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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캐릭터의 단순성이 남기는 비감

<자전거 탄 소년>의 엔딩이 주는 복잡한 여운의 실체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캐릭터의 영화이기도 하다. 작품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가열한 현실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생생한 캐릭터들이 등장해 이야기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끈다. 종종 이들의 남다른 성격은 영화의 형식마저 결정한다. 이는 <로제타>와 <로나의 침묵>의 상이한 스타일만 비교해보아도 확인할 수 있다. 로제타는 일상의 전투를 치르는 투사와도 같았고, 등 뒤에 붙어 덜컹거리던 핸드헬드 카메라는 그녀의 솟구치는 감정과 에너지를 전달하는 매개체였다. 반면 <로나의 침묵>의 카메라는 비교적 차분히 움직였고, 이를 통해 정적이고 비밀스러운 주인공의 변화를 조심스럽게 주시할 수 있었다.

<자전거 탄 소년>의 간결한 형식도 캐릭터의 특징과 공명한다. 시릴과 사만다는 다르덴의 인물들이 흔히 맞닥뜨렸던 윤리적 딜레마를 거의 겪지 않는다. 이들은 이례적인 ‘단순성’을 보이는데, 이때 단순함이란 깊이의 문제가 아니라 망설이지 않는 ‘순전한’ 행동방식을 의미한다. 사만다는 중요한 고비마다 별다른 갈등 없이 시릴을 감싸며 그의 곁을 굳건히 지킨다. 그리고 그녀가 주는 안정감 때문에, 아이의 방황에 대한 거리두기가 한결 용이해진다. 영화의 전반부, 시릴을 뒤쫓던 카메라는 이내 멈추어 서서 자그마한 몸이 곧 무너질 환상을 안고 내달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본다. 시릴은 아빠와 재회하기 전까지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빠와 자전거에 대한 그의 애착은 맹목적이며, 이를 지키기 위한 행동은 단호히, 매우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시릴의 행동방식을 좀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감정이나 생각에 앞서 무심히 드러나는 그의 움직임들이, 결국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 조건에 대한 일종의 방어기제로 보이기 때문이다. <자전거 탄 소년>의 간결함이 남기는 복잡한 여운 역시 캐릭터의 단순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요컨대 시릴의 단순성을 논하는 것은, 담담한 움직임들이 봉인한 깊은 상처를 되짚어보는 일이 될 것이다.

감정이 거세된 단순한 움직임의 힘

다르덴 형제는 모리스 피알라의 데뷔작 <벌거벗은 어린 시절>에 각별한 애정을 언급한 바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부모와 양부모 모두에게 버림받은 열살 난 소년 프랑소와다. 그는 무심히 비행을 저지르지만, 영화는 그의 폭력적인 성향 속에 잔존하는 섬세한 감수성을 암시하며 아이를 압박하는 가혹한 현실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시릴이 노출하는 돌연한 공격성은 프랑소와를 많이 닮아 있다. 시릴은 ‘핏불’(투견)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그는 정말로 투견처럼 상대에게 돌진해 물고 뜯으며 여러 번 몸싸움을 벌인다. 보육원 교사들과 자전거를 훔치려는 동네 아이, 그리고 사만다가 차례대로 그의 다부진 몸이 보이는 투지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몸싸움이 이어지는 동안, 시릴이 뿜어내는 저돌적인 에너지에 비해 그의 분노는 오히려 표적을 잃은 듯한 느낌을 준다. 아이의 감정은 막연해지는 반면, 움직임은 더욱 맹목적인 양상을 띠게 되는 것이다.

인물의 감정을 언제 드러낼 것인가 하는 문제는 감독의 선택에 달렸다. 다르덴 형제는 <자전거 탄 소년>에서 시릴의 감정이 직접적으로 노 출되는 장면을 가급적 자제한다. 이 영화가 그들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예외적으로 외부 음악을 삽입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같은 절제는 다소 일관적이지 못한 선택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반복해서 등장하는 짧은 현악 선율도, 인물의 감정이나 관객의 정서를 고양시키기 위한 차원에서 쓰이는 것은 아니다. 베토벤의 음악은 시릴이 좌절을 느끼는 중요한 분기점마다 흐르지만, 짧은 소절 중간에 장면은 전환되고 화면은 매번 냉정을 찾는다. 시릴이 자해를 하고 흐느끼는 신에서도 카메라는 그의 뒷모습을 비출 뿐이며, 장중한 선율이 그의 고통을 감싸자마자 화면은 자전거를 타는 다른 신으로 넘어가고 만다.

시릴은 영화에서 두어번 웃고, 단 한번 운다. 대신 그는 줄곧 무표정하다. 심지어 사만다에게 “팔 찔러서 미안해요. 아줌마랑 계속 같이 살고 싶어요”라고 말할 때에도 그는 무표정의 건조한 톤으로 사과를 건넨다. 범죄를 저지르고 연달아 버림받은 직후의 절박한 상황이지만, 그는 처음 위탁을 요청할 때처럼 자전거를 대문 안에 들여놓는 일상적인 느낌으로 이 대사를 말한다. 그러나 이같은 건조한 말투와 무표정이 오히려 그가 습관적으로 감당했을 깊은 슬픔의 역설적인 표지로 느껴진다. 그리고 프랑소와처럼, 혹은 그보다 일년 전에 세상을 나온 무셰트(<무셰트>)처럼, 아니면 앙트완(<400번의 구타>)처럼, 스스로 감정을 가늠할 새도 없이 비극적 운명과 가혹한 변화에 떠밀려가야 했던 아이들의 무표정한 얼굴들이 연상되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어쩌면 시릴의 단순성은 그가 현실에 적응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내면에 요동하는 감정의 인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 감정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움직여야 했던 육체의 축적된 결과물일 수 있는 것이다.

시릴은 사만다에게 사과를 건넴으로써, 마침내 아빠한테 버림받은 현실을 인정하고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된다. 영화는 이 결정적인 변화를 그의 움직임을 통해서 납득시킨다. 그가 사과를 건네는 신과 아빠에게 떠밀려 담벼락을 떠나는 신 사이의 심리적 간극은 자전거를 타는 1분간의 롱테이크 숏으로 채워진다. 시릴이 혼자 자전거를 타는 장면은 영화 내내 반복해서 등장하지만, 카메라가 자전거의 리듬을 따라가며 가까이서 찍은 숏은 흔치 않다. 그중 카메라가 뒤로 빠지거나 중간에 멈춰 서지 않고, 장시간 시릴의 움직임만을 따라간 경우는 이 숏뿐이다. 여기서 카메라는 시릴의 감정에 거의 유일하게 다가선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감정이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것은 아니며, 카메라가 담는 것은 그의 감정이 자전거의 움직임과 함께 다른 결로 변해가는 과정이다. 시릴은 묵묵히 페달을 밟는다. 화면을 채우는 것은 밤공기를 가르는 체인 소리, 주변의 차 소음, 그리고 아이의 가쁜 숨소리뿐이다. 시릴은 여전히 무표정하다. 아마도 이때의 무표정은 스스로도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막연한 고통이 남기는 서글픈 잔상일 것이다. 그러나 장시간 걷거나 달릴 때 움직임의 속도가 어느새 감정과 사고를 앞지르게 되는 것처럼, 시릴이 연속해서 페달을 밟는 동안 그의 움직임은 복잡한 감정을 압도하고 고통은 순화의 과정을 겪는다. 그리고 그의 육체를 투과하는 감정의 깊이는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된다. 감정이 거세된 단순한 움직임이 역설적으로 심정적 변화를 납득시키게 되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는 듯한 유유한 리듬으로

다르덴 형제는 배우들과 철저한 리허설 작업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시릴이 사과를 건네는 대목처럼, 감정을 걷어낸 무심한 움직임과 대사들은 아마도 부단히 반복된 리허설의 결과일 것이다. 비움의 과정을 통해서 캐릭터의 순수를 이루고 이야기와 형식의 간결함을 성취해낸 <자전거 탄 소년>은, 여전히 혹은 이제야 비로소 브레송의 방식을 연상시킨다. 다르덴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궁극의 휴머니티는 가혹한 현실조건 속에서 진동하는 육체가 드러내는 현존성에 있었다. 이른바 ‘강박적인 핸드헬드’ 기법은 이같은 사유를 직관적으로 이끌어내는 도구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영화는 돌출된 형식에 의존하지 않고, 그저 무심하고 단순한 동작들에 기대어 마치 자전거를 타는 듯한 유유한 리듬으로 또 한번 삶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시릴의 무표정과 단순한 움직임은 그가 경험했을 지난한 진동과 파열의 순간들을 담고 있다. 이는 영화의 엔딩이 주는 복잡한 여운의 실체이기도 하다. 나무에서 떨어져 쓰러져 있던 시릴은, 잠시 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제 그는 사만다에게로 가서 무사히 바비큐 파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흙이 묻은 얼굴과 몸을 무심히 일으켜 석탄을 집어들고 페달을 움직인다. 마치 그것만이 그가 살아가는 당연한 방법이라는 듯이. 그는 자전거를 타고 골목 한편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익숙한 현악 마디가 반복되는 동안 그의 짧은 동선은, 감정의 속도를 이기기 위해 그가 감행했던 수많은 움직임들을 상기시키며 아련한 잔상을 남긴다. 그리고 마침내 유려한 피아노 선율이 시작되면, 또다시 어딘가에서 자전거를 타고 달릴 시릴의 모습에 안도하면서도, 이 단순하고도 요망한 삶이 주는 비애감에 털썩 주저앉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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