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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눈물나게 고맙소

20년 전 어느 날 아버님께서 새로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선 목동으로 이사하겠다고 하셨다. 당시에는 아파트들만 덩그러니 있었고, 편의 시설이 거의 없었다. 상업용 건물들이 지어질 땅들은 수년간 텅 빈 채로 잡초만 무성했다. 넓디넓은 도로에 차가 없어 무단횡단하기 좋았는데, 어느 날 고지식한 경찰에게 잡혀 과태료를 물기도 했다. 몇년 뒤 결혼하면서 부모님 댁 근처에 전세아파트를 얻었다. 얼마 뒤 아버님은 은행 빚을 얻어 근처의 작은 평수 아파트를 사라고 권유하셨다. 사회초년생이라 경제관념이 부족했으므로 평생 건설업에 종사한 분의 충고를 따랐다.

은행이자와 원금을 갚고 나면 남는 돈이 거의 없어 사람 만나기가 무서웠다. 술값이라도 내면서 품위를 유지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목동 안에서 빚을 얻어 조금 넓은 아파트를 사고 다시 빚을 갚는 일을 반복하여 마련한 아파트가 지금의 아파트다. 그 아파트를 사고 나서는 아파트 평수를 늘리기 위해 인생을 계속 허비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목동에 각종 방송국을 비롯하여 그럴듯한 건물들이 들어오고 심지어 한국 최고층 빌딩도 지어졌다. 인생을 교육사업에 바치는 어머니들이 목동에 늘어나더니 점점 아파트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결국 몇년 사이에 오른 아파트값이 10년 가까이 저축해서 그 아파트를 산 값보다 훨씬 많았다. 그래서 졸지에 팔자에 없는 종부세 대상자가 되었다. 대체로 돈을 많이 번다는 직업을 가졌지만 딴 일에 정신이 팔려 실속이 없었으므로 대상자가 된 것은 오로지 20년 전 아버님께서 목동으로 가셨기 때문이다.

아무튼 중산층의 공식에 따라 내 집을 마련한 것뿐이므로 고지서를 받았을 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긴긴 세월 모아야 할 돈이 통찰력있는 아버지 덕에 생겼으니 세금을 더 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세금이 부담스러우면 가격이 싼 지역에 집을 구하고 차액은 은행에 저금하면 되는 것 아닌가? 오랫동안 버블세븐 지역에 살았다고 계속 거기에 살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투기를 한 것은 아니지만 불로소득을 얻었으니 세금을 더 내는 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비싼 집을 산 분들은 능력이 있으니 세금을 더 내는 게 당연하다. 집이 여러 채인 분들은 말할 나위도 없다. 유체이탈이 가능한 분들이라 한집에는 몸이 살고, 다른 집에는 영혼이 사나? 참 이해가 안 가는 변태들이다.

그런데, 얼마 전 헌법재판소가 내 편협한 생각을 고쳐줬다. 종부세는 ‘결혼했지만 각자 자기 소유의 집에 살다가 섹스할 때만 만나는 변태들 아니 진보적인 커플들’을 차별하는 것으로서 위헌이라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내친김에 정부여당은 유례없는 경제위기의 시대에도 바쁜 시간을 쪼개 관련법을 개정한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 내 집 마련하다가 로또에 맞은 것뿐인데 괜한 미안함에 사로잡혀 부당한 세금에 결연히 항거하지 못했다. 요사이는 집값도 마구 떨어지는데 종부세라니 너무한 것 아닌가? 팔 것도 아닌 집이 비싸졌다고 현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잠이 더 잘 오는 것도 아닌데 세금폭탄은 너무했던 것 같다. 새로 마련된 개정안에 따르면 내년부터는 종부세를 안 내도 된다. 가뜩이나 어려운 시절에 눈물나게 고맙다. 10원 한장 그냥 주는 사람 없는 시대에 매년 수백만원의 현금을 안겨주니 역사니 정의니 하는 쓸데없는 생각 집어치우고 다음 선거부터 이분들을 지지해야겠다. 나도 이제 철이 드나 보다. 그런데 종부세를 낼 일이 없는 사람들이 이분들을 지지하는 건 참 이상하다. 하지만 세상에는 자신의 이해관계와 어긋나도 옳다고 생각하면 그것에 승복하는 사람들이 많은 법이다. 나도 얼마 전까지 그랬지 않나? 사리에 맞으면 포퓔리슴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책을 추진하는 애국지사들과 비록 자신에게 불리해도 이를 과감하게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 이 나라의 장래는 밝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