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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혜의 작업의 순간] 낯을 가려 슬픈 짐승이여
이다혜 2009-12-18

말 많기로 유명한 내가 낯가림이 심하다고 하면 지나가는 개도 웃겠지만, 정말이다. 일과 관련된 경우 처음 보는 사람하고도 제법 수다를 떨 줄 안다. 기자 일을 10년이나 하다보니 “제가 원래 말수가 적어서”라고 조용히 있어봐야 다들 잘난 척한다고 생각하더라. 정말이지 노력하며 살았다. 나는 이제 “너도 애기 낳고 싶지?”라며 결혼 테러를 하는 친척들 앞에서도 하하호호 웃으며 몇 시간은 떠들 수 있고, 처음 만나는 말수 적은 음… 예술가와도 서너 시간 거뜬히 말을 섞을 수 있다. 하지만 낯가림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처음 만나는 사람하고는 아무리 재밌게 놀았다고 해도 스트레스가 가시는 데 한 시간당 하루 정도 걸리는 것 같다. 죽을 지경이다.

일본 쇼프로 <아메토크>의 ‘낯가림이 심한 개그맨’편을 보며 웃다 울다 했다. 나만 이러고 사는 게 아니었다! 개그맨이라는 직업 특성상 처음 만나는 사람이 “웃겨봐요!”하는 일을 자주 겪는 건 피할 수 없는 운명. 그들이 낯가림이 심해서 겪는 고통과 각종 상황에서의 대처법을 들으니 남의 얘기가 아니다. 모르는 사람과 한 공간에 있을 때 가장 자주 하는 행동은? 각종 라벨 읽기다. 손에 들고 있는 종이컵 그림 살피기, 캔커피의 원료 목록 읽기. 엘리베이터에서는 비상시 대처방법이라도 읽는다. 사람들은 내가 활자중독인줄 알지만(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그게 다는 아니고) 사실 남하고 같이 어정쩡하게 있는 게 불편해서 활자중독인 척하는 것이다. 말하기 싫으니까. 모르는 사람이 여럿 섞이는 약속 장소에는 10분 정도 늦게 도착하기도 한다. 최소한 늦게 가면 먼저 온 사람들이 먼저 대화 중이니 부담이 적다. 졸지에 ‘어둡다’든지 ‘우울해 보인다’, ‘비관적이다’하는 말을 듣기도 한다.

내가 겪는 가장 난처한 상황은, 내 글을 읽고 나를 ‘재밌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경우다. ‘이주의 한국인 무엇을 이야기할까’를 쓰던 때 특히 그런 일이 많아서, 심할 때면 일주일에 대여섯명 정도가 “나 아는 사람이 밥/술/커피 한번 같이 마시게 해달라던데 언제가 좋아?”라며 의견을 물어왔다. 음악, 정치, 스포츠가 주요 관심사인 나는 내 친구들보다는 내 친구의 남편과 취미가 비슷한 경우가 많아서, 친구들이 남자친구나 남편과 같이 만나자고 하는 일도 많다. 대부분 있는 약속 없는 약속 다 끌어대서 그런 자리에는 나가지 않지만, 어쩌다 피치 못할 경우 그런 자리에 나가게 되면 대체 어떤 캐릭터를 연기해야 좋을지 몰라 난감하기 짝이 없다. 웃기는 천방지축 노처녀를 상상하시는 모양인데, 사실 저는 낯가리고 짜증 많은 아저씨랍니다! 특히 지인과 약속을 잡았는데 지인이 예고없이 모르는 사람을 불러 합석하는 경우, 집에 가면 스트레스 때문에 잠도 못 잔다. 낯가림은 소심함과는 또 달라서, 일단 친해지면 밑도 끝도 없이 수다를 떨긴 한다. 하지만 일단 친해지기가 쉽지는 않다. 아니, 애초에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러고 보니, 외부 손님들을 모시고 치러야 하는 회사 송년회 날 야근해야 하는 별책부록 일이 떨어진 건… 어쩌면 좋은 일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