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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그 미소를 떠올리며
문석 2011-05-30

“언경이가 죽었대.” 쉬는 날 걸려오는 낯선 번호의 전화가 불길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내용일 줄이야. 전화를 건 이하영 형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언경 누나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한국 최초의 비디오테크 ‘영화공간 1895’를 만들어 이끌었고, 지금은 사라져버린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 ‘씨네디비넷’을 창립했으며, 20여년 동안 영화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던 언경 누나가 세상을 떴다는 이야기다. 하영이 형은 말을 이었다. “몇년간 너무 연락이 안돼 수소문해봤더니 사망 신고가 돼 있다는 거야. 알아보니까 2009년 5월14일 암으로 죽었다더라.” 그러면서 그는 작은 추모 자리를 가질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 모임 시간이 마감을 하고 있는 바로 지금인 탓에 나갈 수는 없는 처지지만 대신 글로나마 그녀를 추모하려 한다.

이언경은 1967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연세대 85학번이었던 그녀는 ‘영화마당 우리’에 참여하며 영화와 연을 맺었다. 좀더 전문적으로 영화를 공부하고 만들고자 했던 그녀는 고작 스물세살이던 1989년 영화공간 1895를 만들었다. 그녀는 이하영(전 시네마서비스 이사) 등과 함께 ‘카메라를 든 사나이’, ‘24시간 영화학교’ 등 강좌를 운영하며 수많은 시네필을 만들어냈고 영화 인력을 배태했다. 이재용 감독, 김종현 청소년영화제 집행위원장, 오점균 감독, 인정옥 작가, 김선아 프로듀서, 오은실 프로듀서 등이 ‘명시적’인 이곳 출신 영화인이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이곳을 거쳐간 영화인은 훨씬 많을 것이다(나 또한 1991년 초 ‘히치콕 회고전’ 시절부터 이곳을 다녔다). 1990년대 초반 수천편의 영화의 VHS테이프를 갖추고 정성일, 이용관, 전양준 등의 강의를 개설한 곳은 영화공간 1895뿐이었기 때문이다. 1993년 ‘제도권’ 영화계로 들어가기 위해 그 많던 VHS를 ‘씨앙씨에’로 넘기면서(그 VHS는 다시 문화학교 서울로 흘러갔다) 영화공간 1895의 역사는 끝났지만 이언경은 영화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가정 형편이 나빠져 보험회사에 다니던 동안에도 그녀는 시나리오를 준비했고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웠다. 2000년에는 한국 최초의 영화 전문 데이터베이스를 운영하는 씨네디비넷을 만들었고, 2002년부터는 <듀얼 인 부산>이라는 미완성 영화를 만드느라 동분서주했다. 감독 계약까지 했으나 영화가 무산되는 와중에도 그녀는 영화를 향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2년 전 갑작스레 찾아온 병마가 삶을 앗아가기 전까지.

언경 누나를 알았던 많은 사람들은 여유로우면서도 씩씩했던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경찰들이 찾아와 VHS테이프를 한 무더기 압수해가도, 만들던 영화가 난관에 봉착해도 진한 부산 사투리로 “괜찮슴더”라고 말하며 미소를 짓던 모습 말이다. 그 소식을 들은 이후 지금까지 그녀의 미소가 미치도록 보고 싶다.

늦었지만 진심으로 고인의 명복을 빈다. 내년 기일부터는 조촐한 추도식이라도 열렸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