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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불가능한 질문에의 도전

클린트 이스트우드 신작 <J. 에드거>를 함께 보기를 원함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J. 에드거>가 국내에서 정식 개봉을 하지 못한 채, DVD로 직행했다는 소식이다. 지난 몇년간 그의 영화들(<그랜 토리노> <우리가 꿈꾸는 기적: 인빅터스> <체인질링> <히어애프터>)이 연이어 극장 개봉을 통해 우리와 만났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미국 내 흥행 성적이 저조했고, 비평적으로도 그리 환대받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 속사정이야 어떠하든,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기회를 갖지 못하는 현실은 다급한 마음으로 노장의 영화를 기다려온 우리에게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참고로, 오는 4월21일 영상자료원, ‘블루레이 특별전’에서 <J. 에드거>를 상영할 예정이라고 한다). 더없이 유려하고 깊었으나 다소 온건했던 이스트우드의 최근작들과 비교해서, <J. 에드거>는 폭력과 범죄로 지속된 미국 현대사의 중심부에서 무려 반세기가량 권력의 핵심이었던 한 남자의 삶을 치열하게 따라가는 전기영화다. 첨예한 정치영화이면서 고독한 전기영화이고, 영화적으로 과감하게 접근하면서도 불현듯 멈춰서 응시하며 경이로운 리듬을 잃지 않는 <J. 에드거>는 당연히 더 주목받아야 마땅한 작품이다.

제목 그대로 이 영화는 1920년대 초부터 48년간 FBI(미국연방수사국)의 국장으로 재직하며 공안정보 수집과 범죄 수사로 FBI의 체계를 오늘날에 이르게 한 J. 에드거 후버(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 대한 이야기다. 루스벨트부터 닉슨까지 총 8명의 대통령이 재임하는 동안, 후버는 무도덕, 무법에 대한 강경한 처단을 선포하며 수많은 범죄자들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외국인들을 가차없이 추방하며 실적을 올렸다. 무엇보다 그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수집한 정치 스캔들 정보를 이용해 말년에는 대통령과 직접 거래를 하며 권력을 놓지 않은, 미국 역사의 결정적 국면 뒤의 보이지 않는 손이다. 영화는 이 극단적 우익의 행보를 미국의 현대사와 겹쳐두면서, 그의 업적 뒤에 가려진 인간 후버의 취약함에 시선을 돌린다. 영화에서 그는, 실은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욕망하는 자이며, 거짓말쟁이이자 허풍쟁이이며, 자신이 이루지 않은 것을 포장할 줄 아는 영민한 미디어 전략가이다. 그에 대한 공공연한 소문 중 하나는 그가 동성애자이자 복장도착자였으며, 부국장 클라이드 톨슨과 죽기 전까지 연인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인데, 영화는 바로 이 부분에 상당한 무게를 둔다. 말하자면 그것은 그저 은폐된 사생활로서가 아니라, 후버의 공적 행보와 종종 분리 불가능한 기질의 근원으로 여겨지며, 이 영화의 기이함은 대체로 거기서 비롯된다. 이스트우드는 후버의 사생활을 스캔들로 다루지 않는다.

물론 J. 에드거 후버와 클라이드 톨슨의 실제 관계가 어떠했는지, 과연 그가 동성애자였는지, 영화 속 이야기의 어느 정도가 사실에 닿아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 사실관계가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 논쟁적인 사안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들은 더러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미국 저예산 B급영화의 대표적 감독이자 각본가이고, 1977년에 에드거 후버에 대한 영화(<에드거 후버의 개인적 파일>)를 만든 적 있는 래리 코헨은 장문의 글로 이 영화를 비판한다. 요지는 이스트우드와 각본가 더스틴 랜스 블랙(게이 인권운동가 하비 밀크의 생을 영화화한 <밀크>의 각본가)이 후버의 성정체성에 대한 소문을 역사적 진실로 호도하고 정작 그의 정치적 행적들은 충분히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러 악행들에도 불구하고 미국사회를 위해 독특한 역할을 수행한 후버에 대해 왜곡된 사실을 밝힐 의무가 있다는 게 코헨의 입장이다. 영화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사실관계에 대한 소모적인 이 비판은 30여년 전 미국 내에서 저평가받고 잊혀진 코헨 자신의 영화에 대한 환기를 목적으로 한 건 아닌지 종종 의심스럽다. 이 지면에서 길게 말할 문제는 아니지만, 정작 재미있는 건, 그런 후버에 대한 루머와 거리를 둔 코헨의 영화가 아이러니하게도 다음해 런던 게이 크리틱 어워드에서 상을 탔다는 사 실 정도다.

그다지 설득력없는 코헨의 비판에서도 알 수 있듯, <J. 에드거>에 대한 오해들은 에드거 후버에 대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명징한 입장을 요구하거나 찾으려고 하는 데서 나오는 것 같다. 말하자면, 이스트우드는 후버를 옹호하는가, 비판하는가. 혹은 후버의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는가, 비판하는가. 좀더 구체적으로는, 동성애자로서 후버의 애틋한 사생활을 부각한 건 후버를 옹호하기 위함인가, 비판하기 위함인가. 영화의 구체적인 장면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던져지는 이런 물음들은 이스트우드가 오랜 공화당원이라는 사실, 그럼에도 동성애를 철저히 자율적인 선택의 문제로 여긴다는 점, 배우로서 그가 연기해온 인물들이 줄곧 경찰, 제도, 국가를 믿지 않고 차라리 무법자로 돌아와 복수하는 자들이라는 점 등 실은 영화와 관련이 없는 사실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당연히 이스트우드의 영화가 이에 하나의 답을 내놓을 리는 없다. 오히려 <J. 에드거>의 봉인은 그 답이 불가능해지고 다음과 같은 위태로운 질문이 던져질 때 열린다. 더없이 정치적으로 논쟁적인 인물에 대한 전기영화가 인간의 이념, 신념에 대해 반응하거나 판단하지 않고서도 그 인간을 보여줄 수 있는가. 물론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인간의 순수하고 중립적인 영역에 대한 믿음이 종종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며 그 믿음이야말로 가장 정치적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이념이 제거된 무결점의 영역을 겨냥하지 않고서도 이 질문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것, 그 질문이 기존의 가치나 정치적 맥락에 의해 답해지는 게 아니라, 오직 영화적인 활동을 통해 끝까지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J. 에드거>는 보여준다. 여기, 한편의 전기영화로서 이 영화의 위엄이 있다.

“내가 누구를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영화에서 후버가 괴로울 때마다 가장 많이 내뱉는 말은 이것이다. “내가 누구를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이 완고하고 거침없어 보이는 남자는 실은 늘 타자의 공백을 불안해하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줄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판에 박힌 분석이기는 하지만, 그건 아버지의 부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영화상으로 그의 아버지는 정신적으로 병들고 아무 구실도 하지 못하는 노인으로 단 한번 등장하고, 이후 그 죽음조차 언급되지 않은 하찮은 존재다. 말하자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정상적’ 과정을 겪지 못한 후버는 상징계의 규범을 내면화하는 계기가 되어줄 초자아를 갖지 못했다. 그 자리에 대신 들어선 건 국가, 법, 시스템에 대한 그의 과도한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에 대한 욕망이다. 이 영화에서 어머니(주디 덴치)는 후버가 맞닥뜨리는 위기의 국면마다 등장하는 강하고 엄격한 규범 자체다. 영화 중반이 지날 즈음 어머니와 아들이 등장하는 한 장면이 있다. 일명 린드버그 사건, 즉 린드버그가의 납치유괴 사건을 담당하던 후버는 수일이 지나 결국 아이의 시신을 발견한다. 그날 밤, 어머니가 말한다. “우리는 이 땅의 무법이 자랄 때까지 묵인했다. 아이의 피는 우리 모두의 손에, 그리고 너의 손에도 묻어 있다.” 그때 거울 앞에 선 후버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뚫어지게 응시한다. 린드버그 사건은 마치 어머니의 이 말을 듣기 위해 영화에 필요했던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어머니의 말은 중의적이고 후버의 시선은 무언가에 건드려진 듯 불안정하다. 이 장면의 무력감은 더없이 무겁다. “이 땅의 무법”을 저지른 자는 정녕 저 밖에 있는 걸까. 후버는 거울 속에서 무엇을 보고 있을까. 어머니에 대한 후버의 과도한 의존, 인정욕구, 두려움이 이성에 대한 혐오와 공존하는 장면들로 이어질 때, 마치 우리는 희대의 권력자의 기질과 성정체성에 대한 이 영화의 정신분석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은 따로 있다. 영화 초반, 후버는 우연히 회사에서 알게 된 헬렌 갠디(나오미 왓츠)라는 아름다운 여인과 도서관에서 데이트를 한다. 아무도 없는, 오직 책들로만 둘러싸인 이곳에서 둘은 이상한 게임을 벌인다. 색인 카드들을 모아놓은 곳에서 헬렌이 한 단어를 내뱉고 시간을 재기 시작하자 후버는 그 단어와 서가 위치가 적힌 카드를 뽑아 책이 꽂혀 있는 책장을 향해 뛰어간다. 숭고하게 웅장한 도서관 내부의 공간, 책을 찾아 뛰어가는 후버의 자신만만한 움직임의 긴장과 그를 쫓아 책상들을 가로지르는 헬렌의 사뿐거리는 움직 임의 동선, 그 위로 흐르는 바흐의 정확해서 아름다운 선율, 째깍째깍 흐르는 초시계, 그 가운데 희미하게 보이는 서로에 대한 탐색, 이 모든 것들이 이루어내는 리듬의 기이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이 아름다움의 정체는 좀 이상하다. 책을 헬렌에게 건네주자마자, 걸린 시간을 묻고 나서, 후버는 상기된 표정으로 말한다. “이런 체계로 시민들의 지문, 신분, 목소리를 구분할 수 있다면 범죄자를 찾기 얼마나 좋을까요.” 반시스템적인 인간의 감정적 리듬과 정보, 분류, 파악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의 리듬이 조응하며 영화적 감흥을 만들어내는 이 도서관 장면의 생동감은 아름답고 그래서 섬뜩하다. 그러니까 이 장면에서 우리를 홀리는 것은 그 모순과 괴리이며, 그것은 이후 영화가 에드거 후버라는 인간을 역사에 겹쳐둘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후 이 분류체계로 수많은 사람들을 추방시키는 활약을 펼치며 승승장구한 후버는 더 많은 실적을 올리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의 아지트를 습격한다. 그런데 이 장면은 아나키스트의 대모 엠마 골드만을 추방하고 적극적으로 사상범들을 검거하며 내달려온 이전 장면들과 달리 망설이고 머뭇거린다. 동료 요원들이 아지트의 일원들에게 폭행을 가하며 제압하는 장면을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는 그의 시선과 표정에는 의기양양한 자신감이 조금도 묻어 있지 않다. 적에 대한 두려움 이면의 호기심, 깊은 체념과 허무 같은 그림자가 뒤섞여 불안하게 흔들린다. 마치 음습한 누아르처럼 찍힌 이 장면이 더욱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 모두가 떠나고 홀로 그 공간에 남아 두리번거리는 그의 모습 위로 (나이 든) 후버의 확신에 찬 내레이션이 울려퍼지며 이 장면의 모호한 요소들을 포괄하려고 애쓸 때다. “결국 우리는 4천명 가까운 과격 공산주의자들을 체포해서 500여명을 추방했다. 엄청난 불리함과 개인적 위험에 맞서 이룬 결과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존재의 불안정한 형상, 확신에 찬 이데올로기적 목소리, 존재가 동일시하는 이념, 그 명령을 벗어나는 욕망의 잔재 등이 부딪히며 일으키는 균열이 있다. 이데올로기와 그것의 분열적 징후가 분리 불가능한 채 뒤엉켜 작동한다는 표현이 맞을까. 그리고 그 균열의 현상만큼 인상적인 것은 하나의 영화적 장소에서 요소들의 불협화음이 이뤄낸 영화적인 감정의 덩어리다. 그것은 반드시 후버의 내면의 형상화라고만 표현할 수 없는 차라리 비인칭적인 감정이며, 어떠한 선언과 신념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시대의 분열된 심연이다.

판단하지 않고 보여주기

<J. 에드거>는 등장인물의 대사와 행동을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하고, 이에 근거해서 그 인물에 대한 영화의 입장을 읽게 하는 영화가 아니다. 대신, 그 인간의 역사가 영화적 층위들과 만났을 때, 이를테면 시선, 음악, 빛, 어둠, 움직임, 손길, 쓸모없는 제스처, 소리, 무의식 등의 활동과 그의 권력, 신념이 조응할 때, 인간=이데올로기로는 도저히 성립되지 않는 어떤 순간과 영역들이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세계의 상처, 혹은 얼룩, 혹은 무엇으로 부르든지, 이스트우드는 그것에 거울을 비추는 것이 미국의 역사와 그 역사의 수행자에 대한 비평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가 도달한 결론은 다소 의아하고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대통령이 된 닉슨에게 은퇴를 권고받은 뒤, 사무실로 돌아온 그는 어둠 속에서 웅크리며 울다가 위의 도서관 장면 이후, 그의 아내가 아닌 비서로 살아온 헬렌에게 마치 어머니에게 묻듯 말한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죽인 건가요?” 더이상 권력을 유지할 명분을 잃은 그가 오래된 파트너 클라이드를 찾아가 저녁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클라이드의 입을 통해 후버의 지난 업적이 얼마나 거짓된 것이었는지 알게 된다. 그러나 격렬하게 싸울 힘도 남아 있지 않은 두 연인은 다음날의 저녁을 약속하며 손을 잡는다. 악행에 공모한 역사이자 사랑의 역사이기도 한, 이제는 늙고 병든 둘의 손. 마치 화려한 가죽이 모두 찢긴 초라한 남자의 형상으로 집에 돌아온 후버 위로 그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신념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삶은 인간이 만든 체제를 초월하고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다.” 다음날, 그는 죽은 채 발견된다. 끊임없이 선과 악을 구분하고 적을 만들어내며 자신을 증명하던 이 남자가 생의 마지막을 예감하며 평생 고수하던 신념을 모두 뒤엎는 듯한 말을 할 때, 그것은 반성과 후회인가. 후버가 수집한 정치인들의 사적 정보들이 모두 파기된 뒤, 연인 클라이드에게 끝내 남겨진 파일은 루스벨트 부인과 그녀의 동성애인을 오간 달콤한 연애편지다. 정치적인 목적들이 모두 쓸모없는 종잇조각이 된 뒤에도 여전히 살아남는 건 사랑의 목소리라는 말인가. 그 감상주의는 노년이 된 오랜 냉소주의자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결론이기도 한가. 조금 망설여지지만 그런 것 같지 않다. 텅 빈 기표들을 돌아 영화가 도달한 곳에 사랑이 있는 것은 맞지만, 그 사랑은 그 텅 빈 자리에 의미를 되돌려주지 못한다. 그것은 악행을 미화해주거나 악행으로부터 구원해주는 사랑이 아니라, 그저 또 다른 분열의 흔적, 버릴 수 없었던 신념처럼 어찌할 수 없었던 사랑일 따름이다. 이스트우드는 인간 후버를 옹호도, 비판도, 연민도 하지 않으며 그의 죽음과 한 시대의 끝을 지켜본다.

전기영화가 인간의 이념, 신념에 대해 판단하지 않고서도 그 인간을 보여줄 수 있는가. 논쟁적인 인간, J. 에드거 후버에 대해 하나의 입장을 갖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 불가능한 질문을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살아 있게 만들었고, 나는 어떤 위대한 대답보다 그 질문을 지켜낸 것이 감동적이라고 생각한다. 부디, 신이 그에게 더 많은 날들을 허락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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