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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영] 배우의 욕망
강병진 사진 오계옥 2012-06-21

<후궁: 제왕의 첩>의 박지영

돌이켜보니 헷갈렸다. 박지영이 연기했던 건 장녹수였나, 경빈 박씨였나, 장희빈이었나. “시골에 가면 어르신들이 아직도 장녹수 왔다고 하시는데, 내가 경빈 박씨를 연기했는지, 장희빈을 했는지 헷갈려하는 분들도 있다. (웃음)” 박지영은 지난 1995년에 방영된 드라마 <장녹수>의 주인공이었다. 비천한 출신의 녹수는 장안 제일의 기생이 되고 연산군을 치마폭에 품는 거인으로 성장하지만 계급을 밟아가면서 맛본 권력에 중독돼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사극에서 치열하게, 때로는 악독하게, 그러나 안타깝게 살았던 여자들이라는 점에서 녹수와 경빈 박씨와 장희빈의 본질은 상당히 닮아 있을 것이다. <후궁: 제왕의 첩>(이하 <후궁>)에서 박지영이 연기한 대비 또한 그녀들과 삶을 공유하고 있는 여자다. 궁에 서린 공포의 근원이나 다름없는 대비 역시 그 자리에 힘겹게 올랐을 것이고, 그만큼 수많은 위기에 놓였을 것이고, 그래서 왕에 오른 아들을 다그치면서 질주할 수밖에 없었을 여자다. <장녹수> 이후 사극을 피했던 박지영은 “장녹수가 늙으면 영화 속 대비가 되었을 것 같다”라는 생각에 <후궁>을 선택했다. “녹수보다 더 매력적인 여자를 연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녹수는 그저 악한 여자가 아니라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여자다. 사극드라마에 그만큼 정당성있는 악역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후궁>의 대비는 악한 모습보다 불쌍하고 처연해 보이는 느낌이 더 큰 여자였다.”

장녹수, 그리고 <후궁> 속 대비

<후궁>은 기존의 사극이 보여주지 않았던 궁의 풍경을 드러내고자 하는 야심을 지닌 영화다. 여러 인물 중에서도 대비 캐릭터는 유독 그러한 영화의 야심과 맞닿아 있다. 아마도 그녀에게 가장 낯설게 느껴진 것은 대비의 헤어스타일이었을 거다. 머리 양옆으로 곡선을 그리는 모양의 스타일은 대비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는 장면에서 상당히 기괴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팔자 머리라고 하던데, 나는 부메랑 머리라고 했다. 그 머리를 했을 때 내가 꺼낸 첫마디는 ‘가볍다’였다. <장녹수>를 찍을 때는 가채가 너무 무거웠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그만큼 고민이 많아서 머리가 무거운 거겠지. 하지만 대비의 머리는 가벼우면서도 강렬했다.” <후궁>의 대비는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체통을 지키려는 다른 대비들과 색깔이 다르다. 그녀는 왕이라고 해도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아들이라면 뺨을 때릴 수 있는 엄마이고, 왕이 무릎을 꿇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아이는 10개를 다 잘하려고 했는데, 그중에 2개를 못했다고 가차없이 응징하는 엄마다. 칭찬에 인색하고, 실수에 인색한 여자이니 얼마나 외롭겠나. 실제의 나와는 너무 다른 엄마다. 아이들에게 전부를 다 바칠 만한 것도 가지지 않았고, 어느 학원이 좋다고 알려줄 동네 아줌마도 없다.” 무엇보다 대비가 심복인 남자와 나누는 성적인 뉘앙스는 이후의 사극을 이야기할 때 회자될 만한 장면이다. “사실 시나리오상에서는 좀더 센 표현이 있었다. 거의 입을 맞추는 장면까지 있었는데, 나는 거기서 그러면 안될 것 같더라. 그 상황에는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다. 상대에게 상을 주거나 혹은 나에게 상을 주는 개념의 관계니까.” 감독과 배우의 고집이 맞붙었던 이 장면을 촬영하면서 박지영은 팔을 떨면서 버텼고, 상대배우는 그녀를 잡아당기고, 김대승 감독은 컷을 외치지 않았다. “감독님한테는 웃으며 말했다. 여정이가 저렇게 힘들게 연기를 하는데, 나까지 하면 너무 섹시해서 안된다고. (웃음)”

박지영은 대비를 연기하는 동안 “내가 장녹수를 너무 못했구나”라고 생각했다. 27살의 자신이 정작 장녹수의 욕망을 생각해보지 못한 것 같았다. “사실 그때의 내가 욕망이 뭔지 어떻게 알았겠나. 나조차도 녹수를 보면서 너무 독하다고만 생각했었다.” 당시는 캐릭터보다 주말연속극이나 미니시리즈의 주인공이라는 타이틀에 이끌렸던 때다. 이유가 단출했던 그때에 비해 “나이가 들어 조연으로 밀려난” 지금 그녀는 드디어 자신만의 고민을 하고 있다. <장녹수>부터 <꼭지>까지 항상 녹록지 않은 여자를 연기하면서 “왜 진짜인 나와 남들이 보는 내가 이렇게 다를까” 하고 고민했던 것도 이제는 사라졌다. “그게 배우더라. 진짜인 나를 보여주려면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를 찍어야지. 배우는 결국 생김새대로 하는 거다. 옛날에는 변명도 했는데, 이제는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 건 나만 알면 된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난 거고. 그렇게 시크하고 세련돼 보이는 걸 어쩌겠나. (웃음)”

연기란 꿈을 꾸는 여행자

현재 베트남에서 살고 있는 박지영은 “연기를 할 때는 여행자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따져볼 때, 그녀는 평균 3개월마다 연기를 했고, 언제나 아이들의 방학을 이용했다. <우아한 세계>는 여름방학에, <하녀>와 <후궁>은 겨울방학에 촬영한 작품이다. 일을 끝내고 가족과 함께 있을 때는 들어오는 작품들에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다. “예민하게 본다. 이래서 못하겠네, 저래서 못하겠네라고 짚어보게 되더라. 그런데 애들 방학이 시작할 때쯤이면 내가 다시 날개 잃은 천사가 된다. 애들도 눈치를 채고 가서 일하라고 하는데, 그때는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리는 거다. 이래서 하고 싶어. 저래서 하고 싶어.” 지금 그녀에게 연기는 전부가 아니다. “직업이다. 난 내 삶을 살고 싶다.” 한국에 올 때마다 아이들과 화상통화로 1시간 넘게 이야기하는 것도 행복하다. “한집에 살면서 그러긴 힘드니까.” 당연히 배우로서의 목표 또한 달라졌다. “옛날에는 연기 잘해서 칸영화제도 가고 싶었다. 그런데 잠시 떠나 살면서 그게 목표가 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나면 죽고 말게 아니니까. 나는 윤여정 선생님이 사는 모습이 너무 좋다. 그분은 칸영화제에서 상을 타는 게 중요하지 않은 분이다. 예쁜 드레스를 입고 레드카펫을 오가는 모습만으로도 놀라운 거고 감동이다. 난 이제 내 안의 다양한 모습을 누군가가 찾아주기를 바라고 있다. 다양한 역할로 오래하는 게 목표랄까?” 그녀는 최근에 만난 한 팬과의 일화를 얘기했다. <후궁>의 무대 인사를 올라가던 도중, 그녀와 비슷한 연배의 한 여자가 다가와 말했다. “이렇게 계속 연기해줘서 고마워요.” 정신이 없는 순간에도 박지영은 그때의 감동을 오랫동안 품고 있었다. “날 보러오는 사람이 있구나. 그분은 아마도 함께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 저 여자가 옛날에 <장녹수>나 <꼭지>에 나왔던 사람이라고 이야기했을 거다. 그런 분들이 많지는 않겠지만 그분이 용기있게 말해준 덕분에 나도 용기가 생겼다. (웃음)” 40대 여행자의 패기는 이제 더욱 강렬해질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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