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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호러영화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은 왜 논란이 되고 있나
김도훈 2009-08-06

소문이 자자했다. 지난 10여년간 만들어진 호러영화 중 가장 괴로운, 두려운,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그러나 끝까지 볼 수밖에 없는 영화라고 했다. 파스칼 로지에의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 이야기다. 부천에서 먼저 공개된 이 영화는 오는 8월6일 국내 개봉한다. 보기 전에 한 가지 명심할 게 있다. 이건 끔찍한 육체적 고어영화가 아니다. 눈알도 내장도 나오지 않는다.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은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는 듯한 정서적 충격을 안겨주는 형이상학적 고문극이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브누아 레스탕이 죽었다. 자살이었다. 그는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늑대의 혈족> <잠수종과 나비> <아르센 뤼팽>에 참여한 프랑스의 베테랑 특수분장가로, 파스칼 로지에의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이하 <마터스>)이 칸영화제 마켓에서 공개된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서는 없었다. 억측이 난무했다. 인터넷 호러영화 포럼들에서는 <마터스>가 그를 죽였다는 풍문이 돌아다녔다. 이유인즉슨, 브누아 레스탕이 완성된 영화를 보고는 정신적인 충격에 빠졌거나 혹은 영화의 결말에 너무나도 심취한 나머지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결말에 관련된 두 번째 풍문은 스포일러가 될 테니 여기서 밝힐 수 없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브누아 레스탕은 <마터스> 이전에도 무시무시한 작업들을 해낸 특수분장계의 거물이다. 자신이 창조한 환상에 겁을 집어먹거나 감화되어 목숨을 끊을 리는 없다.

특수분장 스탭의 죽음, 그리고 등급 분쟁

다만 억측들이 만들어진 까닭도 이해는 간다. <마터스>는 <프론티어>나 <인사이드>처럼 극단적인 폭력으로 전세계 호러영화계를 휩쓰는 ‘프랑스 호러 뉴웨이브’(박스 참조)의 어떤 정점이라 할 만한 영화다. 영화 등급에 관련해서라면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 중 하나인 프랑스에서 <마터스>를 두고 등급 분쟁이 일어났다는 걸 돌이켜보자. 지난해 프랑스의 ‘영화작품등급위원회’는 <마터스>에 ‘18등급’(18세 미만 관람불가)을 매겼다. 극단적인 폭력과 섹스 영화들도 ‘16등급’(16세 미만 관람불가)을 무리없이 받는 나라에서 18등급은 전례없는 대사건이었다. 언론과 영화사의 항의로 스캔들이 벌어지자 영화작품등급위원회는 다급히 <마터스>에 16등급을 내렸다. 감독 파스칼 로지에는 말한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텍사스 전기톱 대학살>과 <시체들의 새벽>이 금지됐던 시대의 프랑스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영화작품등급위원회는 그저 <마터스>를 상업적으로 살해하고 싶었던 것이다.”

<인사이드> <호스텔>식 고어와 고문은 없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사실 <마터스>의 고어와 고문장면은 우리가 참을 수 없을 만큼 극단적이지 않다. 같은 프랑스영화 <인사이드>는 물론이고 미국산 고문영화인 <호스텔>이나 <쏘우> 시리즈보다 표현수위가 훨씬 얌전하다. 그럼에도 <마터스>가 전통적인 호러영화 마니아들 사이에서도 상상을 초월하는 익스트림 시네마로 소문이 자자했던 이유는, 이게 육체적이라기보다는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고문영화이기 때문이다. 파스칼 로지에 감독은 <호스텔>의 일라이 로스나 <인사이드>의 알렉상드르 뷔스티요처럼 극단적인 고어와 고문장면을 순수한 장르 마니아적 노리개로 사용하지 않는다. 산 자의 눈알과 내장 기관을 파헤치며 낄낄거리는 순간도 없다. <마터스>는 그보다 더 근원적인 질문을 장르의 법칙을 이용해서 관객에게 던지는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 루시는 폐공장에 갇힌 채 정체불명의 사람들에게 고문을 당하다가 탈출한다. 그로부터 15년 뒤. 루시(밀레느 잠파누이)는 전형적인 프랑스 중산층 저택에 들어가 평범한 네 가족을 총으로 몰살한다.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루시의 친구 안나(모르자나 아나위)는 현장을 보고 경악한다. 15년 전 함께 탈출하지 못한 여자의 유령에 시달리는 루시는 자신이 죽인 가족이 15년 전 가해자들이라고 말한다. 안나는 루시의 말이 진실인지, 그저 정신착란 증상인지 도저히 구분할 수가 없다. 여기서 영화는 갑작스럽게 반전한다. 정신병적인 소녀의 가족 살해극으로 흘러가던 영화는 루시의 갑작스러운 자살로 중단된다. 시체들을 처리하던 안나는 집의 지하로 통하는 숨겨진 통로를 발견한다.

<마터스>는 리뷰를 쓰는 입장에서는 정말이지 골치 아픈 영화다. 파스칼 로지에는 영화의 진정한 알맹이를 후반부에 담아놓았다. 지하실로 내려가서 비밀을 발견한 안나는 갑자기 들이닥친 생면부지의 사람들에 의해 밤이고 낮이고 고문당한다. 고어의 변태적 쾌락을 위한 <호스텔>식 고문은 아니다. 안나는 그저 뺨을 맞고 배를 차이는 현실적인 고문을 끊임없이 감내해야 한다. 누구도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다. 그녀 역시 더이상 이유를 묻지 않는다. 관객이 정서적으로 기진맥진해질 때까지 계속되던 고문이 끝나는 순간 마침내 <마터스>의 수수께끼가 시작된다. 이 기사에 첨부된 인터뷰에서 파스칼 로지에는 스포일러를 흘리지 않는 선에서 힌트를 남긴다. “고문을 받으면서 고통을 겪는 과정에서 안나는 현재의 세계를 초월한다. 영화 컨셉 자체가 종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마터스>를 통해서 신이 떠나고 없는 사회를 그리고자 했다.”

전·후반부를 전혀 다르게 쪼개고 뒤튼 충격

사실 <마터스>의 사과처럼 둘로 쪼개지는 내러티브에는 어느 정도 불가해한 서커스 같은 면이 있다. 전반부는 웨스 크레이븐 스타일의 할리우드 호러영화, 일본식 원혼영화를 연상시키는 피범벅의 복수극이다. 후반부는 모골이 송연한 고문영화이자 일종의 종교적 수난극이다. 이걸 전례없이 독창적인 드라마투르기라고 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엉기성기 이어붙인 드라마의 퀼트라고 볼 수도 있다. 파스칼 로지에 역시 애초부터 명확한 이야기를 머릿속에 그렸던 것은 아닌 듯하다. 그 역시 “전반부 루시의 복수 시퀀스로부터 점점 살을 붙여나갔다”고 말한다. “한 소녀가 중산층 프랑스 가족을 학살하는 게 시작이었다. 그걸 쓰고 나니 소녀의 과거가 궁금해졌다. 왜 이런 짓을 하게 된 걸까. 살을 덧붙여가다 보니 이야기는 점점 더 폭력적이 되어갔고, 폭력 그 자체가 영화의 주제가 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중요한 건 파스칼 로지에가 한 영화를 전혀 다른 두개로 쪼개고 뒤트는 방식이 어쨌거나 아주 재미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호러의 서브 장르들을 독창적으로 무너뜨리며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관객을 몰아간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가서야 모골이 송연한 해답(혹은 해답없는 질문)을 관객에게 툭 던지고 끝내버린다.

파스칼 로지에는 처음부터 열린 결말을 의도했다고 말한다. “호러 장르는 죽음의 비밀 등 근원적인 질문들의 열쇠를 당신에게 던진다. 그러나 절대 바로 해답을 내놓지 않는다. 왜냐하면 질문 자체가 매우 형이상학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형이상학에 답변할 수 없다. 우리가 호러영화를 보러가는 이유가 바로 그거다. 답변할 수 없는 해답을 찾기 위해서.” 물론 <마터스>의 답변할 수 없는 해답과 마주하기 위해서는 영화 사상 유례없이 극단적인 정서적 고어를 이겨내야만 한다. 이건 고통의 초월에 관한 영화인 동시에, 관객이 초월해야만 하는 영화적 고통이다. 고통의 끝에서 기다리는 건 비위가 상할 정도로 아름다운 영화적 환상이다.

<익스텐션>부터 <마터스>까지 프랑스 호러의 뉴웨이브인가

<프론티어>

왜 최근 프랑스에서 극단적인 호러영화들이 만들어질까. 캐나다 평론가 제임스 퀀트와 영국 <인디펜던트>의 조너선 롬니가 제기한 ‘뉴프렌치 익스트리미티’의 개념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은 지난 십수년간 프랑스영화들이 보여주는 극단적이고 노골적인 폭력과 성적 표현의 경향을 ‘뉴프렌치 익스트리미티’라고 부르며, 가스파 노에, 브루노 뒤몽, 캐서린 브레야 등을 사례로 거론한 바 있다. 조너선 롬니는 유래를 사드 백작, 구스타브 쿠르베의 미술 작품인 <세상의 근원>, 루이스 브뉘엘, 로만 폴란스키, 앙리 조르주-클루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퀀트와 롬니가 이야기하는 뉴프렌치 익스트리미티는 작가주의 영화들에 한정된 개념이라 볼 수 있다.

최근 뉴프렌치 익스트리미티는 21세기에 등장한 프랑스 호러 뉴웨이브를 일컫는 데 더 널리 사용된다. 알렉상드르 아야의 <익스텐션>(2003)으로부터 시작해 자비에르 젠스의 <프론티어>(2007), 알렉상드르 바스틸로, 줄리앙 모리의 <인사이드>(2007)를 거쳐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로 절정에 이른 프랑스 호러 뉴웨이브는 할리우드와 J-호러에서도 금기시되는 극단적인 고어의 향연들로 서구 영화계를 뒤흔들었다.

이 영화들은 호러영화의 살생부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고(아이들도 살상대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고어와 폭력을 대단히 일상적인 장면에서 툭툭 던짐으로써 정서적인 충격을 안겨준다는 공통점을 공유한다. 그러나 파스칼 로지에는 “프랑스 호러 뉴웨이브라는 단어를 믿지 않는다”고 자조한다. “프랑스에서 매년 만들어지는 호러는 서너편뿐이다. 모두 초저예산이다. 특정 장르가 이름을 가지기 위해서는 해당 국가의 영화계가 산업적으로 지지해야만 한다. 이탈리아가 600여편의 스파게티 웨스턴을 만든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프랑스에 호러 뉴웨이브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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