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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석의 블랙박스] 그 몸짓의 황홀

<거북이 달린다>

<거북이 달린다>에서 조필성(김윤석)이 등을 돌려 저 멀리 걸어나가던 그때였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그가 어정쩡한 팔자걸음으로 터벅터벅 뛰는지 걷는지 모를 속도로 후경으로 전진할 때 그가 연루된 어떤 사건과 말들을 넘어 비로소 저 인물의 속성을 들여다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때의 팔자걸음이 인간 김윤석의 것이기보다 인물 조필성과 베우 김윤석이 만났을 때 생성된 창조력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고 나서 영화 속 남자들의 몇 가지 걸음을 쉼없이 나열하고 싶어졌다. 찰리 채플린이 지팡이를 짚고 또각또각 걸어다닐 때 그는 모던함 속 고아라는 느낌을 심어주었다. 그의 상대자 버스터 키튼이 굴러오는 돌에 어쩔 줄 몰라 하며 헤맬 때 위대한 무표정(버스터 키튼의 유명한 별명)의 표정은 그 걸음에서 온다. 도시로 미후네가 적장과 결전을 벌인 뒤 양 소매에 팔짱을 낀 다음 어깨를 씰룩이며 걸어갈 때 그의 걸음은 세상을 등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걸음걸이는 원래 그의 것이지만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생략하자.

기타노 다케시가 걸어가는 모습은 도시로 이후 일본영화에서 가장 양식적이다. 그의 실패작 <돌스>가 기억되어야 한다면 결국 그것 때문이다. 병약하지만 처연한 걸음걸이도 있다. 젊은 여인만 보면 사족을 못 쓰는 저 변태 늙은이 조앙 세자르 몬테이로는 한 발짝 걸을 때마다 병든 흡혈귀의 마지막 색정을 흘린다. 잊었다가 나이가 들어 다시 떠올린 걸음은 장동휘의 그것이다. 그의 걸음은 포화 속 적진으로 뛰어들 때조차 매너로 넘쳐난다. 또는 여인을 만나러 갈 때조차 싸움을 하러 가는 것 같이 걷는 황해와 싸움을 하러 갈 때에도 연애를 하러 가는 것 같은 허장강의 휘적거리는 걸음은 정반대의 것이다. 비범한 배우들은 그들 각자의 뛰어난 몸의 서술을 지녔다. 비교를 위해 남자의 걸음걸이만 말했는데 언젠가는 여자들의 손놀림을 말할 수도 있을 거다. 윤여정은 언젠가 배두나의 연기를 극찬하며 그녀의 자연스러운 손 처리를 말했는데, 백분 공감한다. 영화를 보고 말할 때의 쾌감은 때로 분석될 것 같지 않은 대상에 대한 연모와 모험심에서 온다. 배우의 몸의 서술은 그런 쾌감을 자극하는 존재이고 너무 매혹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