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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착각 걷어내니 허세가 보이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예술영화’임을 가장하는 방식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타이틀 시퀀스는 암시적이다. 본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서커스(영국 정보부의 별칭)로부터 해고당한 퇴직요원 조지 스마일리(게리 올드먼)는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평소대로 수영을 마친 뒤 안경을 새로 맞추러 간다. 곧 안경점 밖으로 나온 그는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안경을 추어올린다. 이 장면은 소설에는 없는 것을 감독이 창조적으로 덧붙인 것으로, 시작될 ‘두더지’(러시아가 영국 정보부에 심어둔 이중 스파이를 일컫는 스파이 용어) 소탕작전을 스마일리가 이끌게 되리라는 예고다. 앞으로 스마일리의 시선을 경유해 사건의 진상을 목격하리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상한 것은 그다음 장면이다. 그가 도착한 집에는 초상화 한점이 걸려 있다. 그는 새 안경을 끼고 초상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살짝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앞의 허공과 자신의 뒤통수 뒤에 앉아 있을 관객 사이쯤 어딘가에 시선을 던진다. 그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자신을 버리고 도망간 아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알 수 없다. 거기에는 단지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몸짓만이 있다.

스마일리의 그 과시적 몸짓은 나중에 한번 더 나온다. 요원들의 증언과 기밀서류의 내용이 그의 머릿속으로 빠르게 스쳐지나가며 두더지가 누군지에 관한 추리가 급하게 마무리 지어지는 대목에서다. 이 신의 마지막 숏에서 그는 이스탄불에 파견됐던 요원 리키 타르(톰 하디)의 증언 녹음테이프를 정지시킨 뒤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왼쪽 45도쯤의 허공을 응시한다. 그때 그의 시선의 끝에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번에도 그는 그저 무언가가 보인다고 말하기 위해 시선을 돌리고 있다.

알맹이 없는 과시적 몸짓의 전시, 시선의 남용

스마일리의 그러한 초상은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예술영화’임을 가장하는 방식에 관한 단상을 제공한다. 실제로 이 영화를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이 영화가 대단히 실험적인 영화라서가 아니라 두더지를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논리보다 심리에 치중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평자들도 이 영화의 성취를 ‘고도의 심리묘사’에서 찾았다. 물론 논리게임보다 마인드게임을 쫓으려 한 감독의 미학적 선택에 일리는 있다. 하지만 스파이물을 빙자한 추리물이라 할 만한 이 영화에서 전자를 무시하고 후자에 도달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마인드게임은 이 영화의 허세를 방어하기 위한 수사처럼 느껴진다.

비슷한 예로 <아이 엠 러브>를 들 수 있다. <씨네21>에서 뽑은 2011년 외국영화 베스트 3위를 차지한 이 영화는 탁월한 심리묘사로 호의적인 비평을 이끌어냈던 바 있다. 루카 구아다그니노 감독에게는 루키노 비스콘티나 더글러스 서크의 유산을 얼마쯤 물려받은 신진이라는 찬사가 내려졌다. 혹자는 이 영화에서 부르주아 계급의 내파를 목격했다거나 생의 찬가를 마주했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실체는 예술영화를 가장한 패션화보집에 가깝다. 밀라노의 재벌가 맏며느리로 등장하는 주인공 엠마(틸다 스윈튼)의 내면적 갈등은 서사적으로 가정되어 있긴 하나 영화적 긴장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아이 엠 러브>가 보여준다는 심리묘사는 일종의 신기루 현상에 가깝다.

스마일리로 돌아가보자. 그는 못 본 것을 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유사 예술영화들의 요술을 재연한다. 영화에서 실제로 그는 무엇을 보았는가. 적어도 이 영화 안에서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가 안경 쓴 장님처럼 여겨지는 상황은 그가 코니 삭스를 방문하는 장면에서 명징하게 형상화된다. 그녀는 자신에게 도움을 구하러 온 그에게 자신이 서커스에서 쫓겨나기 직전 두더지로 의심되는 인물 알렉시 폴리아코프에 관해 확실한 단서를 발견한 참이었다고 알려준다. 그녀의 플래시백에서 현재로 돌아왔을 때 스마일리의 눈동자는 램프의 반사광으로 짐작되는 하얀 반점으로 가려져 있다. 그는 어딘가를 보고 있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무언가를 본 것은 삭스이고, 그는 삭스를 통해 기억을 이어붙이고 있을 뿐이다.

시선은 기억을 가공해내기 위해 남용된다. 스마일리의 시선은 컨트롤(존 허트)의 체스 말에, 쓸쓸한 호텔방 안 구석에, 창밖의 기차 선로에, 죽은 줄 알았던 짐 프리도(마크 스트롱)가 일하고 있는 학교 운동장 반대편 임야에 닿아 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플래시백으로 들어가기 위한 기능적 응시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자주 등장하는 플래시백은 감독이 컨트롤이 이끌던 서커스의 행복했던 한때를 가정해 새롭게 만들어낸 연말파티 장면이다. 그 장면을 불러들이기 위해 스마일리는 끊임없이 의미없는 대상을 바라봐야 한다. 그러는 동안 스마일리라는 인물은 기억의 재구성이라는 이야기의 틀을 받쳐주기 위한 도구적 캐릭터에 머무른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심리묘사에 출중한 영화로 느껴지지 않는 까닭 중 하나는 캐릭터를 운용하는 방식과도 연관이 있다. 이 영화에서는 스마일리 외에도 모든 캐릭터들이 기능적으로 과장된 시선을 교환하고 있다. 원작과 비교해보면 영화에 비해 소설 속 캐릭터들은 훨씬 인간적인데, 단지 인물들의 전사나 그들간의 관계 변화도가 여러 장에 걸쳐 상세히 서술돼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소설은 그들 각자에게 개성을 부여함으로써 인간으로 살게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캐릭터들은 스마일리가 추적해 들어가는 플래시백 속에서 시선을 주고받느라 자신을 설명할 시간을 뺏기고 만다. 때문에 인물간의 감정적 밀도는 연출의도와는 달리 헐겁다.

연말파티 장면에서는 불확실한 심리묘사에 매달리고 있는 감독의 불안이 감지된다. 영화를 소설과 별개의 예술적 창작물로 완성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이 장면을 감독은 일부러 파편화한 다음 강박적으로 반복해서 보여준다. 여기서 한편으로는 관객이 두더지를 둘러싼 사태의 전모를 감지하여 게임을 벌이고 싶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모호한 뉘앙스의 무언극을 통해 예술영화의 격조를 획득하고 싶어 하는 감독의 양가적 욕망이 느껴진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인물들이 시선 교환에 소비하는 시간만 늘어났을 뿐이다. 예를 들어 컨트롤과 퍼시 엘러라인(토비 존스)이 상급자와 하급자 사이면서 동시에 경쟁관계라는 사실, 스마일리가 자신의 부인과 빌 헤이든(콜린 퍼스)의 불륜 관계를 짐작하게 된다는 사실, 프리도가 헤이든과 막역한 사이지만 그에 대한 의심을 지우진 못했다는 사실은 파티장면이 없더라도 설명된다. 그럼에도 감독은 인물들간의 대화 없는 시선 교환을 통해 그 사실들을 재차 주지시키는 과잉의 연출방식을 고집한다.

불필요한, 실로 불필요한 피로감

감독의 그같은 연출 전략은 관객 혹은 비평의 욕망을 자극함으로써 기억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하도록 이끈다. 영화 속 한 장면이 영화 밖에서 발생하는 이 기이한 놀이를 재연하고 있다. 정교한 심리전을 구축하기 위해 플래시백을 불필요하게 조각내고 그 조각들을 재조합하며 먼 길을 돌아가던 영화가 후반에 다다르자 스마일리는 급작스럽게 과거로의 여행을 멈추고 두더지가 누구인지 추리해낸다. 그의 호텔방 밖에 나 있는 기차 선로에 초록불이 켜지는 인서트 숏이 추리의 완료를 알린다. 이 대목에서 영화는 앞서 엉성하게 흩어놓았던 플래시백들이 어떻게 완성된 퍼즐을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단지 기억이 재구성되었다는 신호만 알린다. 그런 뒤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서 착시된 기억을 일으킨다. 무작위로 시선을 던지는 스마일리를 보여주는 이미지와 테이프에 녹음된 타르의 증언이 담긴 사운드만으로 단조롭게 붙여낸 신이, 엉켜 있던 플래시백을 빠른 속도로 정리해낸 몽타주신처럼 기능하는 것이다. 실제로 타르의 목소리만 들리는 앞의 장면에서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진상은 다음 시퀀스에서 인물들이 한꺼번에 쏟아내는 고백을 통해 밝혀진다. 하지만 그들의 대사가 앞서 왼쪽 45도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스마일리의 뒷모습으로 소급되어 의미심장한 이미지로 재창조되고, 영화는 그 이미지로 논리적 추론을 대신함으로써 구조적 결함을 보이지 않게 처리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시선을 통해 정교한 마인드게임을 펼친 성공적인 예술영화라는 착각을 일으킬 수 있다.

착각을 걷어내고 보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영화를 ‘보는’ 행위를 의도적으로 피로에 빠트리는 영화다. 한 예로 헝가리에서 프리도가 총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은 프리도를 향해 걸어오는 네명의 사내를 포커스 아웃된 상태로 비추며 자못 심각한 분위기를 자아냄으로써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순간 영화는 스크린을 응시하는 행위를 무력화시키며 그 화면을 보지 말고 그 장면의 뉘앙스를 느껴보라고 관객에게 말을 건다. 영화적 성취에 대한 과대평가를 요구하는 이런 장면들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이 영화를 제대로 보고 제대로 기억하기란 난처한 일이 되고 만다. 가장된 아름다움이 스크린에 펼쳐지고 있는 영화의 실체를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광고의 전략일 수는 있으나 영화의 전략이라면 동의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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