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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뱀파이어 딜레마

두개의 뱀파이어 영화가 관객의 목을 물어주려고 기다린다. 본래 겁이 많아 공포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데 <렛미인>을 보고 싶은 마음은 공포심을 이겨냈고 보답을 받았다. 그에 반해 <트와일라잇>은 흥행의 예감을 하면서도 ‘하이틴 로맨스’로 추정돼서 기피했다. 그런데 보고 싶지 않은 영화도 우여곡절 끝에 보는 것이 인생 아닌가? 막상 본 <트와일라잇>은 흥미롭긴 했다. 하지만 중학생 딸에게 추천할 수는 있어도 내가 맘껏 즐길 수는 없었다.

두 영화를 보고 나서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영화와 무관한 생각이다. 내가 보기에 두 영화의 커다란 차이점은 <렛미인>을 만든 사람들은 “자신이 뭘 보여주고 싶은가”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트와일라잇>을 만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뭘 보고 싶어 하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이다. 뜻을 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거친 표현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해본다면, <렛미인>은 만드는 것 자체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 ‘예술’이고, <트와일라잇>은 만들고 나서 자신들에게 돌아올 보상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 ‘사업’이다. 내가 만일 두 영화를 만든다면 <렛미인>은 ‘의미’ 때문에, <트와일라잇>은 ‘화폐’ 때문에 만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둘 중 하나만 만들어야 한다면 해결할 수 없는 고민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매우 오래된 딜레마인데, 이 딜레마는 ‘꿈과 현실의 충돌’이라는 진부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딜레마는 인생의 고비마다 등장하여 우리를 잠 못 이루게 하며, 그때 내려진 각 결론들은 삶의 분수령이 되어 우리를 다른 운명에 이르게 한다.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날마다 내리는 무수한 선택 중에서 이와 무관한 선택은 점심메뉴 따위를 논외로 하고 나면 오히려 드물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물론 현실 자체가 그대로 자신의 꿈인 사람들도 적지 않다. 저녁뉴스 시간에 TV를 켜면 자주 보이는 ‘불유쾌한 몽타주를 가진 분들’이 대표적이다. 이분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한강 부근의 커다란 둥근 지붕이 있는 건물에서 자기들끼리 서로 고함을 치고 막말을 하며 보내신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풀 수 없는 딜레마 때문에 밤을 하얗게 지새운다.

나는 좋은 사회란 사람들을 꿈과 현실의 딜레마로 내몰지 않거나, 그중 하나를 선택한 결과가 극단적이지 않은 사회라고 생각한다. 꿈과 현실이 합치되는 사회란 어차피 없으므로 그 괴리가 적을수록 좋은 사회다. 그리고 꿈을 선택하더라도 가난하게 살거나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할지언정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게 해주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그런데 지금 이 사회는 어떠한가? 이 사회는 현실이 아닌 꿈을 선택하는 사람들을 위해 실직이나 감옥이나 모멸이나 모진 가난을 예비해둔다. 그리고 그것이 두려워 현실을 선택한 사람들은 꿈을 잃은 절망감과 무의미한 노동으로 하루하루를 허비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세상인가? 아니면 도대체 어느 누가 원하는 세상인가?

사막 같은 겨울이 깊어간다. 수많은 사람들이 ‘불유쾌한 몽타주를 가진 분들’과 경제위기로 인해 잉태된 고통과 절망을 속수무책으로 기다린다. 이 겨울은 무척 길고 외로울 것이다. 잔인한 현실의 협박에 항복하지 않은 채 아직 꿈을 껴안은 당신에게는 더욱 길고 외로울 것이다. 하나 희망은 어느 날 문득 오기도 하는 법. 당신은 그때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삶을 진정 사랑하고, 삶을 사랑할 자격이 있는 당신은 반드시 살아남아 이 모진 세월과 동정없는 세상을 기필코 증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