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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철의 아주 사적인 클래식]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감독의 다른 영화

<굶주림>(Sult), 헤닝 카를센, 1966년

<굶주림>

케이블TV에 나온 한 문학평론가가 “요즘 사람들은 어린 시절의 고통에 대해 과민반응한다”고 말했다. 앞에 앉아 있던 의사가 빤한 말로 맞받아쳤다. 그는 어린 시절에 겪은 상처들이 정상적인 인격 형성과 발달에 막대한 지장을 준다고 답했다. 객석에 앉은 도시 샌님들은 물론 의사의 손을 들어줬고, 평론가는 변론의 기회를 상실한 채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성인으로 몰려야 했다. 고통과 불안을 무조건 치유하려고만 드는 치들이 있다. 그들에게 뒤틀린 경험은 응당 멀리해야 하는 대상이다. 진정한, 그리고 고유한 인간으로 성숙하려면 고통마저 껴안아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는 것 같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의 주인공은 아흔살 먹은 작가다. 그는 12살 나이에 이미 홍등가를 들락거렸던 불한당이다. 여든 중반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사랑 앞에서 여전히 가슴 설레는 아흔 노인을 그린다. 노인의 첫사랑은 행복이란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고통, 시기, 질투, 분노, 불안에 떨고 심지어 광기에 휩싸인 끝에 드디어 진실한 첫사랑에 도달한다. 맙소사, 아흔 나이에도 그래야 한단 말인가.

<굶주림>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을 연출한 헤닝 카를센은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동갑내기다. 한국에선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덴마크를 대표하는 감독으로서 70년대 전후에 전성기를 보냈다. 그는 이전에도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원작을 영화화한 적이 있다. <굶주림>이 그 작품이며, 인물의 끔찍한 심리적 여정을 얼굴과 몸짓으로 표현한 페르 오스카손은 칸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굶주림>은 주린 배를 움켜쥔 채 크리스티아나(지금의 오슬로)를 방황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함순은 ‘정말이지 처량한 처지에 빠져 있었다. 비참한 삶이 하도 혐오스럽고 피곤하게 느껴져서, 더이상 이런 삶을 유지하려고 발버둥칠 가치도 없을 것 같았다. 시련은 나를 제압하고 짓눌렀다’라고 썼다. 영혼을 잃지 않으려고 몸부림친 경험이 없는 인간은 남자가 왜 그렇게 주린 배로 고생하는지 알지 못한다. 수난은 그리스도만 겪는 게 아니다. 연필과 종이와 글, 그것은 작가의 자존심이고 영혼이며 때로 그의 창자 속으로 들어가 양식이 되기도 한다. 비슷한 경험이 없었다면 함순은 <굶주림>을 쓰지 못했다. 빈곤한 집에서 태어나 끝없이 노동하고 방랑하며 굶주렸던 그의 문학적 스승은, 그러니까 삶의 역경이다. 나는 오랫동안 고통과 소통하지 않으려 애썼다. 고통이 내 삶을 빛낼 수 있다는 사실을 맹렬히 거부했다. 심신이 아픈 걸 견디기 힘들었던 까닭이다. 오래전, 내게 <굶주림>의 주인공과 꼭 닮은 친구가 있었다. 도무지 뭘 먹지 않는 탓에 그는 보기 괴로울 정도로 야위어갔고, 급기야 환영까지 보게 돼 정신병원에 강제로 끌려갔다. 퇴원한 뒤 찾아온 그에게 나는 “더이상 나를 찾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배에 기름을 잔뜩 채우던 시절에 내 입에서는 그런 험한 말이 쏟아져 나왔다. 많이 배고픈 지금(신이여, 나를 용서하소서), 나는 고통에 허덕이던 그 친구가 다른 어떤 친구보다 그립다. 혹시 그를 만나면 먼저 사과부터 하리라. 그가 나를 용서한다면, 네 고통받던 심장에 잠시 손을 얹어도 되겠냐고 물어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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