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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길티플레져] 정신차리면 계산대 앞!
2009-08-21

홍석우의 ’패트릭 에르벨 옷 모으기’

패트릭 에르벨 컬렉션

교이치 쓰즈키(Kyoichi Tsuzuki)라는 사진가가 있다. 에디터, 저널리스트, 아트 큐레이터 등으로도 활동하는 다재다능한 사람이다. 2000년대 초·중반 즈음 <류코추신>(流行通信)이라는 일본 패션지에 ‘Happy Victims’라는 사진 프로젝트를 연재한 적이 있다. 그가 렌즈에 담은 행복한 죄인들이란 한마디로 ‘패션 오타쿠’였다. 한 가지에 맹목적으로 빠져드는 사람들이 인구 대비 세계 최고일 것으로 확신하는 일본에서, 한개의 패션 브랜드‘만’ 사는 사람들 찾는 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아는 것만 해도 70명은 거뜬히 넘는 사람들이 마니악한 브랜드 추종을 보여줬다. 구찌, 에르메스 같은 브랜드부터 메종 마르탱 마르지엘라, 마르니 심지어 나이키도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오타쿠 문화의 정점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나는 저러지는 말아야지 했다.

나는 옷을 좋아한다. 이 글을 의뢰받고 주제는 옷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위에서 말한 ‘죄인들’처럼 살고 싶진 않았다. 세상에 예쁘고 멋진 옷이 얼마나 많은데 어떻게 한 브랜드만 파고들어? 저건 무슨 브랜드병(病) 아닌가? 자금은 한정되고 선택에는 기회비용이 발생한다. 초등학생 시절 배운 세상의 진리다. 무모하게 한 가지만을 추종할 마음은 내 사전에는 전혀 없다.

그러다 뭔가 툭, 하고 마음의 끈이 끊어진 것이 바로 패트릭 에르벨이라는 디자이너 때문이다. 서른 남짓 스웨덴 혈통의 미국 남자인 그는 패션 에디터에서 디자이너로 전업한 사람이다. 영감을 받으러 아프리카로 여행을 가는 존 갈리아노 같은 부류와 달리 나이키와 노스페이스의 윈드브레이커(바람막이)에서 클래식을 느낀다는 남자다. 지난해와 지지난해 청담동의 모 편집매장에서 바이어로 일하면서 그의 옷을 처음으로 국내 수입했다. 약간은 트렌디한 아메리칸 스포츠웨어 컨셉의 옷들. 다만 전혀 스포츠할 때 입을 수 없는 가격이었고, 극소수의 사람들은 열광했다. 좋아하니까 산 것이지만 입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다 지난해 가을 그가 만든 윈드브레이커를 세일 가격에 산 것이 실수였다. 모델 체형도 훈남도 아닌 내가 입었는데 뭔가 잘 어울렸다. 돈을 모아 또 무언가 샀다. 샴브레이 소재의 두툼한 셔츠였다. 그러다 또 무얼 하나, 또 무얼 하나. 아직까지도 이어진다.

인생에는 돈이 든다. 그중에서도 옷을 사는 일은, 게다가 뉴욕에서 컬렉션까지 하는 디자이너를 추종하게 된다는 것은. 아아, 내 노동의 대가는 거의 대부분 뉴욕으로 흐른다. 둥근 칼라 부분만 아이보리빛인 하늘색 옥스퍼드 셔츠, 웬 은박지를 입고 왔냐는 소릴 들었던 PVC코팅의 재킷, 기름 먹인 면으로 만든 야상점퍼까지. 이번 봄에도 그의 점퍼를 샀다. 그러나 당시 나는 여자친구에게 돈이 없다며 빌빌거릴 때였다. 그런데도 샀다. 당시를 회고할 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정신을 차리니 계산대 앞에’랄까. 어쩔 수 없이 샀어야 했다.

덕분에 교이치 쓰즈키의 사진 속 인물들(오타쿠들)을 이제는 이해한다. 덧붙여, 도를 넘은 애정이란 상대의 실수에도 관대해지는 것. 빨간 점퍼 하나는 처음 입자마자 셔츠에 빨간 물이 들었다. 드라이클리닝하라고 써 있던 야상점퍼는 하자마자 기름이 다 빠져서 후줄근해졌다. 그런 지금도 나는 점찍어둔 셔츠가 이미 팔렸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사실 모 편집매장의 창고에 현재 내 드림리스트 상위권에 있는 캐시미어와 코튼이 섞인 테일러드 재킷이 주무시고 계시다(전문용어로 ‘홀딩’이라고 한다). 여름이 끝나기 전에 얼른 데려와야지. 그래서 이 글은 여자친구가 보면 안된다.

홍석우 패션저널리스트, yourboyhood.com의 포토그래퍼. 편집매장 데일리 프로젝트의 의류/출판물 바이어를 거쳐 현재는 프리랜스 패션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당신의 소년기’(yourboyhood.com)라는 제목으로 서울 사람들과 풍경을 찍는 블로그도 운영한다. 지금은 문지문화원 사이(Saii)에서 패션에 관한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