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신,전영객잔
[신 전영객잔] 어쩌면, 가능성

장르와 기술을 계승하기보다 넘어버린 <레미제라블>와 <라이프 오브 파이>의 고민과 쾌락

<레미제라블>

많이 다뤄졌지만 두 영화가 계속 머리에 남았다. <레미제라블>과 <라이프 오브 파이>는 각기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영화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도록 요청한다는 점에서 재론을 양해해 주시길 바란다.

혁명가가 울려 퍼지고 붉은 깃발이 나부낀다. 광장 중앙의 거대한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시민군과 경찰이 대치하고 있다. 바리케이드의 정상에는 우리의 주인공들이 모두 돌아와 있다. 경찰에 사살된 젊은 혁명가들, 슬픈 사랑을 품고 눈을 감은 여인, 외롭고 고단한 생과 마침내 작별한 장발장, 그리고 혁명의 새벽을 지켜주지 못한 시민들까지. (그들이 부르지 않는) 장엄한 노래가 광장을 가득 채운다. ‘들리는가, 민중의 소리가….’ 그들은 모두 듣고 있다는 듯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에토스의 분열에도 <레미제라블>에 사로잡히다 <레미제라블>의 마지막 장면은 감동적이고도 당혹스럽다. 이 장면은 분명히 판타지다. 죽은 자와 부재자의 귀환이라는 점에서 그러하고, 이 영화의 역사적 배경인 1832년의 프랑스 급진공화파의 봉기가 파리 시민의 이탈로 실패한 혁명이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서사의 내적 논리로 굳이 설명하려 든다면 이 장면은 이 시점으로부터 40여년 뒤에 일어날 파리코뮌을 예기(豫期)하는 희망의 송가다. 오늘은 패했지만 내일은 승리하리라, 라고 그들은 노래하는 것 같다(물론 세계 최초의 시민-노동자 정부인 파리코뮌도 3개월 만에 막을 내리긴 했지만).

이 장면의 파토스는 거부하기 힘들 만큼 강렬하다. 그런데 그 파토스의 정체는 좀 수상쩍다. 먼저 이 장면이 놓인 위치가 좀 이상하다. 우리는 이미 젊은 혁명가들의 몰살 그리고 유일한 생존자인 귀족청년 마리우스와 아름다운 은둔자 코제트의 행복한 결합을 차례로 목격했다.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나는 혁명의 실패를 슬퍼하고 두 남녀의 행복한 결합에 안도했다. 이 영화의 서사에 이끌리는 나의 소망은 실은 뻔뻔스럽다. 그 소망은 민중 승리의 서사와 신데렐라 스토리(부유한 귀족의 아들 마리우스와 천민 출신 코제트의 결합)가 동시에 성립하는 것이다. 두 가지 서사를 혁명과 사랑이라는 추상명사로 요약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한편의 서사를 말하는 평자가 다루는 것은 혁명과 사랑이 아니라, 그러한 이름으로 불리는 개별적 사건들의 표상일 뿐이다. <레미제라블>은 각성과 보살핌이 주된 모티브인 장발장의 개인사가 중심 서사로, 급진공화파의 실패한 혁명과 계급이 다른 두 남녀의 로맨스라는 두 가지 서사가 하위 서사로 배치되어 있다. 중심 서사와 하위 서사의 결합 방식은 유기적이라기보다 기계적이어서, 몇 가지 독립적인 이야기가 이어 붙여져 있다는 인상마저 든다. 어느 정도 원작의 성격에서 유래하는 이 서술 방식 자체를 중대한 결함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문제는 두 하위 서사의 배열에 있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신데렐라 스토리는 민중혁명의 실패라는 조건 위에서만 성립한다. 혁명 성공으로 귀족계급이 폐지된다면 신데렐라 스토리는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패한 혁명 그리고 몰살당한 혁명가들에 대한 이 영화의 애도 그리고 그것에 공명하는 우리의 애도는 가증스러운 것이다. 재벌 해체를 주장하면서 재벌기업 취직을 축하할 수 없는 것처럼, 귀족 타도를 외치면서 귀족의 은총에 기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것을 혁명 전야에 사랑에 빠져버린 열혈 청년 마리우스의 딜레마와 혼동해선 안된다. 문제는 사랑의 열병이 아니라 신데렐라 스토리이며, 감정의 파토스가 아니라 서사의 에토스다. 마지막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혁명의 꿈도 사랑의 열망도 모두 성취된 듯 이 불멸의 광장엔 감격과 희열의 빛으로 가득하다. 이 장면이 40여년 뒤의 파리코뮌을 예기한다는 앞선 가설은 실은 무의미하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레미제라블>을 관람하는 데 19세기 프랑스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조차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의 전체 서사의 내적 요구가 불러온 판타지다. 그 요구는 두 하위 서사가 지닌 에토스의 분열을 봉합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귀족 청년으로 돌아간 마리우스와 도피자의 신분에서 벗어난 코제트의 행복한 결혼이라는 극중 결말의 죄의식을 판타지로 위장하는 것이다.

봉합하거나 위장한다고 해서 분열이 해소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대중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다면, 그것은 상반되는 에토스를 분열이 아니라 공존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월가(Wall Street)에 집결해 ‘99%의 분노’를 표출한 사람들 중 다수의 롤모델은 스티브 잡스일 수 있다. 어쩌면 안철수라는 인물에 대한 놀라운 지지에도 이중적 에토스가 반영되었을 수도 있다. 혹은 전혀 다른 방식이지만,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프랑스 공화파와 연대했던 자유주의 귀족의 태도를 이중적 에토스와 연관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것은 능력 밖이며 이 지면의 목적과도 무관하다.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이 장면이 그리고 이 영화가 일반 관객뿐만 아니라 몇몇 지적으로 예민한 사람들도 사로잡았다는 점이다. 그들의 견해를 거칠게 요약하면 “서사가 아닌 사랑의 파토스와 마주하라”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견해를 반박하고 싶은 의욕이 별로 생기지 않는다. 나도 이 영화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에토스의 분열을 중대한 결함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두 번째 볼 때조차 이 영화에 저항하지 못했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 평자들은 종종 해당 영화를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 명단에 올리곤 한다. 하지만 <레미제라블>을 그 명단에 올리는 것은 망설여졌다. 무언가 다른 게 있을지 모른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 느낌을 조금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려 한다.

고전 뮤지컬영화와 다른, 너무 먼

무엇이 에토스의 분열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었을까. 대답이 한 가지는 아니겠지만 모든 대화와 독백을 대체한 노래가 그 실마리일 것 같다. 만일 노래가 리얼리즘적 대사로 되돌려진다면 이 영화는 견딜 수 없이 엉성하고 가증스러운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이건 너무 단순한 대답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서라면 이 단순한 대답에서 시작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사소한 대사마저 노래로 이루어지는 첫 10여분간 이 영화는 대단히 어색해 보였다. 특히 경찰 자베르 역을 맡은 러셀 크로의 둔하고 밋밋한 노래는 듣기 괴로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장발장이 교회의 은촛대를 들고 참회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 혹은 판틴이 머리를 자른 채 애절한 목소리로 <I Dreamed a Dream>을 부르기 시작했을 때, 이 영화를 거부하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이 영화에 대한 호불호는 이 영화의 노래에 대한 호불호와 직결되어 있는 것 같다(뛰어난 영화적 안목을 지닌 두 지인은 <레미제라블>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는데, 그들은 이 영화의 노래가 좋지 않다고 말했다. 그들의 공통점은 매우 세련된 음악 취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래의 마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랴. 우리는 하나의 노래를 듣고 그 노래의 감흥에 겨룰 수 있는 영화가 많지 않다는 것을 종종 느낀다.

이런 일은 무대극을 볼 때도 일어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뮤지컬 <모차르트 락 오페라>의 공연 영상 관람은 좀 특별한 경험이었다. 뮤지컬에 관심도, 지식도 별로 없었지만 다른 일로 이 영상물을 상영하는 극장에 들어갔다가 첫 노래에 넋을 잃어 선 채로 2시간10분 동안 관람했다. 영화 <아마데우스>(1984)의 이야기에서 몇 장면만 발췌해 거칠게 이어 붙인 듯 앙상한 서사의 이 뮤지컬 영상물에서 노래보다 더 강렬한 것은 없었다(이 영상물의 또 다른 매력은 무대 뮤지컬에는 없는 클로즈업에 있다. 이것은 뒤에 다시 말하려 한다). 반면 예수와 유다의 삶을 인 간적이고 진보적으로 재해석한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내가 본 것은 무대를 현대 빈민가로 옮기고 후면 스크린을 활용한 40주년 기념공연이며 역시 실황 영상으로 관람했다)의 서사는 상대적으로 더 흥미로웠지만 귀를 사로잡는 노래가 별로 없었고 감흥이 작았다.

<레미제라블>의 파토스는 그것의 혁명 서사, 혹은 멜로드라마, 혹은 영화적 장치가 아니라 노래 그 자체에 연관돼 있다. 내가 그 노래들에서 느낀 매혹과 다른 사람들이 느낀 불만을 분석하고 판별할 수 없는 한, 영화평자로서의 무력함을 인정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설사 분석 판별될 수 있다 해도 그것은 음악의 일이 될 것이다. ‘영화’ <레미제라블>은 여러 가지 면에서 <사랑은 비를 타고>(1952)나 <밴드 웨건>(1953)보다 <모차르트 락 오페라>의 공연 영상물에 가깝다. 혹은 그 사이 어디엔가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이것이 영화로부터 무엇을 전용했는가’이거나 혹은 ‘이것을 우리가 영화로 불러야 한다면 영화라는 것의 범주가 어떻게 수정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일일 것이다.

<레미제라블>이 과연 뮤지컬영화인가라는 질문이 앞서야 할 것 같다. 정한석이 이미 지적했듯이 고전적 뮤지컬영화는 노래의 영화라기보다 춤의 영화다(‘군중의 기억 속으로 따고 들어가다’ <씨네21> 890호 전영객잔). 프레드 아스테어, 진 켈리, 진저 로저스 등 고전기 뮤지컬 스타들은 춤의 귀재들이었다. 그들의 노래는 대개 춤과 함께 시작되고 일상의 장소는 연행 무대로, 이웃과 행인들은 군무자들로 변하며 사건은 진행을 멈추고 삶의 현장은 축제의 난장이 된다. 한바탕 집단 가무가 펼쳐진 뒤 노래는 춤과 함께 끝난다.

이런 영화들에서 노래는 대사로 대체 불가능하다. <레미제라블>에서는 그 대체를 상상할 수 있지만 <파리의 아메리카인>(1951)에서는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후자에서 노래의 가장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가 춤을 동반해 공간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인공들이 노래하고 춤추기 시작하자 (스크린 속) 세상이 바뀌는 것이다. 노래는 의미 전달이 아니라 이 변화를 개시하는, 춤의 보조적 표현인 경우가 더 많았다.

고전 뮤지컬영화의 위대성 가운데 하나는 장소가 무대로, 행인이 연행자로, 생활이 축제로 변하는 순간의 놀라운 연속성에 있다. 서사적 연속성이든 논리적 연속성이든 정서적 연속성이든 양자의 이음매는 사라지고 한편의 영화에서 완전히 새로운 소우주가 태어난다. 약호화된 세트에서 펼쳐지는 무대 뮤지컬은 장소의 물질성을 표현할 수 없으므로 이 이행은 뮤지컬영화의 고유한 자질 가운데 하나다. <춤추는 대뉴욕>(1949)에서 휴가 나온 세 해군이 뉴욕 전역이라는 실제 공간과 세 시간 반이라는 극중 시간을 3분여간 펼쳐지는 단 하나의 노래와 춤으로 돌파하는 도입부의 역동성과 충만함을 무대 뮤지컬에서 기대하긴 힘들다. <밴드 웨건>에서 프레드 아스테어가 부르는 피날레송 <세상은 무대>(The World Is the Stage)는 이 장르의 이념이기도 하다.

고전기 뮤지컬영화의 대가들은 ‘세상’과 ‘무대’의 서사적 간극을 없애는 데 필사적이었다. 공연을 앞둔 공연자들의 갈등을 다룬 백스테이지 뮤지컬이 이 장르에 많았던 것도, ‘통합의 피날레’를 성공적인 공연으로 마무리할 수 있다는 이점과 함께, 생활과 공연의 연속성을 비교적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생활을 공연처럼, 공연을 생활처럼’이라는 표어로 요약될 수 있다. 고전기 뮤지컬 스타들은 노래하듯 말하고 말하듯 노래하며, 춤추듯 걷고 걷듯 춤춘다. 그들은 마치 육체에 악기가 내장된 듯 사소한 움직임과 지나가는 말 한마디로도 놀라운 리듬을 빚어낸다.

이 천재들은 이미 자신의 육체에 세상과 무대의 연속성을 새겨놓고 있으며, 거의 마술사인 그들에게 생활에서 연행으로의 이행은 한 걸음 옮기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진 켈리가 리드미컬한 최소의 동작만으로 작은 방을 침실에서 거실로 순식간에 바꿔놓는 <파리의 아메리카인>의 도입부는 뮤지컬 장르의 알레고리이면서 움직임의 마술적 음악성을 심드렁하게 보여주는 찬탄할 만한 사례다. 이 천재들의 육체가 약동하는 한편의 고전기 뮤지컬영화는 그 전체가 하나 의 음악이며, 그 연속성의 핵심은 서사적이거나 정서적이라기보다 음악적 리듬에 있다. 뮤지컬영화 스타들은 무성영화 시대의 위대한 유산 일부를 자신의 신체에 내재화한, 대체 불가능한 음악적 육체의 소유자들이다.

<레미제라블>

춤추지 않고, ‘표정의 노래’를 부르다

영화 <레미제라블>에는 고전 뮤지컬영화가 우리를 사로잡았던, 이행과 비약의 즐거움도 육체의 음악도 약동하는 리듬도 없다. <레미제라블>의 인물들은 춤추지 않고 노래한다. 고전 뮤지컬에서라면 일상적 대사가 어울릴 장면에서도 그들은 어색함을 무릅쓰고 노래한다. 공간 미장센은 사실주의적으로 균질화되어 있으며, 인물들은 노래라는 표현 양식에 고착되어 있다. 이 영화는 뮤지컬영화의 전통과 거의 무관해 보인다. 밥 포스의 후기 뮤지컬(<카바레>)처럼 고전기 뮤지컬에 대한 자의식적 비평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가장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되는 파렴치한 여관 주인 부부가 여관 홀에서 벌이는 현란한 사기의 퍼포먼스가 이 영화에서 가장(어쩌면 유일한) 뮤지컬적인 장면이라는 것은 아이러니다.

이런 점에서 <레미제라블>을 뮤지컬영화가 아니라 차라리 노래영화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하지만 최종적 범주화는 영화사가들이나 영화학자들의 몫일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인물들이 오직 노래에 몰두함으로써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을 따름이다. <레미제라블>에는 고전 뮤지컬영화의 춤이 없고, 무대 뮤지컬의 표현주의적 무대 미술도 없다. 하지만 양자에는 없는 게 하나 있는데 그것은 클로즈업이다. 정한석을 비롯한 몇몇 평자들이 이미 이 영화의 클로즈업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했으므로, 이 글에선 오직 노래와 연관시키려 한다.

관객과 무대의 거리가 고정된 무대 뮤지컬에는 클로즈업이 있을 수 없지만, 고전 뮤지컬영화들도 클로즈업을 잘 사용하지 않았다. 아마도 당시의 뮤지컬 스타들에겐 표정보다 동작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프레드 아스테어가 자신이 춤추고 노래하는 장면을 항상 컷 없는 풀숏으로 촬영하기를 요구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그들에게 연기는 내면의 섬세한 표현이 아니라, 아름다운 동선과 동작의 리듬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레미제라블>에서는 클로즈업이 특별히 많이 사용되었다기보다 인상적으로 사용되었다. 무대 뮤지컬에서도 고전기 뮤지컬영화에서도 배우의 머릿결과 입술의 떨림까지 이런 근접 거리에서 만나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 클로즈업이 노래의 방식을 바꾼다. 우리를 감동시킨 판틴 역의 앤 해서웨이는 사라 브라이트만이 아니지만, 그녀는 가창력의 노래가 아닌 ‘표정의 노래’를 부른다. 그 표정의 노래를 메소드 창법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잔털과 땀구멍까지 포착하는 클로즈업은 잔인한 카메라워크다. 노래라는 양식적 표현을 메소드 연기와 결합하는 것이 한 배우에게 어떤 어려움을 초래하는지 관람자로선 알기 힘들다. 그럼에도 <레미제라블>은 스크린 스타들에게(물론 러셀 크로는 제외하고) 메소드 창법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공연 실황 영상이 하나의 장르로 되어가면서, 무대 뮤지컬 배우들에게도 메소드 창법이 더욱 강하게 요구될지도 모른다. 앞서 언급한 <모차르트 락 오페라>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공연 영상에서 내가 느낀 감흥의 차이는 노래의 매력뿐만 아니라 후자의 배우들이 클로즈업을 버텨내지 못했다는 데서도 기인하는 것 같다.

클로즈업과 연관된 또 다른 문제는 좀더 미묘하다. 영화는 3인칭 매체다. 하지만 인물의 클로즈업은 2인칭 효과를 빚어낸다. 스크린 속의 그와 관객인 내가 직접 대면하면서 그는 ‘당신’이 된다. 이 효과는 잠정적이어서 서사가 완결되면 영화는 다시 3인칭으로 돌아간다. 2인칭 효과는 카메라와 피사체의 거리에만 달려 있는 건 아니다. 한편의 영화가 끝났을 때, 대부분의 관객은 서사를 경유해 그 영화를 기억한다. 거의 클로즈업만으로 이루어진 영화가 있다 해도 이것이 2인칭 영화가 되지 않는 것은 매 장면들이 결국 서사라는 하나의 질서로 정리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너의 (이해할 수 없는) 표정들이 그의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로 수습되는 것이다.

노래는 그렇게 수습되지 않는다. 대개 영화를 보고 나서 우리는 목소리를 잊는다. 말과 음성을 혼동하기 때문이다(미셸 시옹, <영화의 목소리>). 수많은 대사를 듣지만, 배우의 음성은 잊혀지거나 기억의 바닥으로 가라앉고 말의 내용만으로 되살려진다. 말하자면 ‘당신의 음성’이 ‘그의 말’로 기억되는 것이다. <레미제라블>은 노래가 대사를 대체했다. 이 노래들은 대사로 환원 불가능하다. 이 영화를 본 어느 누구도 판틴의 애절한 노래를 가사의 내용으로만 기억하지 않는다. 혹은 슬픔을 표현하는 행위로 정리하지도 않는다. 노래는 “내용이 온통 그 주소 안에 담겨 있는 텅 빈 메시지의 소중한 대체물”이며 “내가 노래를 부르면서 당신에게 주는 것은 내 몸”이기 때문이다(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여기서 클로즈업과 노래의 결합이 빚어낸 비상한 효과를 말할 수 있다. 노래는 그녀의 음성 에 실려 우리 귓가에 맴돌고 그 노래는 언제나 어둡고 더럽고 추운 곳에서 울먹이던 판틴의 슬픔에 찬 표정과 함께 시작된다. 그녀의 노래는 서사에 포섭되지 않으며 언제나 나를 향해 들려온다. 노래는 클로즈업의 순간을 2인칭의 자리에 봉인한다. 혹자는 훌륭한 가수가 노래하는 장면을 TV로 본 다음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수에게 노래는 대체가능하다. 슬픈 노래를 불렀던 그녀가 다음에는 발랄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다만 그가 일찍 죽어 생전에 불렀던 노래들이 하나의 얼굴 혹은 하나의 캐릭터에 녹아들었을 때, 우리는 그를 이런 방식으로 기억한다.

음성과 음향은 나를 겨냥하지 않을 수 있지만, 노래는 늘 나를 향해 들려온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2인칭적이다. 노래의 2인칭성은 <레미제라블>에서의 혁명의 파토스와도 내면적 연관이 있다. 혁명의 파토스와 혁명이라는 사건 사이에는 모종의 불연속성이 있다. 종종 결혼이 사랑을 배반하듯 혁명은 혁명의 파토스를 배반한다. 혁명의 파토스는 그것을 정리하려는 어떤 질서와도 불화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와 엄마의 2인칭적 관계를 억압한 제3자(아버지의 이름)를 영원히 추방하는 것, 더이상 ‘그’가 존재하지 않는 상상계의 복원이라는 불가능에의 열망이 혁명의 파토스에 있다. 서사에 포섭되지 않는 노래와, 혁명이 초래한 새로운 질서에 포섭되지 않는 혁명의 파토스에는 동류의 피가 흐른다. 결말이 어떻게 수습되어도 노래와 파토스는 남는다.

서사는 부차적이었다

논의의 마무리 단계에 이른 것 같다. <레미제라블>은 한편의 서사라기보다 슬픔과 사랑과 혁명을 노래하는 몸들, 캐릭터들의 연쇄다. 서사가 캐릭터를 조직하는 게 아니라, 노래하는 몸들의 배열에 서사가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고전기 이후 많은 영화사가들과 평자들은 서사의 부실화를 지적해왔다. <레미제라블>에서 일어난 일은 서사의 부실화가 아닌 부차화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 영화는 오늘의 대중 서사의 중심이 사건과 서사가 아니라 캐릭터라는 사실의 공식 선언처럼 보인다. 물론 고전적 서사에서도 캐릭터 탐구는 있었지만, 캐릭터 스터디는 한 캐릭터의 심층으로의 여정을 서사화한 것이었다. 하지만 <레미제라블>의 서사 방식은 유형화된 캐릭터들의 경연에 서사가 선택적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캐릭터 스터디가 아니라 캐릭터 플레이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가 이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면 TV 관람체험, 예컨대 예능 프로그램과 시트콤 시리즈의 서사 방식인 캐릭터 경연이 우리의 서사 체험의 중심이 되었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무한도전>에서처럼 시리즈화된 TV의 캐릭터 경연에서는 매회 다른 유형과 성격의 서사가 선택된다. 이 개별 서사는 새롭게 고안되기보다는 기존 서사의 패러디가 대부분이다. TV 예능과 시트콤은 레프 마노비치와 같은 미디어학자들이 제기한 데이터베이스 서사의 가장 적극적인 구현자인 셈이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캐릭터의 심층으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의 진화 혹은 수평적 다변화의 과정에 동행한다. 개별 서사는 임의적이어서 별다른 실험적 장치 없이도 서사 안팎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개별 서사의 결말은 한 소우주의 질서를 매듭짓는 윤리적, 미학적 결단이 아니라 캐릭터 경연들 사이에 놓인 쉼표라는 하나의 구두점으로 전락한다. 이 현상은 김혜리가 ‘네버엔딩 스토리의 위협’(<씨네21> 864호)에서 비판적으로 지적한 “기약 없는 속편의 벨트로 이어지는 (할리우드) 영화 문화”와도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오늘의 대중서사의 많은 분야에서 서사와 캐릭터의 지위는 완전히 역전된 것처럼 보인다. 일본의 문화비평가 아즈마 히로키는 일본 라이트노벨(만화적인 혹은 애니메이션적인 일러스트가 더해진, 중고생을 주요 독자층으로 하는 엔터테인먼트 소설)의 성격을 ‘캐릭터의 자율화’라고 요약했다(<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캐릭터가 중심적 지위를 얻고 “이야기는 성립하지 않거나 너무나 간단하게 성립해버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서사의 부차화, 캐릭터의 중심화라는 현상이 라이트노벨뿐만 아니라, 이제는 속 편이 거의 규범화된 할리우드영화, 그리고 한국의 대중영화, TV와 게임 등을 관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수긍할 수 있다.

이 글의 첫머리에 제기한 에토스의 분열과 위장된 봉합에 내가 그리고 많은 관객이 무감한 이유에 대한 잠정적인 대답은 이것이다. <레미제라블> 자체가 전형적인 캐릭터 플레이는 아니지만, 오늘의 일반적인 서사체험이 혁명서사와 노래극의 결합이라는 특별한 양식의 이 영화를 더이상 서사 중심적 관점으로 보지 않도록 했을 것이다. 다만, 이를 서사의 퇴조라는 부정적 사태로 보는 시각을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캐릭터 플레이라는 다른 방식의 서사의 정착으로 볼 것인지, 그리고 노래가 이 과정에서 영화 문법의 근본적 변화를 초래할 새로운 요소가 될지 혹은 노래영화라는 뮤지컬의 하위 장르로 탄생할지의 문제는 좀더 숙고해야 할 것 같다.

<라이프 오브 파이>

<라이프 오브 파이> 경탄할 수밖에 없는 이유

짧게나마 <라이브 오브 파이>에 대한 단상을 덧붙이려 한다. 일반 극장에서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대형 스크린 3D였는데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지인의 권유로 아이맥스 스크린 3D로 다시 보았을 때, 뭔가 다른 세상을 만났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이전까지 본 3D영화에서 내 감각을 자극한 이미지들은 주로 나를 향해 쇄도하는 돌출 이미지였다. <라이브 오브 파이>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3D 이미지들은 나로부터 멀어지는 후방 확장 이미지였다.

3년 전에 개봉한 <토이 스토리3>에서 본편만큼 흥미로웠던 것은 본편 전에 상영된 단편 3D애니메이션 <밤과 낮>이었다. 캐릭터의 몸을 투명화해 그 뒤로 3D 이미지들이 펼쳐지는 광경은 3D를 심도의 공간 창출에 활용할 때 특별한 효과가 생길 수 있음을 예감케 했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그 예감을 상상하기 힘들 만큼 과격하게 실현한 영화였다.

효과적인 3D 돌출 이미지에 움찔해지는 이유는, 그 이미지가 스크린을 벗어나 내 신체에 닿을 수 있는 입체라고 우리가 순간적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 이미지는 비유적인 의미에서 촉각적인 게 아니라, 내 피부를 거의 건드리는 촉각 이미지다. 반면 후방 확장 이미지는 그것이 나로부터 물리적으로 멀어짐으로써 오히려 내 시선의 권능을 은연중에 약화시킨다. 그 이미지는 내 시야에 더해지는 게 아니라 내 시선으로부터 빠져나가려 하며, 그것을 보고 있는 우리에게 모종의 상실감 혹은 불가지의 느낌을 갖게 한다.

<라이프 오브 파이>가 비상하게 느껴진 첫 장면은 파이의 어머니가 어린 파이에게 힌두교의 신 크리슈나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목이다. 어린 크리슈나의 입속을 들여다보니 입속에 우주가 있었다는 내레이션이 흘러나온 다음 그 이야기가 담긴 만화책이 펼쳐진다. 한컷에 그려진 크리슈나가 입에는 정말 우주가 담겨 있는데, 처음에 2D였던 그 장면은 곧 3D로 바뀌고 클로즈업된 입안의 우주는 한없이 뒤로 물러나면서 스크린 전체로 확장된다.

이 장면의 아득한 느낌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주 작은 존재 안에도 우리가 결코 닿을 수 없는 우주가 있다는 딱딱한 진실을 이 3D 이미지보다 더 아름답고 신비롭게 시각화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리긴 힘들다.

망망대해 위의 구명선에 파이와 호랑이(리처드 파커)만 남겨진 조난 장면에서부터 <라이프 오브 파이>의 3D 이미지는 본격적인 위력을 발휘한다. 아이맥스 스크린으로 이 장면을 보면 바다가 시야의 상하좌우를 완전히 채우고 있어 내가 거의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것을 3D에 의해 강화된 현실감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멀리 있는 대상을 볼 때 실제 눈이 지닌 원근법 시야는 스크린의 2D 이미지에 가깝다는 사실을 이 장면을 보고 알게 되었다. 우리는 영화를 보는 어떤 순간에도 스크린을 대하고 있다는 의식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일이 없다. 스크린과 나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내 시선 어디엔가 새겨져 있다. <라이브 오브 파이>의 조난 장면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스크린 위가 아니라 스크린 뒤에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다. 스크린과 나의 거리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먼 거리와 광활한 공간이 스크린 뒤에 나타난다. 그 뒤의 세상은 내가 보고 있지만 결코 나의 시선이 장악할 수 없다. 바다 가운데 고립되어 있다는 허구의 설정이 빚어내는 두려움보다는 이 시선의 무력함 때문에 이 장면들은 종종 체념과 경외의 마음을 오가게 한다.

주인공 이름이 유래한 작은 인위적 공간이지만 물속에서 보면 우주와 같은 느낌으로 확장되는 풀장, 풀장 이름에서 유래했으나 끝없는 무리수를 지칭하는 파이라는 수학적 이름으로 고쳐 불리게 된 주인공, 누워 있는 나신의 여인 형상으로 바다를 떠돌아다니며 상륙하는 인간을 잡아먹는 식인 식물의 섬, 실수로 사람 이름보다 더 사람 같은 느낌의 이름을 갖게 되었으나 결코 길들여지지 않은 채 생명의 은인을 뒤돌아보지 않고 정글로 사라진 호랑이. <라이프 오브 파이>는 아무리 잡아도 어느새 손을 빠져나가는 끝없는 유동의 의미들, 이미지들, 존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이 과정은 파이가 거의 죽음의 순간에 직면했을 때 떠오른, 바다 속의 한점에서 무수한 동물들이 끝없이 분할되어나가는 우주적 환상으로 집약된다.

<라이프 오브 파이>를 하나의 이미지로 대변한다면, 단순성과 투명함과 유동성과 무한함을 동시에 지닌 물이다. 물의 심오한 물질성을 3D의 공간감각으로 재창조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경탄의 대상이 될 자격이 있다. 요컨대 <라이프 오브 파이>는 타자의 타자성을 3D의 공간감각으로 표현한 최초의 영화다. 3D를 통한 새로운 미학의 개시 가능성을 더이상 의심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영화를 보고 <수색자>(1956)의 마지막 장면, 존 웨인이 황야 저편의 아득한 모뉴먼트 밸리를 향해 되돌아가는 그 전설의 장면을 3D로 찍는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이 떠올랐고, 보고 싶었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