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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리] 당신은 배우가 될 운명이에요
이영진 사진 손홍주 2012-05-10

<코리아>의 한예리

“얘 좀 찾아와봐!” 사람엔터테인먼트 이소영 대표는 3년 전 <씨네21>(705호 뉴페이스 ‘춤추던 집중력으로’)을 뒤적이다 말고 긴급 수배령을 내렸다. 당시 이 대표는 <바다쪽으로, 한뼘 더>에 출연한, 김예리의 또렷한 눈빛에서 범상치 않은 강단을 발견했을 것이다. 신인배우 영입 시도는, 그러나 수포로 돌아갔다. “제가 무용을 하고 있으니까 저 친구는 ‘갈 길이 따로 있나보다’라고 생각하셨을 거예요.” 그 뒤로 2년이 흘렀고, 우연한 자리에서 김예리와 이 대표는 처음으로 대면했다. 이번엔 이 대표가 이겼다. “서른까지만 재미삼아 연기할 것”이라던 춤꾼 김예리의 마음이 흔들렸다. “(무용)선생님도 그러셨어요. 이런 기회를 놓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춤은 죽을 때까지 출 수 있는데 뭘 걱정하냐고.” 배우보다 춤꾼이 되길 원했던 가족도 “(배우)할 거면 제대로 하라”고 등떠밀었다. 김예리 대신 한예리라는 가명을 쓰게 된 것도 가족의 응원 덕분이다. “엄마가 한번은 인터넷에서 김예리를 검색했는데 동명이인이 너무 많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밖에 없는, 한예리가 어떻냐고 하셨어요. 아빠도 춤출 때는 김예리라고 하면 되니까 상관없다고 하시고. (웃음)”

기회를 따로 엿볼 필요는 없었다. 매니지먼트사에 들어가자마자 <코리아> 시나리오가 기다리고 있었다. 촬영 시작 3개월 전부터 안양에 있는 농심탁구단을 오가며 서브부터 드라이브까지 차례대로 익혀야 했다. 무엇보다 탁구선수 류순복은 오른손잡이였고, 그녀는 왼손잡이였다. 그랬으니 낯선 둥지에서의 출발을 불안해할 시간적인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현정화 감독님이 처음에 저보고 그런 (가는) 허벅지로는 탁구를 칠 수 없다고 했어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보면, 배우들이 진짜 운동선수처럼 보이잖아요. 그 말 듣고 시간 날 때마다 체력단련실을 들락거렸어요.” 흔한 거짓말처럼 들린다면, 인터넷으로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식 사진을 찾아보라. 빨간 드레스를 입은 한예리가 이날 뽐낸 건 ‘굵직하고 튼튼한 하체’였다. “현정화 감독님이 나중에 그 사진 보고 미안하다고 하셨어요. 자기가 연습을 너무 많이 시켜서 허벅지가 말벅지가 됐다고. (웃음) 그런데 전 그 말을 칭찬으로 들었어요. <코리아>는 스포츠영화이고, 관객이 <코리아>에서 보고 싶어 하는 건 배우 한예리가 아니라 탁구선수 류순복이잖아요.”

능숙한 이북 사투리의 막내

<기린과 아프리카> <봄에 피어나다> <푸른 강은 흘러라> <백년해로외전> 등 그동안 한예리가 출연했던 작품들을 챙겨봤다면 류순복의 첫 등장 장면부터 꽤 마음을 졸일 것이다. 독립영화와는 다른 상업영화라는 자장 안에서도 한예리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연기가 통할까. 사실 남북 단일팀 선수복을 입고서 배두나와 나란히 호텔 로비에 서 있는 첫 장면은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다. “모든 것이 처음이고, 그래서 힘들어하는” 인물을 연기하고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부조화의 인상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 걱정은 물론 잠깐이다. 유니폼 입고 녹색 테이블 앞에 선 한예리는 능숙한 이북 사투리를 선보이며, 막내 류순복을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북한팀 선수들의 대사는 ‘허투루’가 없어요. 할 말만 내뱉다보니 감정도 조금씩만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순복이가 (현정화의 말투를 흉내내며) ‘화이팅!’이라고 외칠 때는 (문현성) 감독님과 씨름을 좀 했죠. 어쨌거나 내 입에서 그 말이 잘 안 나오니까. 감독님은 관객을 위해선 직접적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하시고. 이전엔 제가 감독들의 주문을 잘 받아주는 배우라고 생각했는데, 제 안에도 고집이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죠. (웃음)”

복식 경기에서 동료와의 호흡만큼 중요한 건 없다. 탁구가 아니라 테니스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호흡을 맞추기 위해선 같은 편 선수의 움직임과 스타일부터 파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전에서 두 사람이 엉키고 설킨다. 연기라고 다르지 않다. 배우가 품었던 감정을 훼손하지 않고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하려면, 동료 배우와 손발을 맞춰야 한다. 게다가 극중 류순복은 현정화와 리분희 사이를 오가는 가교 같은 역할이다. 한예리는 다른 궤적의 길을 걸어왔던 하지원, 배두나의 무엇을 훔쳐봤을까. “지원 언니는 학구파예요. 메모를 정말 꼼꼼하게 하세요. 감독님과 상의도 많이 하는 편이고. 전 대본을 잘 안 보거든요. 언니 시나리오 보면 (부풀어올라서) 두께가 제 것의 두배가 넘어요. 그런 걸 보면서 캐릭터에 접근할 때도 여러 가지 측면을 따져봐야겠다 싶고. 두나 언니는 집중력이 대단해요. ‘컷’ 하면 모든 걸 다 비웠다가 다시 카메라 앞에 들어설 때는 금세 감정을 채우거든요. 반면 저는 음, 뭔가 거슬리는 게 있으면 한번씩 쳐다보게 돼요. 제가 더 나은 거요? 키도 안되고, 얼굴도 안되고, 뭐가 있지. 하하하.”

독립영화와 무용도 놓치지 않는

<코리아>는 한예리에게 예상치 못한 시작점이자 의미있는 변곡점이다. 그렇다고 앞으로 상업영화만 찍겠다는 건 아니다. <코리아>를 전후로 단편 <평범한 날들> <Bang!> <물리수업>과 강진아 감독의 장편 데뷔작 <환상속의 그대>도 찍었다. “<환상속의 그대>는 <백년해로외전>의 장편 버전이에요. 맡은 역할도 <백년해로외전>의 차경이고. 다만 단편에 비하면 살아남은 이들에 대해 애틋한 감정을 더 많이 드러내는 캐릭터예요. 6m 높이의 수족관에 들어가 몸길이가 3m 되는 큰돌고래 세 마리랑 같이 수영하는 장면을 찍었는데. 조련사들이 위험하지 않다고 하면서도 만에 하나 돌고래가 물면 손에 ‘빵구’난다고 해서 많이 쫄았어요. 너무 위축돼서 그 장면 찍을 때 경기 일으키고 그랬는데. 지금 와서 보면 그러지 말걸 싶기도 해요. 다신 할 수 없는 경험이잖아요. 놀라도 걔네들(돌고래)이 더 놀랐을 텐데. (웃음)” 춤 역시 내팽개치지 않았다. 지난 2년 동안 정신혜 무용단의 <찰나-소나기를 품다> <굿+Good> 등에 주역 무용수로 출연하며 대극장 공연까지 치렀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여전히 춤추는 사람이었는데. 그래도 <코리아> 개봉하고 나면 무대 관객도 조금은 늘지 않을까요?”

조급해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

한예리는 조급해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어쩌면 이 느긋함은 춤에서 연기로, 독립영화에서 상업영화로 영역을 조금씩 넓혀가면서 확인한 자신의 재능 때문일 것이다. 중요한 건 이 유연하고 신선한 재능이 “배우가 되고 말 거야!”라는 본인의 최면이 아니라 “배우가 틀림없어!”라는 주변의 확신에 의해서 발견됐다는 점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한 그녀는 품앗이 연기를 하다 금세 독립영화를 대표하는 배우가 됐고, 높은 진입장벽을 뚫고서 상업영화에서 비중있는 배역을 따냈다. 그녀가 아니라 주변에서 원하고 바란 결과다. 자, 그렇다면 상상해보자. “춤이든 연기든 재밌으면 장땡”이라는 한예리가 배우로서 욕심까지 독하게 품는다면? “하나 했다고 다음 하나가 곧바로 오는 건 아니잖아요. <코리아>의 류순복은 1년도 안돼서 잊혀질지도 몰라요. 걱정을 안 하는 건 아니죠. 하지만 걱정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잖아요. 그런 고민까지 떠안기는 버겁고. 주어진 일에 집중해야죠.” 말은 그래도 욕심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저 독립영화에선 멜로 전문이었잖아요. (상업영화에선) 언제 할 수 있을까요? 머리 기르면 될까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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