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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shion+] 다이아몬드는 훔쳐도 나이는 안 훔친다

<도둑들>의 배우들이 뿜어내는 매력

지난여름, 다이어트를 했다. 외국 거리패션 사진 속에서 20대 아가씨들이 입고 있는 데님 반바지, 길이를 너무 짧게 자른 나머지 주머니 안감이 바지 밑단으로 비어져 나와 있는 그 반바지가 죽을 만큼 입고 싶었거든. 타고나기를 ‘상박하후’ 체형인지라 살을 빼고 또 빼도 거리패션 사진에 나오는 아가씨들처럼 가시 다리가 될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가시 다리만 다리더냐, 섹시하기로 치자면 밀라 쿠니스나 스칼렛 요한슨처럼 탄탄한 허벅지가 백배는 더 섹시하지, 혼자 생각했더랬다.

그래서 입었냐고? 못 입었다. 빼도 빼도 빠지지 않는 허벅지 살도 살이지만, 더 큰 이유는 나이였다. 어느 주말 오후, 나보다 서너살 많은 회사의 누군가가(편의상 그녀를 A라 부르기로 한다) 그 바지를 입고 온 걸 보는 순간, 세상에는 체형 때문이 아니라 나이 때문에라도 포기해야 하는 옷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나 할까.

몸에 딱 붙는 탱크톱에 힙 라인이 보일 듯 말 듯한 반바지를 입고 밀짚으로 엮은 모자까지 눌러쓴 A는 여름의 햇살처럼 화사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허벅지 뒤쪽의 자세히 봐야만 보이는 약간의 셀룰라이트를 제외하면 그녀의 몸은 마흔살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탄탄했지만 조금도 부럽지 않았다. 부럽기는커녕 굳이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눈에 띄는 셀룰라이트로 똘똘 뭉친 내 허벅지에 감사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셀룰라이트가 아니었다면 나도 A처럼 엉덩이가 드러날락 말락 하는 반바지를 입고 사무실을 누볐을 테고, 동료들은 속으로나마 ‘주책바가지’라고 나를 손가락질했을 테니까.

그런 측면에서 <도둑들>은 진정한 걸작이다. 쟁쟁한 배우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데다 그 쟁쟁한 배우들 하나하나가 다 초특급 주연배우들이라 서로 매력을 뽐내고 경쟁하는 과정에서 어느 하나에게 그늘이 드리울 법도 하지만 모두가 저마다의 아우라를 온전하게 뿜어내니까. <도둑들> 속의 배우들은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경쟁하지 않는다. 남의 매력을 탐하며 기웃대지도 않는다. 대신 자신의 나이가 아니면 뿜어낼 수 없는 매력을 있는 그대로 발산하는 데 집중한다. 이렇게 멋지고 개성 강한 인물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영화는, 게다가 다양한 연령이 동등한 비중으로, 말하자면 똑같은 절박함으로 같은 레이스를 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영화는 아마 <도둑들>이 유일하지 않을까.

영화에서 팹시(김혜수)는 말한다. 훔치는 것은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나이듦을 감추거나 더디게 만드는 온갖 시술과 비법이 난무하며, ‘한살이라도 어려 보이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생각을 주입하는 광고나 방송들이 판을 치는 요즘 같은 때엔 어려 보이고 싶은 욕망을 누르는 것이야말로 ‘힘겹고 고독한 자신과의 싸움’이 아닐는지. 패배할 경우 주책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체절명의 승부!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졌다는 이야기에 알록달록한 비니를 눌러쓰고 출근한 내가 이런 글을 쓰고 있다는 게 좀 웃기긴 하지만 니트 비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30대 중반이 되니 머리는 더 시리던걸. 나이 먹어도 아침잠은 영 줄지 않아 오늘 아침엔 머리 감을 시간이 도저히 안 나던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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