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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의 점프 컷] 가해자가 누군지 알아?

사카모토 준지의 초기작에서 맛본 담백함이 살아난 <어둠의 아이들>

사카모토 준지 감독의 영화를 꽤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2000년대 이후 그가 주류 영화사의 작품을 자주 만들게 된 이후부터는 예전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김대중 납치사건을 다룬 <KT> 정도가 예외였다. 다른 사람들은 대개 그 영화를 폄하했지만 나는 좋았다. 뭐랄까, 예전에 MBC에서 고석만 PD가 연출하고 김기팔 작가가 대본을 쓴 역사드라마를 보는 느낌이랄까. 선이 굵고 듬성듬성 진행되지만 사건의 입체성을 넓게 조감하려는 태도가 있는 영화였다.

물론 2000년대 이전의 사카모토 준지의 영화들은 대부분 좋아한다. 그의 영화는 시대착오적인 오락감각으로 덧칠돼 있다. 사카모토 준지는 늘 시효가 지난 듯한 이야깃거리로 영화를 만들어왔다. 그의 데뷔작 <패줄까보다>는 최악의 상황에 몰린 권투선수가 재기를 위해 몸부림친다는 내용이고 <철권> <복서 조> 등 이어지는 후속 권투영화도 마찬가지다. <록키>류의 말랑말랑한 인간승리담과는 거리가 멀다. 사람들은 성공 스토리가 아닌, 밑바닥에서 몸부림치는 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애써 무시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인) <복서 조>에서 주인공 다쓰요시 조치로는 무모하게 왼손을 내린 채 경기에 임하는 그의 버릇 때문에 상대의 주먹에 얼굴을 많이 맞아 얼굴이 거의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진다. 부어오르고 터진 눈동자 때문에 거리를 식별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는 라운드가 진행될수록 더 많이 상대의 주먹을 맞는다. 여기에는 어떤 극적인 긴장감도 없다. 화면은 극적인 음악이나 편집을 자제한 채 슬로 모션으로 거의 20여분 동안 피가 튀고 살점이 짓이겨지는 가운데 링 위에서 명예롭게 지는 것이 무엇인지 웅변하는 다쓰요시 조치로의 모습을 담담하게 쫓는다. 숨이 막힐 듯한 이 카메라의 응시는 고통을 전해준다기보다는 곧 그대로 사카모토 영화의 본질, 세상에서 지지 않기 위해 견디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파고드는 뚝심이다.

관광지의 일상적 풍경으로 은폐된 아이들의 불행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사카모토 준지의 영화 가운데 대표작은 <얼굴>이라고 생각한다. 뚱뚱하고 못생긴 여주인공이 가족을 살해하고 도망다니면서 인생을 재발견한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사카모토의 세상관이 희비극적으로 응축돼 있다. 영화 마지막에 경찰에 발각되어 튜브를 타고 바다로 도망치는 장면의 잔상은 잊을 수 없다. 우스꽝스럽게 뒤뚱거리면서도 빠삐용처럼 비장한 여주인공의 결기가 전해주는 단독자의 고독과 희열이 그랬다.

과문한 탓인지 최근에는 사카모토 준지의 작품을 보고 감읍한 적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그의 신작 <어둠의 아이들>을 보고 감탄했다. 여러모로 그의 초기작과 같은 담백함을 안고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한정된 제작비 탓도 있겠지만 수식이 많지 않고 거두절미하는 묘사는 장기밀매와 성매매와 관련된 영화의 충격적인 소재와 반비례해 훨씬 인상적이다. 이 영화는 타이 아이들의 장기를 산 채로 적출해 일본 아이들의 몸에 이식하는 암흑가의 커넥션을 추적하는 기자의 눈을 취하고 있지만 동시에 피해자들의 입장을 어떻게 찍어낼까에 대해 감독 자신이 신중하게 고민한 흔적이 드러난다. 그의 연출은 수직적으로 내려다보는 연민이나 공감 따위의 감정을 착취하지 않기 위해 애쓴다. 이건 생각만큼 쉽지 않은 창작 태도다.

몇개의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첫 장면, 범죄조직 수하들이 산골의 가난한 아이를 데려가는데 그들이 탄 차 앞을 코끼리를 탄 일행이 가로막는다. 사람을 태운 코끼리가 느릿느릿 길을 벗어날 때까지 아이를 태운 차는 기다린다. 사카모토 준지는 이 장면이 타이와 미얀마 국경 근처라는 공간적 배경을 드러내기 위해, 범죄가 벌어지는 곳은 타이이지만 그 범죄 루트는 인접한 국가들에 다양하게 걸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설정이라고 말했지만 그 작의에 상관없이 강한 인상의 고정점 같은 것을 이 장면에서 느끼게 된다. 코끼리 일행과의 조우는 관광지 엽서에서 흔히 보는 풍경의 모사인 동시에 거기 은폐된 가공할 현실의 정체와 느닷없이 부딪치게 되는 광경이기도 하다. 그 직전, 차에 태워진 희생자 아이는 마을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의 무리를 뚫고 마치 마음씨 좋은 아저씨 손에 이끌려가는 것처럼 범죄조직 수하의 손에 이끌려 그 마을을 떠나게 된다. 예민하게 지각하지 않으면 관광지의 일상적 풍경으로 스쳐지나갈 듯한 그 상황에 녹아들어가 있는 잔인함이 영화의 첫 장면에는 있었다.

지각되지 않는 인식의 거리감이 충격적

1세계 사람들의 눈에, 방관자의 눈에, 심지어 희생자 아이들의 부모의 눈에도 심상하게 보이는 것들이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옥이 된다는 것은 충격이다. 이 영화에서 희생자 아이들은 범죄조직의 아저씨와 그에게 고용된 아줌마의 손을 잡고 손에는 인형 하나씩을 들고 사이좋게 거리를 걷거나 차에 태워진다. 풍경의 부분으로 완벽하게 은폐된 아이들의 불행은 그들이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그들에게 현실이 된다. 아이들만 남았을 때 겁에 질려 우는 아이들에게 범죄조직의 수하들은 죽여버린다, 라고 위협한다. 관광지의 일상적 단면들이 아이들에게 끔찍한 지옥이 되는 이 상황들이 정작 그들을 사고 파는 제1세계 인간들에게는 지각되지 않는다는 것이 더 무섭다. 돼지우리 같은 감옥에 갇혀 있는 아이들은 수시로 얻어맞으면서 유아성애자와 유아동성애자를 맞을 준비를 하지만 그들을 사는 1세계 남자들은 관광지에서 쇼핑을 하듯이 자연스럽게 감옥에 들어와 아이를 데리고 나간다. 이 지각되지 않는 거리감을 보여주는 영화의 시선은 이를테면, 어린 소녀를 ‘테이크 아웃’해 호텔방에서 유린하는 변태적 일본인의 가학행위가 암시되는 장면에서 극에 달한다.

감독은 이 지각되지 않는 인식의 거리감을 확장해서 일본의 부유한 중산층 가정 내부에서 벌어지는 불행한 아이의 현실이 어떻게 제3세계 아이들의 목숨을 담보로 구원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주인공인 타이 특파원 난부가 취재한 것을 바탕으로 타이 아이의 장기를 사기로 되어 있는 일본의 어느 가정을 방문해 그들의 부모와 얘기할 때 드러나는 것도 바로 그 거리감이었다. 일본 부모는 자신들의 아픈 아이가 왜 무력하게 죽어야 하느냐, 그걸 봐야하는 부모의 고통을 아느냐고 난부 일행에게 항변한다. 그들의 개인적 불행은 3세계 어린이의 죽음을 담보로 구원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인식의 거리감은 그들에게 지각되지 않는다.

영화 속의 등장인물을 포함해 관객인 우리에게는 그 거리감이 입체감을 갖고 지각된다. 그것이 지각되는 순간, 우리에게는 어떤 윤리적 자각이 요구되고 그게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어진다. 이건 타이의 장기매매와 성매매와 관련된 소재 차원의 충격에 국한되는 게 아니다. 아이들의 육체를 전시하지 않고 가해자들의 욕망을 드러낸다는 것이 사카모토 준지의 연출 컨셉이었다. 가해자가 타자가 아닌 우리 내부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다소 극적인 방식의 반전으로 <어둠의 아이들>의 마지막 장면은 드러낸다. 거기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간에 이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 묘사된 아이들의 뛰어노는 이미지와 대비되는, 아이들을 사고파는 끔찍한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의 거리감에 대한 이 영화의 질문은 지속적으로 담아둬야 할 윤리적 명제라고 생각한다. 캄보디아에서 가난한 한국 남자가 더 가난한 그곳 여자들 25명과 맞선을 봤다는 엽기적인 뉴스를 접하는 우리 현실에선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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