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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의 독설] 한국에서나 잘하세요

‘할리우드’를 전면에 내건 전지현 주연의 <블러드> 뉴스를 보고 든 단상

<블러드>가 전지현의 할리우드 진출작이라는 기사가 여기저기에서 나왔다. <블러드>에는 일본과 프랑스 등의 자본이 들어갔을 뿐 할리우드 영화사는 참여한 적이 없다. 논란이 일자 <블러드>의 수입사와 배급사 등에서는 할리우드영화라고 발표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자 어딘가에서 북미지역에서 상영된 ‘광의의 할리우드영화’라는 말도 나왔다. <블러드>는 아직 북미에서 개봉하지 않았고, 7월경으로만 일정이 잡혀 있다. 게다가 그런 논리라면 <디 워>도 할리우드영화에 포함되는 것일까? 물론 요즘에는 영화의 국적이 큰 의미가 없다고 볼 수도 있다. 한편의 영화에 몇개국의 영화사가 공동으로 참여하거나 제작비를 투자하는 것은 이미 흔한 일이 되었다.

‘일본 원작 영화화한 화제작’이 더 맞는 표현

굳이 이해해준다면 전지현이라는 배우가 할리우드 시장에 본격적으로 한발을 내딛는 영화 정도가 될 텐데, <블러드>가 그런 역할을 할는지는 의심이 간다. <블러드>는 일본에서 꽤 인기를 끌었던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의 영화판이다. 2000년 만화, 애니메이션, 소설, 게임으로 동시에 기획된 프로젝트가 이제야 영화로도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블러드>가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기획과 원안은 <공각기동대>의 오시이 마모루 아닌가. 다만 애초에 <블러드>가 할리우드를 넘볼 대작은 아니다. 북미지역 사람들은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고, 마니아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일본 원작을 영화화한 화제작이라는 사실보다 굳이 ‘할리우드’를 전면에 내건 이유는 북미시장에서의 성공을 기원하는 의미인 것일까?

‘할리우드 진출’에 그렇게 무게를 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할리우드 진출은 좋은 일이다. 한국의 배우가 전세계에서 개봉되는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쁘다. 비나 이병헌의 경우처럼. 혹은 과거의 박중훈처럼. 다만 할리우드영화에 출연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최종 목표가 궁금하다. 할리우드에서 스타가 되는 것? 한국시장은 너무 좁기 때문에 세계로 진출하여 국제적인 스타가 되는 것?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시장이 작기 때문에 많은 제작비를 들인 영화를 만들려면 필연적으로 해외시장을 노려야 한다고 흔히 말한다. 그 결과 많은 한국영화들이 한류 붐을 타고 100억원 이상의 제작비를 들여 만들어졌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와타나베 겐·성룡·이연걸·주윤발 등을 보라

배우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에서 확고한 고정팬을 가진 배용준은 여전히 잘나가지만, 다른 한류 스타들은 그저 그렇다. 이병헌만 해도 일본에서 개봉한 영화는 다 실패했다. 그렇다면 할리우드 진출은 어떨까? 나는 한국의 배우들이 할리우드에 가서 스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단 전례를 보자. 일본의 와타나베 겐이 <라스트 사무라이>와 <배트맨 비긴즈>에 나왔다고 해서, 아카데미 후보에 오른다고 해서 그가 할리우드의 스타가 되진 않았다. 홍콩의 성룡과 이연걸, 주윤발 등이 할리우드에 가서 당당히 주연까지 맡았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그들이 잠시나마 할리우드의 주류에 낄 수 있었던 이유는, 홍콩영화와 무술영화라는 트렌드가 이미 북미 영화시장에 깊이 침투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성룡은 할리우드로 가기 전에 <홍번구> 등으로 북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고, 주윤발 역시 <와호장룡>으로 1억달러를 넘게 벌어들였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스타들이 할리우드로 가서 세계적인 스타가 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단순한 인종차별이 아니다. 북미사회의 주류인 백인은, 다른 피부색의 스타를 그다지 원하지 않는다. 게다가 백인 스타는 전세계에서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진다는 장점도 있다. 흑인은 윌 스미스나 덴젤 워싱턴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세계적인 스타가 되기 힘들다. 그러나 북미에서 확고한 흑인시장이 있다. 아이스 큐브 같은 흑인들만의 스타가 출연하는 <바버샵> 같은 영화도 비수기에는 충분히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다. 성룡과 이연걸이 주로 흑인 배우들과 공동주연을 맡았던 이유는, 무술영화의 주요 관객이 흑인이었기 때문이다. 히스패닉 역시 흑인을 능가하는 인구 수와 파워를 자랑하기 때문에 충분히 시장성이 있다. 반면 아시아계는 흑인이나 히스패닉에 비하면 현저하게 열세다. 아시아 스타는, 백인이나 흑인 대중이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김윤진이 <로스트>에서, 그레이스 박이 <배틀스타 갤럭티카>에서 인기를 끌어도, 그들이 블록버스터의 주연을 맡기란 결코 쉽지 않다. 존 조가 <해롤드와 쿠마>에서 최고의 코미디 연기를 보여주었어도, <스타트렉: 더 비기닝>에서 인상적인 조연을 맡기 전까지 그는 대중적인 스타가 아니었다. 대니얼 헤니가 <엑스맨 탄생: 울버린>에서 매력을 과시했지만, 그가 과연 톱스타가 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아시아계 배우가 연속으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주연을 맡을 정도로 성장한 경우는 없었다.

국내 관객과 좀더 많이 소통했으면

블록버스터의 주연이 아니라고 해도, 상황이 크게 바뀌지는 않는다. 북미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는, 기본적으로 북미의 관객을 타깃으로 한다. 어쩔 수 없이, 다수의 대중이 수월하게 받아들일 만한 배우와 배경을 택하게 마련이다. 영화만이 아니라, 북미사회에서도 아시아인은 비주류다. 아시아계 감독이 지역사회를 배경으로 영화를 만들거나 <해롤드와 쿠마>처럼 특이한 영화를 만들겠다고 작정하지 않는 이상 소수 인종 배우가 주연을 맡기란 결코 쉽지 않다. 물론 길은 있다. 뛰어난 연기력이 있다면 블록버스터건 저예산영화건 가리지 않고 출연할 수도 있다. 연기력이 뛰어난, 적재적소에 필요한 배우는 언제나 필요하니까.

다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란 생각이 든다. 김윤진이나 대니얼 헤니처럼 미국에서 자라나 완벽하게 영어가 되고, 문화적인 공유도 가능하다면 할리우드 활동이 더 좋을 수 있다. 하지만 문화적 관습과 환경이 전혀 다른 한국의 배우가, 굳이 할리우드에서 조연으로 연기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보다는 한국에서 더 많은 영화에 출연하여 뛰어난 연기력을 과시하고, 대중과 호흡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국제적인 스타가 되고 싶다는 야심이 나쁘지는 않지만, 현실적인 장벽이 너무나도 커서 하는 말이다. 솔직히 말해,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배우가 할리우드에 가서 톰 크루즈 같은 스타가 되기는 100% 불가능한 일이다. 일본 배우도 마찬가지고, 홍콩 배우도 마찬가지다. 여자고, 남자고 관계없이.

<블러드>가 ‘할리우드 진출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든 생각도, 전지현이 더 많은 한국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면 얼마나 좋았을까, 란 것이었다. 전지현이란 배우가 한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전지현은 <엽기적인 그녀>를 제외하고는 인상적인 작품을 남기지 않았다. CF도 작품에 포함한다면 꽤 있지만, 영화와 드라마는 거의 기억에 남지 않는다. 그나마 <엽기적인 그녀> 하나라도 있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그래도 전지현이 더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했다면 이미지로만 승부하는 배우보다는 훨씬 더 좋은 배우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왜 한국의 배우들은 유난히, 영화나 드라마 하나가 히트하면 그토록 오랜 휴식기간을 가지면서 뜸하게 출연을 하는 걸까? 나는 그 이유가 정말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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