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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혁의 최신가요인가요] 겨울 한잔 어때?
김중혁(작가) 일러스트레이션 아방(일러스트레이터) 2013-03-08

로지피피 <낭만의 계절>

감기가 오래간다. 벌써 4주째다(곳곳에서 ‘나도요, 나도요’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이번 감기는 집세 밀린 주제에 매일 시끄럽게 파티를 벌이는 눈치 없는 세입자처럼 뻔뻔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나갈 듯 나갈 듯 나가지 않는다. 나을 듯 나을 듯 낫지 않는다. 푹 자고 일어나서 다 나았나 싶으면 슬금슬금 다시 기어들어온다.

4주 동안 감기와 함께 지냈더니 이제는 감기 걸린 몸에 익숙해졌다. 코는 맹맹하고 목은 살짝 따끔거리고, 전반적으로 온몸에 힘이 없으며 가끔 머리가 아프다. 가래도 끓고, 눈알도 아프고, 잠이 자주 오(는 건 원래 그랬던 건지도 모르)고. 버스나 기차의 히터 옆에만 가면 건조함 때문에 입술이 바짝 마른다(4주 동안 엄살도 발전해서 감기 증세로만 이 지면을 가득 채우고 싶지만, 참겠다).

독감에 걸려 심하게 앓고 있는 분들에겐 미안한 소리지만, 때로는 감기 걸린 나른한 몸이 좋기도 하다. ‘자, 힘차게 시작해보는 거야’라고 마음을 먹는 건 아무래도 벅차기 때문에 대체로 앉아 있거나, 어딘가에 기대거나, 누워 있는다. 운동을 하기도 힘든 몸이기 때문에(휴식이 최고의 약이라지요!)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잔다. 감기가 걸렸는데도 꼬박꼬박 회사에 나가야 하는 분들에겐 미안한 소리지만, (감기)약기운이 몽롱한 상태에서 잠깐 잠이 드는 오후 네시의 나른함이란, 1년에 한번만 맛볼 수 있는 별미 같기도 하다.

빨리 감기가 낫길 바란다. 집세 내지 않는 세입자를 몰아낸 다음, 먼지떨이로 탈탈 털어 봄맞이 온몸 대청소도 하고, 힘차게 달리기도 하고 바쁘게 살고 싶다. 그런데 한편으론 감기가 나으면 겨울이 갈 것 같아서 아쉬운 마음도 든다. 아, 다시 겨울이 오려면 한참 멀었는데, 보내기 아쉽다. 겨울 내내 감기에 걸려 있다 해도 나는 겨울이 좋다. 눈이 오고, 공기에 입김이 스며들고, 유리창은 차갑고, 열린 문틈 사이로 바람이 세차게 불어들고, 따끈한 커피와 음악이 있는 그런 겨울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나.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있으면 감기 걸린 몸이 둥둥 떠다닌다.

로지피피의 신보 ≪로맨티카≫는 겨울에 듣기 딱 좋은 노래들로 가득하다. 따뜻하지만 건조하지 않다. 물 적신 수건이 어딘가에 걸려 있는 것 같다. 수록곡 중 <낭만의 계절>을 듣다가 깜짝 놀랐다. 겨울을 노래하는 평범한 가사라고 생각했는데, 난데없는 단어들이 귀를 때렸다. 로지피피의 달콤한 목소리로 이런 단어들을 듣게 될 줄 몰랐다. ‘인후염, 편도염, 수족냉증, 열감기, 우울증, 모두 나의 친구. 오, 그래도 겨울, 겨울, 낭만의 계절.’ 이것은 마치 감기에 걸린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면서 자신의 노래를 들을 줄 알았다는 듯한 예지의 노래가 아닌가. 예, 저도 로지피피와 생각이 거의 비슷합니다. 감기에 걸려도, 목이 아파도, 조금 우울해도, 그래도 겨울, 겨울, 나만의 계절.