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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훈 스토리 20] 계백의 승승장구, 이순신의 쓰라림
박중훈(영화배우) 정리 주성철 2009-11-06

전쟁의 패러독스 일깨워준 <황산벌>과 배우 역할을 고민케 해준 <투 가이즈> <천군>

처음에는 <황산벌> 특유의 풍자에 어리둥절한 마음도 있었지만 곧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사극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나의 경우, 내 영화를 좋아하는 강도가 관객이 좋아하는 강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 역시 평범한 관객 중 하나라고 생각하니까 아무리 내 영화라도 관객이 싫어하는 영화는 나도 싫어진다. 물론 <황산벌>은 관객도 무척 좋아한 영화였지만 특이하게도 관객이 좋아하는 그 강도보다 내가 더 이 영화를 좋아한다. (웃음) 흥행도 잘됐고 평가도 좋았지만 오히려 그보다 저평가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

<황산벌>은 실제로 충남 부여군에 있는 낙화암과 인근 오픈세트장에서 찍었다. 재밌는 건 난 백제의 계백 장군이고 정진영씨는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다보니 촬영장을 오가다는 만났지만 딱히 촬영으로 만날 일이 없었다. 백제팀 모여! 신라팀 모여! 그러면서 거의 따로 촬영했으니까 겹칠 일이 없었다. (웃음) 나중에 함께 장기를 두는 장면이나 목을 쳐 죽이는 장면, 그렇게 두신 정도 촬영할 때 만난 게 전부다. 아무튼 당시 촬영장에 귀신이 나온다는 게 화제였다. 건장한 경호원 3명 정도가 늘 오픈세트장을 지켰다. 그런데 각종 유단자에 체격 좋던 경호원 한명이 실제 귀신을 만나곤 무서워서 돌아갔다는 거다. 낙화암 3천 궁녀의 혼이 나타났다는 둥 여러 흉흉한 소문들이 돌면서, 하루는 밤새 술 마시던 우리 일행들이 ‘귀신 좀 보자’며 세트장 주변을 동틀 때까지 어슬렁거렸던 적도 있다. 꼭 그렇게 작정하고 보려고 하면 안 나타나는 게 귀신이긴 하지만. (웃음)

육체적으로 힘들었던 건 엄청난 갑옷의 무게였다. 한여름에 상투 틀고 투구 쓰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붙인 채 손과 발의 각반을 다 차고 갑옷을 입는다. 살이 공기에 닿는 부분은 코와 입 정도밖에 없었다. 게다가 갑옷의 모든 무게가 하필이면 어깨에 톡 튀어나온 부분에 걸린다. 아무리 패드를 대도 어쩔 수가 없더라. <춘향전>에서 춘향이가 목에 하는 고문기구 형틀을 하루종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어깨뼈를 짓누르면서 몸 전체가 지독하게 답답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천근만근으로 느껴진다. <황산벌> 촬영장에서의 기쁨이라면 하루 촬영이 끝나고 난 뒤 수염을 떼고 갑옷 벗을 때의 그 청량한 느낌과 바꿀 게 없었다.

전라도민들, “계백 내려오랑께!”

나는 <황산벌>에서 액션이 전혀 없다. 칼 한두번 정도 뽑고 소리 몇번 지르고 끝났으니까. 왜냐하면 병사가 아니라 장군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황산벌>의 숨겨진 의미나 풍자를 읽을 수 있는데, 2001년 9·11 테러가 있었고 이에 미국은 2003년 3월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함으로써 자국민 보호와 세계 평화에 이바지한다는 대외명분을 내세워 이라크 전쟁을 시작했다. <황산벌>은 바로 이라크전이 발발한 다음 촬영이 시작됐는데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당시는 부시 정권의 네오콘(공화당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이 거세던 시절이었는데 전쟁이라는 건 정말 민초만 고생하는 위정자들의 놀음이라는 거였다. 권력자들은 그냥 입만 나불거리고 민초만 피를 흘린다는 사실을 직접 장군이 돼 전혀 칼을 쓰지 않다 보니 알겠더라.

영화는 개봉과 동시에 흥행몰이를 했다. 특히 기존 사극의 정형화된 말투가 아니라 당시 전라도와 경상도 사투리를 사실감 넘치게 쓴 덕에 지방 극장에서의 흥행도 이어졌다. 초반에는 다른 일정이 있어서 무대인사를 잘 다니지 않았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광주에서 난리가 난 거였다. 당장 계백 내려오라는 거다. (웃음)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전라도 지역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많이 바뀌었고, 영화에서 단지 범죄자나 불량한 사람들의 언어처럼 쓰이던 전라도 사투리가 계백이라는 충장이자 영웅의 언어가 된 거다. 생각해보면 전라도 사투리가 영화에서 주인공의 진지하고 정감있는 언어로 쓰인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니 <황산벌>의 계백 장군에 대한 전라도 사람들의 애정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경상도쪽은 정진영씨가 돌고 나는 전라도쪽을 돌면서 많은 환호를 받았다. (웃음)

배우가 이야기에 앞서면 안되더라

<황산벌>을 끝내고는 그동안 비교적 무거운 영화들만 한 것 같다는 생각에 가벼운 코미디영화를 하고 싶었다. 그때 보람영화사 이주익 대표와 얘기를 나누길, 요즘 차태현이 코미디로 두각을 나타내는 친구라 같이 하면 어울리겠다는 거였다. 그래서 ‘박중훈과 차태현의 버디코미디’를 만들자고 해서 이야기를 맞춰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투 가이즈>를 통해서 또다시 커다란 교훈을 얻었다. 영화라는 게 이야기가 먼저 시작되고 그 뒤 캐스팅이 이뤄져야 무리없이 진행되는데 ‘꼭 이 두 배우를 써서 코미디를 만들어야겠다’는 전제에 모든 걸 맞추다 보니 이야기의 범위가 작아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영화가 오히려 더 큰 과제를 줬다고나 할까.

가령 <투캅스>도 ‘안성기와 박중훈’이라는 배우가 앞선 게 아니라 <투캅스>라는 애초의 이야기에서 시작한 거 아닌가. 이야기 구조가 아닌 배우로 시작한 <투 가이즈>는 역설적으로 구조 안에 갇혀버린 영화가 됐다. <투 가이즈>는 내가 제작도 한 영화였는데 그렇게 작품보다 목적이 앞선 영화였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나로서는 의미있는 시행착오를 경험한 영화였고 100만 관객을 넘어 손익분기점은 겨우 맞춘 작품이었지만, 또 한번 관객에게 기대에 비해 큰 실망감을 안겨준 작품이 된 것 같다. 그동안 너무 관객을 웃겨왔기 때문에 코미디에 대한 지나친 확신과 자신감이 넘쳐서 <투 가이즈>에는 다소 치기어린 면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나를 믿고 시나리오도 안 나온 상황에서 작업에 흔쾌히 동참해준 차태현에게 아직도 고마운 마음이 있다.

다음이 바로 싸이더스에서 만든 <천군>이다. 따지고 보면 현재 싸이더스FNH의 전신이 과거 우노필름 영화사라 할 수 있는데, 그 대표인 차승재 형과는 예전에도 언급했듯이 형, 동생 하는 친한 사이면서도 한동안 함께 작품을 하지 못했다. 1호 작품 격인 <돈을 갖고 튀어라>와 2호 작품 격인 <깡패수업>을 연달아 하고 이후 10편가량 작품 섭외를 받았음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못했던 거다. 그래서 나중에는 승재 형에게 너무 미안한 지경까지 됐다. 남과 북의 장교가 시간 이동을 해서 조선시대에 뚝 떨어지고 번번이 무과 시험에서 낙방하며 별볼일 없던 당시의 ‘백수’ 이순신을 만난다는 설정이 너무 근사했다. 내가 바로 그 이순신 역할이었다. 민준기 감독이 자료조사도 치밀하게 했고 데뷔작을 위해 상당히 애를 쓴 티가 나서 믿음직스러웠다.

영화는 7, 8개월 정도 촬영했는데 경남 산청과 부산 기장 일대, 그리고 중국 내몽골자치구의 빠샹이라는 초원에서 촬영했다. 빠샹에서만 석달 정도 있었던 것 같은데 역시 일화가 많다. (웃음) 면적이 강원도만한 지역인데 겨울에는 무지 건조한 곳이라 화재 위험 때문에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도 불법이다. 거의 우리나라 1930년대 수준의 오지라고 보면 될 정도로 열악한 지역이고, 호텔이라고 있긴 한데 그냥 지저분한 콘크리트 건물이다. 게다가 알 만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중국 사람들이 국도에서 운전하는 거 정말 위험천만이다. 막무가내로 중앙선 넘어 운전하다가 마주 오는 차가 있으면 거의 부딪치기 일보 직전에 서로 자기 차선으로 쏙 들어가는 일이 예사다. 난 원래 승용차를 타면 뒷좌석에 앉는 게 답답해 주로 앞좌석에 앉는데 정말 간이 콩알만해져서 다녔다. 제발 천천히 가자고 통역을 통해 간절히 이야기하면, 알았다면서 그냥 웃고는 또다시 곡예운전을 계속 해댔다.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

관객의 상상력에 무릎꿇은 영화 <천군>

또 <천군> 하면 황정민과 술에 얽힌 에피소드를 빼놓을 수 없다. 아름다운 경남 산청에서 촬영을 할 땐데 하루는 비가 와서 촬영이 취소된 날이 있었다. 둘이 워낙 술을 좋아하는데 비 오는 날이면 술꾼들을 자극하는 디테일들이 있지 않나. 산에서 흐르는 물을 벗 삼아 고기 구워먹는 맛 말이다. (웃음) 점심때 12시쯤 술 마시자고 해서 다음날 새벽 1시까지 그 자리를 지켰으니 꼬박 12시간 넘게 술을 마신 거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가운데 강 옆에 한적한 별채 비슷한 방갈로에서 마시기 시작했는데, 거미줄이 좀 쳐 있는 노래방 기계도 있었다. 기계가 마침 작동을 하기에 지칠 때까지 노래를 번갈아가며 100∼200곡 정도를 부르면서 13시간을 보냈다. 태어나서 가장 오랜 시간, 가장 많은 양의 술을 마신 날이었다. 둘이서만 백세주 30병에 소주 15병, 그리고 맥주병도 50병 정도 굴러다녔던 것 같다. (웃음) 게다가 나는 영화 스탭들이 어딘가 모여 있다고 해서 거기까지 가서 생맥주 2000cc를 더 마셨다. 당연히 다음날 완전히 기절했고 황정민도 변기를 몇 시간이나 붙잡고 있었다더라. 지금 생각해보면 죽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로 무모하고 무식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크게 반성한다. 지금도 정민이를 만나면 그날 정확하게 몇병 마셨는지 다시 셈하며 낄낄 웃는다. (웃음)

그런데 그런 즐거움과 별개로 <천군>은 개봉 당시 150만 관객 정도를 동원하는 데 그쳤다. 제작비 규모가 70억∼80억원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거의 재난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현재 남북한 군인이 과거 청년 시절의 이순신을 만난다는 설정이 참으로 기발한데 결과적으로 관객의 상상력이 더 뛰어났던 것 같다. 너무나 흥미로운 설정을 좀더 뛰어난 상상력과 디테일로 뛰어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가령 로버트 저메키스의 <백 투 더 퓨쳐>는 대충의 시놉시스만 읽고 흥미를 가진 상태에서 극장에 가도 그보다 더 많은 걸 얻어오게 되는데 <천군>은 아쉽게도 그러지 못했다. 단순히 대작의 규모로만 관객과 게임을 벌이기엔 관객의 눈이 저만치 더 높아져가고 있었던 거다. 관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더 절실하고 더 치열한 지혜를 짜내야 한다. <투 가이즈>에 이은 <천군>의 실패는 나를 참 힘들게 했다. 많이 부끄럽기도 했고…. 하지만 그만큼 큰 교훈을 새삼 얻었기에 앞날을 위한 자양분으로 삼으려 억지로 내 마음을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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