인격을 불어넣은 쪽이다. 쌍안경 형태의 눈 하나로 동경부터 공포에 이르는 감정을 표현하고 최소의 움직임으로 성격을 제시하는 솜씨는 감탄스럽다. 또, 볼트와 너트가 노출된 월·E의 투박한 모습은 애플사가 내놓은 신제품 디자인처럼 보이는 이브의 그것과 효과적 대비를 이룬다. 오래된 것과 첨단의 만남은 극히 고전적인 스토리를 미래에 대한 합리적 전망과 결합시킨 <월·E> 전체를 지배하는 미덕이기도 하다. 별똥별처럼 쏟아지는 고전영화의 인용도 흐뭇하다. <모던 타임즈>에서 사랑에 빠진 채플린의 연기, 자크 타티풍의 코미디, <에이리언>과 <스타워즈>를 위시한 명작 SF들의 파편이 곳곳에서 반짝거린다. 무엇보다 <월·E>는 오랜만에 보는 사려 깊은 SF영화다. 앤드루 스탠튼은 과학기술의 폐해를 경고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로봇 월·E를 통해 테크놀로지가 보유한 치유의 기능까지 돌아본다. “우리는 생존하는 게 아니라 살아야 한다”는 우주정거장 선장의 대사는 이 영화의 키워드다. 우리는 다만 소비하며 제 생명만 부지하는 존재가 아니라 기술을 도구삼아 (로봇을 포함한) 인간 아닌 존재들과 공존하며 세계를 가꾸어야 한다고 <월·E>는 속삭인다. 이 영화를 보며 미소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혹시 자신의 등에 바코드가 찍혀 있지 않은지 확인해보길 감히 권한다.

tip/ <월·E>는 반드시 상영시각에 늦지 않게 도착해서 크레딧의 끝까지 자리를 지켜야 할 영화다. 픽사의 관례대로 본편에 앞서 단편 <프레스토>가 상영된다. 마술사 프레스토가 파트너 토끼에게 제때 당근을 주지 않았다가, 토끼의 태업에 혼쭐이 난다. <월·E>의 엔딩 크레딧은 라스코 동굴벽화부터 근대까지 서양미술사조에 따라 각기 다른 화풍으로, 생명을 찾은 지구의 풍경을 그린 그림들의 전시회다.

<월·E>의 작명법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컴퓨터 HAL9000이 IBM의 알파벳을 하나씩 앞으로 당겨서 명명됐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월·E의 이름은 대량생산된 무수한 로봇에게 부여된 단순한 제품명이다. 지구 폐기물 분리수거 로봇이라는 뜻으로 WALL-E , 즉 Waste Allocation Load Lifter-Earth Class의 머리글자를 땄다. 그를 개발한 회사가 유통 재벌인 거대 기업 바이 앤 라지(Buy n Large)라는 점을 고려하면 월마트를 암시하지 않느냐는 의견도 항간에 있다. 외로운 아담 앞에 나타난 이브처럼 월·E의 연분이 된 로봇 이브의 이름은 외계 식물 탐사용 기계를 뜻하는데, Extra-terrestrial Vegetation Evaluator에서 왔다. 월·E와 더불어 벤 버트가 목소리를 연기한 우주정거장 청소로봇 모(M-O) 역시 미생물 박멸 로봇 Microbe Obliterator이라는 단어에서 귀여운 이름을 얻었다. 세 로봇이 나누는 대화의 주종은 자기 이름과 상대 이름을 억양을 달리해 부르는 것이라 그들의 이름은 곧 주요 대사이기도 하다. 한편 “모든 행복을 준다”고 광고하며 인간을 행복한 가축처럼 살게 하는 우주정거장의 이름은 액시엄으로 붙여졌다. 액시엄(Axiom)은 자명한 공리를 뜻하는 단어. 논리적 증명을 구하지 않고 무조건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폐쇄된 자급자족적 세계에 걸맞은 작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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