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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훈 스토리 19] 욕 먹으며 지켜낸 12시간의 의미
박중훈(영화배우) 정리 주성철 2009-10-23

할리우드 시스템을 적용한 영화 <황산벌>과 톰 행크스와의 프로젝트 <비빔밥> 이야기

<찰리의 진실>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오사다’라는 일본 이름이었다. 특별하게 정해진 이름이 아니고 조너선 드미가 무척 자주 가는 스시집의 요리사 이름이 오사다였다. (웃음) 그런데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바꿀 수 없겠냐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바로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촬영 중 돌아가신 내 아버지 이름이었는데, 과거 내 첫 번째 할리우드 작품이었던 <아메리칸 드래곤>에 출연한다고 했을 때 가장 반색하신 분이 바로 아버지였다. 주변 사람들 열이면 열 모두 하지 말라고 했던 영화가 바로 <아메리칸 드래곤>이었다.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한국 배우가 왜 할리우드로 건너가 B급영화를 하냐는 거였다. 그때 아버지가 하셨던 충고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절대 자기 자신을 높여서 생각하지 마라, 그 어떤 경험도 버릴 경험이란 없다, 어떤 식으로든 네 미래에 밑거름이 될 테니 도전해보라는 말씀이셨다. 일상이 아버지 이름이라면 ‘이’는 바로 이명세 감독의 성에서 땄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아니었으면 이뤄질 수 없는 일이었으니 그에 대한 감사도 표시하고 싶었다. 그 이름만으로도 촬영에 임하는 내 기분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명세 감독, 2천만달러 거절한 이유는

이명세 감독은 마침 영화제 초청으로 프랑스 파리에 왔다가 <찰리의 진실> 촬영장을 방문한 적이 있다. 잠깐 다른 얘기를 하자면, 현장이 민주화된 할리우드에서도 촬영 모니터 주변에는 감독과 제작자, 그리고 스크립터 정도만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현장을 보면 한컷 촬영이 끝나면 배우부터 스탭까지 우르르 모니터 주변으로 몰려든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싫어하는 풍경인데 특별하게 부서별로 확인해야 할 게 있을 때나 감독과의 조율이 필요할 때 정도를 빼고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연출자와 촬영감독을 믿고 가야 하는 게 현장의 풍경이자 미덕이라고 믿는다. 모니터 앞에 장사진을 이루는 게 정보의 공유나 현장의 민주화라고 절대 생각지 않는다. 그런데 명세 형이 방문한 날, 조너선 드미가 가장 좋은 의자로 명세 형을 안내하더니 직접 귀에 현장 사운드를 체크할 수 있는 무선 헤드폰을 씌워주고 촬영분을 보여주면서 깍듯이 대접해줬다. 실제로 영화에서 내가 마크 월버그를 쫓는 장면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내가 권용운을 쫓는 장면을 패러디해서 촬영했을 정도다.

명세 형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끝내고 여러 해외 영화제를 다니면서 실제로 러브콜을 많이 받았다. 제의가 들어온 작품 중 하나가 <폰부스>(2002)라는 건 워낙 유명한 일이고, <찰리의 진실> 제작자인 피터 세라프도 2천만달러짜리 액션영화를 한편 하자고 공식 제의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마저도 거절했다. 명세 형은 액션영화가 아니라 독특하게도 귀신이 등장하는, 자기만의 색깔과 스타일을 보여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다. 그래서 미국으로 건너가 작가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영어 시나리오를 썼다. 미래가 보장된 앞길이 있는데 그걸 마다하고 뚝심있게 자기만의 길을 걸으려 했던 모습이 정말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한번은 명세 형이 미국 뉴욕에 있을 때 내가 뉴욕에서 LA까지 자동차로 대륙횡단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한달간 먼 길을 떠나는 나에게 몸 든든히 해서 가라고, 명세 형이 직접 하루 종일 끓인 곰국을 형의 퀸스 집에서 먹고 떠난 적이 있다. 먼 길을 떠나는 나를 진심으로 염려스런 눈빛으로 배웅해줬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게 고마움으로 남아 있다.

할리우드의 ’합리’와 충무로의 ’정’이 만나면…

<찰리의 진실> 이후 조너선 드미와 피터 세라프가 제의한 <비빔밥>을 기다리는 상태였지만 진척은 더뎠다. 마침 그때 받았던 시나리오가 바로 이준익 감독의 <황산벌>이었고 김유신(정진영)에게 맞서는 계백 장군 역할이었다. 그때 이준익 감독에게 하루 12시간 일하고 12시간 쉰다는 조건을 계약서에 명기하자고 했다. 지금은 보편화된 얘기지만 그때만 해도 ‘까칠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합리적인 할리우드 시스템을 경험한 내 입장에서 서로 윈-윈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자는 의도였는데 ‘그쪽 물 먹고 와서 티낸다’는 게 일반적인 시선이었다. 하지만 그때 내가 했던 주장이 현재 영화계에 분명히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나 하나 편하자고 그런 게 아니라 그때의 신념은 이런 거였다. 정확한 스케줄에 맞춰서 정확한 촬영기간 내에 끝내려면 합리적인 프리 프로덕션을 운영해야 한다. 그러려면 말끔하게 완성된 형태의 시나리오가 나와야 하고 처음부터 퀄리티 높은 초창기 형태의 시나리오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역산하다보면 ‘12시간’이라는 개념이 전체적으로 영화의 질을 높이는 일이라고 확신했다. 당장은 욕을 좀 먹더라도 선진 시스템을 경험한 입장에서 그런 요구를 나서서 하는 게 나의 책무라고 생각했다. 아니, 침묵하는 것은 비겁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준익 감독도 처음에는 탐탁지 않은 눈치를 보인 게 사실이지만 이내 개인적인 의도가 아니라 진심어린 충정이었다는 점을 이해해줬다. 환경에 대한 이해 없이 할리우드에 맞추자는 게 아니고 그쪽의 ‘합리’와 충무로의 ‘정’이 결합된다면 환상의 조합이라고 생각했다.

<황산벌>에서 난 단 한신도 코미디를 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코미디를 좀 넣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얘기하면서 이준익 감독과 약간의 이견도 있었다. 그런데 이준익 감독은 계백은 그냥 그렇게 가더라도 충분히 다른 상황과 요소로 웃겨줄 수 있으니 절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내 캐릭터의 장점도 잘 뽑으면서 변화도 준 작품이 됐고 흥행에서도 만족스런 결과를 얻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끝내고 찾아온 제2의 방황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준 작품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저 사투리를 질펀하게 쓰는 가벼운 코미디 정도로 생각하다가 한번 두번 더 보면서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당대 정치적 환경의 역학관계에 대한 은유 속에서 더 깊은 의미를 음미하게 됐다는 사람들을 보면서 보람을 느꼈다.

애초에 망설임 끝에 <황산벌>을 하게 된 데는 지난 5월 안타깝게 세상을 뜬 정승혜(전 영화사 아침 대표)의 설득이 컸다. 배우로서 미래에 대한 생각, 할리우드와 충무로 사이에서의 고민 등을 툭 터놓고 얘기하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당시 나는 충무로에서는 뭔가 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식의 오만함을 무의식중에 가졌던 것 같은데, 어쩌면 내가 뭔가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들게 해준 사람이다. 알고 지낸 건 90년대부터였지만 이때부터 허물없는 친구로 지냈던 것 같다. 힘든 일이 있거나 새로운 고민이 생길 때마다 진심으로 말을 건네줬던, 나에게는 참 고마운 사람이었다.

톰 행크스 별명? ’미국의 박중훈

<비빔밥>은 여전히 만족스런 시나리오가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조너선 드미 감독이 <찰리의 진실> 시나리오를 쓴 스티브 슈미트 작가에게 부탁해 <비빔밥>을 쓰게 했는데 그것도 좋지 않았다. 그러다 <나의 그리스식 웨딩>(2002)의 여주인공이자 그 작품의 시나리오작가이기도 한 니아 바르달로스에게 넘어갔다. <나의 그리스식 웨딩>이 당시 엄청한 성공을 거두면서 무수한 러브콜이 쏟아질 때였다. 재밌는 건 <나의 그리스식 웨딩> 제작자로 톰 행크스와 게리 고츠먼이 참여했는데, 그들 두 사람은 LA 샌타모니카에 ‘플레이톤’이라는 영향력있는 영화사를 함께 꾸리고 있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게리 고츠먼은 <필라델피아>(1993)의 프로듀서로 조너선 드미와 함께했던 경험이 있기에 범조너선 드미 감독계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최종적으로 조너선 드미와 피터 세라프, 톰 행크스와 게리 고츠먼이 함께 제작하고 니아 바르달로스가 시나리오를 써서 나와 그녀가 함께 주연하는 <비빔밥>을 만들 예정이었다. 2004년에는 미국영화계에 대한 이해가 깊은 보람영화사의 이주익 대표가 고맙게도 나를 도와주러 회의에 함께 참석하기도 했다. 그날 톰 행크스는 내게 좋은 영화를 만들어보자며 제작자로서 나를 격려해줬다. 자기의 미국 별명이 ‘미국의 박중훈’이라며 나의 기를 살려주는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장시간 회의를 마치고 나온 나는 모든 것이 다 된 것인 양 샌타모니카 거리를 깡충깡충 뛰었던 기억이 난다. (웃음) 그 뒤에도 수차례 LA와 뉴욕에서 회의를 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런 시나리오가 나오지 못했다.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무려 10고 이상의 시나리오를 썼건만 동양인 남자와 백인 여성의 의미있는 로맨틱코미디 시나리오를 뽑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아메리칸 드래곤>이나 <찰리의 진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내 특유의 장점과 스타일을 살릴 수 있는 할리우드영화였는데 지금도 성사되지 못한 게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아직 포기하긴 이르다. 아직도 나를 인정해주는 그들이 있고 나 또한 아직 젊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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